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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드러냄(揚於家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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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7-08 12:30 조회6,475회 댓글0건

본문

허물을 드러냄

■ 번역 ■

가추(家醜)란 제 집안의 허물되는 일이니, 제 집안의 허물을 드러낸다면 누구나 다 옳지 못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가추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사소하고 비열한 일이요, 하나는 광대하고도 특수한 일이다.

어떤 것이 사소하고 비열한 일인가. 개인이 지은 일이 타인에게 알려지면 크게 수치스러움이 되는 일과, 그리고 대중이 공동으로 지은 일이라도 다른 대중에게 파급되면 크게 풍화(風化)에 손상되는 일이니, 이러한 등의 일에 대해서는 차라리 혀를 끊을지언정 드러내지 말아야만 불자의 바른 행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이르시되, “손님(일반인)을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집안의 허물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정반대로 집안의 허물을 드러낸다고 함은, 위에 말한 광대하고 특수한 일에 속한다.

어떤 것이 광대 특수한 일인가. 일을 짓는 자기부터 기탄없이 회중(會衆)에 있어서 쾌활하게 선양함을 말함이니, 다시 말하면 즉 불조(佛祖)의 여실(如實)한 말씀과 깊은 말씀(甚深語)이다. 겉으로 들으면 두려움이 생겨서 비방이 있는 듯하나 자세히 이해하여 터득하면 무한한 이익을 얻기 때문에 드러내려는 것이다. 여기에 약간 비방의 뜻이 있기 때문에 집안의 허물이라 한 것이니, 이러한 의미로서 ‘집안의 허물을 드러낸다(揚於家醜)’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청허노사(淸虛老師)께서 이르시되, “부처와 조사가 세상에 출현하심은 바람없는 바다에 파도를 일으킴이라. 문자도 마구니의 업이며, 명상(名相)도 마구니의 업이며, 내지 부처님 말씀이라도 마구니의 업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에 의하면 어느 것인들 가추(家醜)가 아니리오. 가추(家醜)도 가추요, 가추를 드러냄도 가추요, 가추를 드러내지 않음도 역시 가추이니, 그런즉 <양어가추(揚於家醜)>라는 제목으로서 불조의 말씀을 풀어서 드러냄은 크게 허물되는 일이니, 이는 곧 필자의 허물을 드러냄이다. 그런줄 알고도 짐짓 범하는 것은 《선원(禪苑)》의 청탁에 의한 부득이한 경우로 이것을, 소위 울며 땡감 먹는 격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가추 몇 가지를 바로 말하고자 한다.

삼계의 대도사요, 사생(四生)의 자부(慈父)이신 석가세존께서 처음 탄생하실 때에 두루 일곱 걸음을 걸으시고 사방을 돌아보시며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시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시며 이르시되, “하늘 위 하늘 아래 오로지 내가 홀로 높다.” 하셨다.

이 말씀을 설하신 세존은 설주(說主)가 되시고, 이 말씀을 듣는 일체중생은 청중이 되는 것이다. 청중 가운데도 이 부처님 말씀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있고, 믿는 가운데도 조문(祖門)의 믿음과 교문(敎門)의 믿음이 다르고〔普照國師說〕, 일승(一乘)의 믿음과 삼승(三乘)의 믿음이 다르다〔李通玄1)長者說〕 하였다. 믿는 자는 말하기를 “이 일이 이와 같다” 하여 긍정하고, 믿지 않는 자는 “이 일이 이와 같지 않다”고 하여 부정하니, ‘이와 같다’고 하는 긍정심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찬탄하고 믿으며 받들어 행해서 한량없는 이익을 얻게 되고, ‘이와 같지 않다’고 부정하기 때문에 비방하고 훼욕하며 경만하고 질투하여 한량없는 업장을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천상천하 유아독존’에 대하여 비방하는 자는, ‘세존은 대성인(大聖人)이신데 웬 아만이 그렇게 높은가’라고 한다. 심심산곡에 있는 나는 이런 비방하는 말을 종종 들었다.

