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신미 스님(1405~1480)
충북 영동에서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유학자이며 숭불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이다.
처음에 법주사에 출가하여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과 율을 배웠다. 모친의 뱃속에서 나올 적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왕자가 손금에 있어 부모와 삼촌들은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 때부터 이조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나라에 역적이 된다하여 국법에 의하여 죽이는 관습이 있었기에 죽음을 면하려고 배안 병신노릇을 아니할 수 없어 항상 손가락을 오그려 주먹을 쥐고 살수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잘나고 평소에 말을 잘하지 않았으나 한번 말을 내놓으면 청산유수 같았고 눈을 부릅뜨면 안광이 눌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이 될 만한 기품과 왕의 기상을 타고났다고 한다. 두뇌가 총명하여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읽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에 뜻이 있어 자칭 신미信眉라 하여 머리 깎고 스님이 되었다.
세종은 세종26년에 五子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고, 세종27년에 七子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고, 세종28년에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는 등 3년 동안에 세분을 잃고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뉘우치던 중 병환으로 고통 받을 적에 동생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세종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를 주관했다. 또한, 복천사를 중수하고 그곳에 아미타 삼존불을 봉안했다. 이공으로 문종은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하였다.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세종을 지성으로 시탕侍湯하였으나 효험이 없던바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그로부터 세종은 신미대사와 가까워졌고 신미대사의 박식博識함에 감탄하고 인물됨에 매료되었다.
세종은 신미대사에게 혜존각자慧覺尊者의 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병으로 내리지 못하고 문종에게 유교를 내리니 문종은 선왕의 뜻을 받들어 왕에 오르자 사호賜號하니 「慧覺尊者」라 했다. 특히 세조와는 수양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尊者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대사를 우두머리로 효영대군孝寧大君과 김수온金守溫 등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함에 100종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 2년) 도갑사를 중수하여 약사여래불상 3구를 조성·봉안했다. 1458년에 국가의 요청으로 해인사의 대장경을 인출할 때 이를 감독했고, 1461년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을 설치할 당시 이를 주관했다. 이때 언해諺解된 불경이 〈법화경〉·〈반야심경〉·〈영가집〉 등이다.
1464년 왕이 속리산 복천사를 방문했을 때 사지斯智·학열學悅·학조學祖 등의 승려와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다. 같은 해 상원사上院寺로 옮겨가,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했다. 신미는 여러 승려의 법어를 번역·해석하여 유통하게 했는데 기화己和의 〈금강경설의 金剛經說誼〉를 교정하여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 1책을 만들고, <선문영가집(禪門永嘉集)>의 여러 본을 모아 교정했으며, 〈증도가(證道歌)〉의 주를 모아 책으로 간행했다.
속리산 복천사를 비롯하여 오대산 상원사, 월정사, 낙산사 대자암 등을 중신하고 국책으로 처분함에도 소신껏 불사에 힘썼으니 그 공이 지대하였다. 성종11년에 열반에 오르니 복천사 남쪽 200미터에 신미부도信眉浮屠를 세웠으니 충청북도 문화재 12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