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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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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한암 대종사(1876~1951)

한암 대종사(1876~1951)

경허,만공,수월과 함께 근세에 선풍을 중흥시킨 한암스님은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한암(漢巖)은 호요, 이름은 중원(重遠)이고, 온양이 본관이다. 천성이 영특하여 총기가 빼어나 한 번 의심이 나면 풀릴때까지 캐묻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스물 두 살이 되던 해 금강산에 유람을 갔다가 발심하여 장안사 행름(行凜)노사를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다.
출가한 지 몇 해 뒤에 신계사 보운강화에 갔다가 보조국사의 '수심결'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 뒤로, 한암은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운수행각에 나서 성주 청암사의 경허화상을 만났다.

하루는 경허화상을 모시고 차를 마시다가 경허화상이 '선요'의 한 구절인 "어떤 것이 진실로 구하고 진실로 깨닫는 소식인가? 남산에 구름이 일어나니 북산에 비가 내린다" 라는 문답을 인용하면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자, 한암은 ' 창문을 열고 앉았으니 와장이 앞에 섰다 ' 고 대답하였다. 경허 화상은 이튿날 법상에 올라가 대중을 돌아보면서 "한암의 공부가 개심(開心)을 초과했다" 고 인가하였다. 이때가 스물네 살 이었다.
이어 한암은 서른 살 되던 1905년 양산 통도사 내원선실의 조실로 있다가 1910년 봄에 선승들을 해산시키고 평안도 맹산 우두암에 들어가 보임(保任) 중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으니 이때가 서른다섯 되던 겨울이었다. 한암은 이때부터 중생이 서로 의탁하여 사는 이 세상에 들지도 않고 나지도 않으면서 수시수처(隨時隨處)에서 선풍을 크게 떨쳤다. 당시 송만공(宋滿空) 스님과 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한암스님은 쉰이 되던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 스님으로 있다가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삼춘(三春)에 말 잘하는 앵무새의 재주는 배우지 않겠노라" 하면서 오대산에 들어갔다. 한암은 오대산에 들어와 들고 다니던 단풍나무 지팡이를 중대 사자암 앞뜰에 심었는데 지팡이가 꽂힌 자리에서 잎사귀와 가지가 돋아나와 나무가 되니 중대 앞의 단풍나무가 그것이다. 이즈음 조계종 초대 종정이 되었다.
하루는 일본 조동종 사토오가 오대산 상원사에 와 한암에게 "어떤 것이 불법의 대의(大義)입니까?" 하고 묻자 한암스님은 놓여 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사토오가 "스님은 대장경과 조사어록을 보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하니 한암스님은 사토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적멸보궁에 참배나 갔다 오라" 고 대답하였다. 이어 사토오는 "스님께서는 만년의 경계와 초년이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고 묻자 한암은 "모르겠노라" 대답했다. 이에 사토오는 일어나 절을 하면서 활구 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어 감사하다고 하자 한암은 "활구라고 하였으니 벌써 사구(死句)가 되었네" 하였다. 사토오는 삼 일 동안 머물다 떠나면서 "한암스님은 세계에서 둘도 없는 인물이다." 하며 떠났다.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는 일본 저명인사의 발걸음이 잦았다. 일본 경무국장(치안감) 이케다가 2차 대전 막바지에 찾아와 "이번 전쟁은 어느 나라가 이기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이 있는 나라가 이기지요" 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롭게 대답하였다. 패색이 짙은 전세를 아는 이케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떠났다.
6.25 전쟁이 나자 모든 사람들이 피난을 떠났으나 한암은 그대로 상원사에 남았다. 이어 일사후퇴 때에 국군이 월정사와 상원사가 적의 소굴이 된다 하여 모두 불태우려고 했다. 월정사를 불태우고 상원사에 올라온 군인들이 상원사 법당을 불태우려고 했다. 한암 스님은 잠깐 기다리라 이르고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수(受) 하고 법당에 들어가 불상 앞에 정좌한 뒤 불을 지르라고 했다. 장교가 "스님이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하자 한암스님은 "나는 부처님의 제자요, 법당을 지키는 것이 나의 도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하며 자세를 흩트리지 않았다. 이에 감복한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을 뜯어내 마당에서 불을 지르고 떠났다. 오늘날 상원사 법당이 남은 것은 오로지 한암스님의 덕이다.
일사후퇴로 모두 피난을 떠난 지 두 달쯤 지나 1951년 3월 21일 - 1951년 신묘년 음력 2월 14일 - 아침, 스님은 죽 한 그릇과 차 한 잔을 마시고는 손가락을 꼽으며 "오늘이 음력으로 2월 14일이지"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찾아서 입고 단정히 앉아 입적했다. 이때 한암스님의 세수는 75세요, 법랍은 54년이었다.
당시 정훈장교인 김현기 거사가 사진을 찍기 위해 입적하신 방한암 스님을 햇볕이 드는 바깥채로 모셔 나오기 위하여 육신을 드니 몹시 가벼웠다고 한다. 그것은 방한암 스님이 입적하기 보름 전부터 사바세계의 연(緣) 이 다함을 알고 물외에는 먹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사진 앞에 있는 경상(經床)은 김현기 거사가 가져다 놓았으며 벽에 쳐져 있는 담요는 군인들이 문짝을 태워서 문에 담요로 두른 것이다.
한암 스님은 이야기 남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일발록(一鉢錄)」 한 권을 남겼는데 그마저 1947년 봄, 상원사에 불이 났을 때 타고 말았다. 이 책은 뒤에 1995년 월정사 주지 현해스님이 문도들의 뜻을 모아 「한암일발록(漢岩一鉢錄)」 으로 재간행하였다. 제자로는 보문(普門), 난암(煖岩), 탄허(呑虛)등이 있으며, 한암스님은 1925년 오대산에 들어온 뒤 입적할 1951년까지 27년 동안 오대산문을 나서지 않아 수행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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