또한 조문(祖門, 禪門)의 믿음은 유위(有爲)의 인과를 일체 믿지 않고, 다만 자기가 본래 부처라 하여 천진자성(天眞自性)이 사람마다 갖추어져 있고, 열반의 묘체(妙體)가 낱낱이 원만히 이루어져 있어, 다른 데서 찾을 필요가 없이 원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음을 믿는 것이며, 교문(敎門, 교학)의 믿음은 복락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십선(十善)을 닦아 인천(人天)의 복락이 되게 하고, 낙과공적(樂果空寂, 성문, 연각)을 즐기는 이에게는 생멸인연(生滅因緣)으로 인한 고집멸도(苦集滅道)를 닦게 하고, 성과불과(聖果佛果, 보살승, 대승)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오랜 세월 육바라밀을 닦아 보리열반(菩提涅槃)에 이르는 정과(正果)를 삼게 함을 믿는 것이다.

또한 일승(一乘)의 믿음이란, 무량겁(無量劫)이 곧 일념(一念)이요 일념(一念)이 곧 무념(無念)이니 근본보광명지(根本普光明智)를 의지하여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십지(十地)·십일지(十一地)를 두루 닦아서 덕행이 원만하여 불과(佛果)를 증득(證得)하되, 시종(始終) 한 찰나도 삼매를 여의지 않은 줄 믿는 것이다.

삼승(三乘)의 믿음이란, 혹은 미혹을 끊고 과를 증득하며, 혹은 미혹을 그대로 두고 중생을 제도하며, 혹은 불과(佛果)가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2)을 닦은 뒤에 있다 하며, 혹은 예토(穢土)인 사바세계 밖에 따로 정토(淨土)를 구할 수 있음을 믿음이니, 교문(敎門)과 삼승에 대한 행상(行相)에 관한 것은 자세히 말하자면 한량이 없고, 또 필자가 일찍이 잘 익히지〔習學〕 못하여서, 고인의 말씀에 의하여 대강을 말했거니와, 이 선문(禪門)에 대하여 선근 있는 자는 곧 신자(信者)와 신자 가운데에 조사 문중의 믿음과 일승 수행자의 믿음이 그것이니, 이러한 근기가 있는 자는 곧 부처와 조사를 뛰어넘는 견해와 사자가 사람을 무는 역량(力量)이 있는 것이다.

본래 평등한 성품 가운데 누가 수승한 근기가 아니리오마는, 믿고 믿지 않는 관계와 또 여러 가지의 차별된 믿음으로 인하여 수승한 근기와 수승하지 못한 근기가 있으니 세존께서 멸도(滅度)하신 뒤에 무수한 조사와 선지식이 출현하시어 그 깊은 뜻을 간파하여 모두 수승한 근기가 되셨지만, 그 중에도 가장 특수하고 가장 믿지 않는 자로부터 훼방을 초래한 공안(公案)을 들어 말하고자 한다.

운문문언선사(雲門文偃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는 일찍이 목주(睦州)땅 진존숙(陳尊宿)화상을 배알하였는데, 진존숙이 운문선사가 오는 것을 보시고 문을 닫거늘, 운문선사가 문을 두드리니, 진존숙이 묻기를,

“누구냐?”

선사가 답하기를, “문언(운문문언)입니다.”

진존숙이 묻기를, “무엇하러 왔느냐?”

선사가 답하기를,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하였으니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진존숙이 문을 열어서 한 번 보고는 도로 문을 닫거늘 운문선사가 연달아 3일간 문을 두드렸는데, 제3일째 되던 날 존숙이 문을 열었다. 그때 운문선사가 들어가려고 하자 존숙이 멱살을 움켜 잡고, “말해 봐라 말해 봐…….”라고 하자, 운문선사가 머뭇거리거늘, 존숙이 문득 밀어내고 문을 닫는 그 순간 운문선사가 깨달았다. 그러나 선사는 한 쪽 발을 다쳐서 별호를 파각옥사(跛脚阿師)라 하였다.

운문선사가 유아독존(唯我獨尊)의 화두를 들어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그 당시에 있었다면 여래를 한 방망이로 타살하여 개에게 주어서 천하가 태평하게 했을 것이다.”고 하신 이 말씀에 대하여, 믿는 자로 말하자면 설사 그 뜻을 엿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믿으므로 다른 말이 없겠지마는, 믿지 않는 이는 훼방이 적지 않으리라. 그러나 비방하는 것도 인연이 되어서 필경에는 들어오기 때문에 비방하는 사람이라고 미워하거나 혐의(嫌疑)하지 않는다.

당시에 법안문익선사(法眼文益禪師) 같으신 어른도 이 말씀을 들으시고, 크게 놀라 온 몸에 땀을 흘리며, “부처님을 비방함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하셨다가, 20년 뒤에 비로소 철저히 깨닫고 나서 신심이 희열에 차서 법좌에 올라 대중에게 이르기를, “운문의 기세가 옥(玉)과 같으나 또한 불법의 도리가 없도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운문이야말로 참으로 부처님의 은혜를 갚은 이다.” 하셨다. 운문선사가 그 말을 듣고 이르기를, “나의 평생 공부가 이 절자(浙者 : 법안은 절강성 사람임)에게 간파되었구나!” 하셨으니, 이 깊고 오묘한 도리는 법안선사와 같이 자기가 간파한 뒤에야 비로소 의심이 없는 것이요, 먼저 깨달아 사무친 사람이 설파(說破)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전 사람〔古人〕이 깨달은 뒤에 선사(先師, 운문)를 찬탄하여 이르기를, “내가 선사(先師)의 덕 높음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선사(先師)가 나를 위하여 설파해 주지 아니함(말해 주지 아니함)을 중히 여기나니, 만일 나를 위하여 설파하셨던들 어찌 오늘날 이와 같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셨으니, 이런 말씀을 보면 선문(禪門)의 비밀한 언구는 알음알이로 헤아려서 체득하지 못하는 줄 확신하신 말씀이다.

그런즉 이 뜻을 진정하게 체득한 선지식이 혹 염(拈)·혹 송(頌)·혹 상당(上堂)하여 제시하신 것이 예로부터 끝이 없지마는, 그 가운데 조계문하(曹溪門下)의 직전정맥〔直傳正脈〕 17대 본분종사이신 대혜종고선사의 상당법어를 해석하여 대중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대혜종고선사께서 법좌에 올라 이르시되,

“마지막 한 구절〔末後一句子〕3)이 음성 이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벗은 듯하여 하늘 땅을 덮고 소리와 빛을 덮었으니 황면노자4)가 그 하나를 얻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도솔천5)을 떠나기 전에 이미 왕궁에 탄생하였고 어머니의 태(胎)에서 나오기 전에 이미 중생을 다 제도하였다.’고 하셨고, 탄생하실 때엔 온 세계를 진동하시고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대사자후(大獅子吼)를 발하여 이르시되, ‘하늘 위 하늘 아래 오로지 나만이 홀로 높다’ 하셨으니, 이는 일대사 인연인 생멸의 실상을 밝히시기 위하여 부처의 지견(知見)을 열고, 부처의 지견을 보이고, 부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 부처의 지견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수천 년 뒤에 절름발이 중 운문에게 ‘한 방망이로 때려 죽여 개나 배불리 먹여주어 천하의 태평을 도모하겠다.’는 말을 들을 줄은 모르셨으리라.

대중은 말해보라. 석가노자(부처님)는 허물이 어디에 있는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큰 소리를 한 탓일까, 남의 집 남녀들을 들뜨게 한 탓일까? 부처의 지견을 열고 보이고 깨닫게 한 탓일까? 이런 식으로 따진다면 석가노자만을 비방할 뿐 아니라 운문대사의 법은(法恩)을 저버리는 것이니, 여기에 이르러서 만일 운문의 본 뜻을 안다면 자기의 본 뜻도 알 것이니 말해보라. 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잠깐 있다가 게송으로 이르기를,

“만고의 푸른 못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두세 번 건져 봐야 비로소 아나니라.” 하였다.

필자가 이에 대하여 낯가죽이 세 치나 두꺼움을 잊고 잠깐 몇 마디 붙이려 한다.

대혜선사의 이 법어를 보면 불조(佛祖)의 언구를 심의식(心意識)으로 체득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 수 있다. 그러나 또한 한결같이 심의식으로 체득할 수 없다는 것만 알고 체득하려고 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면 불조의 뜻이 과연 어느 곳에 있는가. 만일 대혜의 낙처(대혜가 말한 핵심)를 알면 곧 자기의 낙처를 알 것이요, 자기의 낙처를 알면 곧 운문의 낙처를 알 것이요, 운문의 낙처를 알면 곧 세존의 낙처를 알 것이다.

자, 말해 보아라. 필경에 낙처가 어디인가? 마혜수라 천왕이 오도다. 알겠는가? 불로 능히 태울 수 없으며, 물로도 능히 적실 수 없으며, 바람으로 능히 날릴 수 없으며, 칼로도 능히 쪼갤 수 없도다. 부드럽기는 도라〔兜羅〕6)와 같으며 견고하기는 철과 같으니, 고금 천하에 아는 이가 없도다.

어찌하여 아는 사람이 없는가?

잠시 있다가 이르기를,

“늙은 오랑캐(달마)의 지(知)는 인정하지만, 늙은 오랑캐의 분별심〔會〕은 인정할 수 없다.”




■ 原文 ■

家醜란 것은 제 집안에 過失되는 事이니 제 집안에 過失되는 事를 揚言한다면 누구나 다 不可하다고 생각하리라. 그러나 家醜가 두 가지 差別이 有하니 一은 些少卑劣한 事이요 一은 廣大殊特한 事이다.

어떤 것이 些少卑劣한 事인고. 箇人의 作한 事를 他人에게 傳及되면 크게 羞恥되는 일과 衆이 共同으로 作한 事라도 他衆에게 傳及되면 크게 風化에 損傷되는 事이니 此等事에 對하야는 차라리 舌을 截할지언정 揚言하지 아니하여사 佛子에 正行이 될 것이다. 이러므로 普照國師가 이르사대 對客言談次에 不得揚於家醜라 하셨다. 그런데 나는 正反對로 家醜를 揚한다 함은 위에 말한 廣大殊特한 事에 在한다.

어떤 것이 廣大殊特한 事인고. 事를 作하는 自己부터 忌憚없이 衆會에 在하야 快活하게 宣揚함이니 다시 말하면 卽 佛祖의 如實語와 甚深語이다. 外相的으로 들으면 驚怖心이 生하야 誹謗이 有하나 자세히 理會하야 體達하면 無限한 利益을 얻게 되는 故로 揚하려 함이요 잠깐 毁謗이 有한 故로 家醜라 함이니 이러한 意味로서 揚於家醜라고 題를 내린다.

그러나 淸虛老師 이르사대 佛祖 出世가 無風起浪이라 文字도 魔業이며 名相도 魔業이며 乃至 佛語라도 魔業이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보면 어느 것이 家醜가 아니리요. 家醜도 家醜요 揚於家醜도 家醜요 不揚於家醜도 亦是家醜이니 그런즉 揚於家醜라는 題로써 佛祖의 言句를 披露함이 크게 過失이 됨이니 이는 곧 筆者 제 허물을 드러냄이다. 그런줄 알고도 짐짓 犯하는 것은 《禪苑》 請求에 依하야 不得已한 境遇에 此 所謂 울면서 땡감 먹는 格이다. 이에서부터는 몇가지 家醜를 바로 말하랴 한다.

三界의 大師요 四生의 慈父이신 釋迦世尊께서 처음 誕生하신 때에 周行七步하시고 目顧四方하시고 一手로 指天하시고 一手로 指地하시고 이르사대 天上天下에 唯我獨尊이라 하셨다.

이 말씀을 說하신 世尊은 說主가 되시고 이 말씀을 聽受하는 一切衆生은 聽衆이 되는 것이다. 聽衆에 在하야 信者와 不信者에 區別이 有하고 信者中에 祖門의 信과 敎門의 信이 異(普照國師說)하고 一乘의 信과 三乘의 信이 異(李通玄長者說)하니 信者는 云하되 是事如是라 하고 不信者는 云하되 是事 不如是라 하나니 如是라 하는 故로 隨喜讚歎하며 信受奉行하야 無限한 利益을 얻게 되고 不如是라 하는 故로 誹謗毁辱하며 輕慢憎嫉하야 無限한 業障을 生하게 된다.

毁謗者의 言은 世尊인 大聖人이 웬 我慢이 그렇게 高大한고 한다. 深深山谷에 在한 나로서도 이런 毁謗하는 말을 種種 들었다.

또 祖門의 信은 一切有爲因果를 信하지 아니하고 다만 自己가 本來이 佛이라 天眞自性이 人人具足하고 涅槃妙體가 箇箇圓成하야 他求를 假借하지 아니하고 元來 스사로 갖추운 줄로 信함이요.

敎門의 信은 福樂을 愛하는 者에게 十善으로 因人天으로, 樂果空寂을 樂하는 者에게 生滅因緣으로 因苦集滅道로, 聖果佛果를 樂하는 者에게 三劫六度로 因菩提涅槃으로 正果를 삼게 함을 信함이다.

또 一乘의 信은 無量劫이 곧 一念이요 一念이 곧 無念이니 根本普光明智를 依하여 十信 十住 十行 十回向 十地 十一地를 歷修昇進하야 德行이 圓滿하야 佛果를 證得하되 始終이 一刹那際三昧를 不離한 줄로 信함이요.

三乘의 信은 或은 惑을 斷하고 果를 證하며 或은 惑을 留하고 衆生을 濟度하며 或은 佛果가 三阿僧祇劫을 修進한 後에 在하다 하며 或은 穢土外에 別로 淨土를 求함을 信함이니 敎門과 三乘에 對한 對行相은 仔細히 말하자면 限量이 없고 또 筆者가 일찍이 잘 習學하지 못한 故로 古人의 말씀을 依하야 대강 말해 두거니와 이 禪門에 對한 當機는 곧 信者와 信者中에 祖門信과 一乘信이 그것이니 이 機에 在하야는 곧 超佛越祖의 見과 獅子咬人의 力量이 有하니라.

本然 平等한 性 가운데 누가 當機가 아니리요마는 信不信의 關係와 또 여러가지 差別信의 關係로 當機不當機가 有하니 世尊滅度하신 後에 無數한 祖師와 善知識이 出現하사 그 奧旨를 �破하야 다 當機가 되셨지마는 其中에 第一殊特하고 가장 不信者에 毁謗을 招하는 公案을 들어 말하려 한다.

雲門文偃禪師가 其人이다. 師는 일찍이 睦州陳尊宿을 參謁하셨는데 宿이 來함을 보시고 門을 閉하시거늘 師가 門을 쯳하신대 宿曰 誰오. 師曰 文偃이니이다. 宿曰 作什큯오. 師曰 己事를 未明이오니 乞師指示하노이다. 宿이 開門一見하시고 便閉門이시어늘 師가 連三日 쯳門하사 第三日에 至하야 宿이 開門하시거늘 師乃�入하려 하신대 宿이 擒住曰 道道하라. 師가 擬議어늘 宿이 便推出하시고 門을 閉하사 이로좇아 開悟가 되셨으나 師의 一足을 傷하야 別號를 跛脚阿師라 한다.

師 唯我獨尊話를 拈하야 이르사대 我가 當時에 만일 있었던들 一棒으로 打殺하야 狗子를 與喫하야 天下가 太平함을 圖하였을 것이니라.

이 말씀에 對하야 信者로 말하면 設或 그 意旨를 �得하지 못하였더라도 이미 信者이니까 異說이 無하겠지마는 不信者로서는 毁謗이 不少하리라. 그러나 誹謗하는 것도 結緣이 되야 畢竟에 得入하는 故로 誹謗하는 人이라고 미워하거나 嫌疑하지는 않는다.

當時에 法眼文益禪師 같으신 어른도 이 말씀을 들으시고 크게 놀라 通身에 流汗되야 曰 부처님을 誹謗함이 어찌 此에 至하냐 하셨다가 二十年後에 비로소 悟徹하사 身心이 喜悅하야 이에 陞座告衆曰 “雲門의 氣宇가 玉과 如하나 또한 佛法道理가 無하다 하시고 또 이르사대 雲門이 참 佛恩을 갚은 者라.” 하시니 雲門禪師 들으시고 曰 “나의 平生功夫가 이 浙者(法眼)에 �破함을 입었다.” 하셨으니 이 深妙한 道理는 法眼禪師와 같이 自己가 �破한 然後에사 비로소 疑心이 없는 것이요 먼저 悟徹한 사람이 說破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므로 古人이 悟後에 先師를 讚歎하야 曰 “내가 先師의 道德을 重히 여기지 아니하고 다만 先師가 나를 爲하야 說破하지 아니함을 重히 여기노니 만일 나를 爲하야 說破하셨던들 어찌 今日에 이와같이 悟徹함이 有하리요.”하셨으니 이런 말씀을 보면 禪門에 秘密한 言句는 知解商量으로 體得하지 못한 줄 確信한 것이다. 그런즉 이 意旨를 眞正하게 體得한 善知識이 或 拈, 或 頌, 或 上堂하야 提示하신 것이 古來로 限이 없지마는 其中에 曹溪下直傳正脈 十七代 本分宗師이신 大慧宗┳禪師의 上堂하신 法語를 들어 釋하야 大衆에게 供하려 한다.

師 上堂하야 이르사대 “末後一句子가 聲前에 드러나 벗은 듯 하야 天도 蓋하며 地도 蓋하며 聲도 蓋하고 色도 蓋하니 黃面老子가 이 一着子를 得하사 문득 이르사대 兜率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미 王宮에 降하며 母胎에 나지 아니하야 사람 제도함을 이미 畢했다.” 하시고 初生時에 至하야 곧 一切世界網을 震動하사 一手指天 一手指地하사 大獅子吼를 作하야 이르사대 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하시며 爲一大事因緣故로 開佛知見 示佛知見 悟佛知見 入佛知見이라 하셨으니 數千年後에 저 跛脚阿師 雲門에게 一棒으로 打殺하야 狗子를 주워 喫하게 하야 天下太平함을 圖하겠다 함을 받을 줄 아시지 못하였도다.

大衆은 且道하라. 釋迦老子가 過失이 어느 곳에 在한고. 指天指地한대 在한가. 人家의 男女에 心神을 鼓弄시킨데 在한가. 開示悟入佛知見에 在한가. 만일 이와같이 商量하면 저 釋迦老子를 誹謗할 뿐 아니라 또한 雲門大師의 法恩을 辜負함이니 이 속에 到하야 만일 雲門에 落處를 知하면 곧 自己의 落處를 知하리니 且道하라. 어느 곳에 떨어져 있는고.

良久云 “萬古碧潭空界月 再三撈�始應知一萬古에 푸른 못 空界에 달을 두세 번 건저봐야사 비로소 아나니라.”

筆者가 이에 對하야 面皮厚三寸을 自昧하고 잠깐 數語를 붙이려하노니 大慧禪師의 이 法語를 보면 佛祖의 言句를 心意識으로 體得하지 못할 줄 自覺하려니와 또 一向에 心意識으로 體得하지 못할 줄로 알고 말아도 또한 옳지 못하니 그러면 佛祖의 意旨가 果然 어느곳에 떨어져 있는고. 만일 大慧의 落處를 알면 곧 自己의 落處를 알 것이요 自己의 落處를 알면 곧 雲門의 落處를 알 것이요 雲門의 落處를 알면 곧 世尊의 落處를 알 것이니 且道하라. 畢竟에 落在甚큯處오. 摩醯首羅天王이 來也로다. 會큯아 火不能燒하고 水不能溺하고 風不能飄하고 刀不能劈이로다. 軟似兜羅堅似鐵하니 古今天下에 無人識이로다. 爲甚큯하야 無人識고. 良久云 只許老胡知요 不許老胡會니라.

1) 이통현(李通玄) : 당나라 사람으로 유교·불교의 경전에 정통하였으며 특히 719년 《신화엄경》에 대한 주석서인 《화엄론(華嚴論)》 40권을 저술하면서 3년 동안 마당에 나오지 않고, 매일 대추 10개와 잣나무잎 떡 하나를 먹었으므로 조백대사(棗栢大士)라 한다. 저서로는 《화엄회석》, 《십문현의배과석략》 등이 있다.

2) 삼아승지겁(三阿僧祇劫) : 보살이 불위(佛位)에 이르기까지 수행하는 햇수(年數). 10주·10행·10회향의 3위(位)를 수행하여 마치는 데 1아승지겁을 지내며, 10지 중의 초지로부터 제7지에 이르기까지 수행을 마치는 데 제2아승지겁을 지내며, 제8지로부터 제10지의 수행을 마치는 데 제3아승지겁을 지낸다. 아승지란 셀 수 없이 많은 무한한 시간을 가리키며, 겁(劫)도 무한한 시간을 가리킨다.

3) 말후일구자(末後一句子) : 최후의 궁극적 진리. 진리 그 자체. 한암선사(漢岩禪師)는 평소 제자들에게 송(頌)이나 계문(戒文)을 써 줄 때 으레 그 겉봉에 ‘일구자(一句子)’라는 세 글자를 쓰셨다.

4) 황면노자(黃面老子) : 석가모니 부처님을 일컫는 불가(佛家)의 숙어이다.

5) 도솔천(兜率天) : 욕계 6천의 하나. 상족(上足), 묘족(妙足), 희족(喜足), 지족(知足)이라 번역. 수미산의 꼭대기에서 12만 유순 되는 곳에 있는 천계로서 내외 2원(院)이 있는데, 외원은 천중(天衆)의 욕락처(欲樂處)이고 내원은 미륵보살의 정토라 한다.

6) 도라(兜羅) : 매우 희고 부드러운 솜.



■ 해설 ■
이것은 <禪苑>제3호(1932년 8월호)에 실린 법문으로서, 허물에는 개인적인 사소한 일과 선문적(禪門的)입장에서 특수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선문(禪門)의 특수한 입장에서 가추(家醜)를 살펴보면, 운문은 세존의 '유아독존(唯我獨尊)'에 대해서 "내가 당시에 있었더라면 몽둥이로 때려 죽여 개에게 던져 주었을 것이다......" 라고 하였고, 청허(淸虛)스님은 세존의 출세(出世)에 대해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설한 바 있는데, 이는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가추(家醜)인 듯하나 실상은 가추를 통하여 진실상을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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