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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일발록

일진화(一塵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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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7-02 13:43 조회5,921회 댓글0건

본문

일진화

■ 번역 ■

참선(參禪)이라 하는 것은 군중을 놀라게 하고 대중을 동요시키는 별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자기의 현전일념(現前一念)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그 근원을 명백하게 요달(了達)하여 다시 바깥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안으로 헐떡이는 생각이 없어, 일체 경계를 대함에 부동함은 태산 반석과 같고 청정하며 광대함은 태허공과 같아서, 모든 인연법을 따르되 막힘도 걸림도 없어, 종일 담소하되 담소하지 아니하고, 종일 거래하되 거래하지 아니하여, 상락아정(常樂我淨)1)의 무위도(無爲道)를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무진장으로 수용하는 것이니, 이것은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평등하게 본래 가지고 있는 일이니, 누군들 이 문에 들어올 자격이 없겠는가. 현우귀천(賢愚貴賤)과 노소남녀(老少男女) 따질 것 없이 모두 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다만 믿음과 원력이 없기 때문에 참구하여 들어오지 못하나니, 믿음과 원력을 발하는 사람은 한 번 뛰어 곧 여래지(如來地)2)에 들어가 대적광(大寂光)의 도량에 안신입명(安身立命)하여 삼라물물(森羅物物)이 정불국토(淨佛國土)가 아님이 없고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모두 해인삼매(海印三昧)라 어찌 그 다른 것이 있으리오. 설혹 근성이 열등하여 한 생각에 문득 초월하지 못하더라도 오래 익히면 마침내 얻어 들어가리니, 그러므로 대혜선사(大慧禪師)가 이르시되,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자연히 성돌맞듯 맷돌맞듯 한다.”하시고, 또 조주화상(趙州和尙)이 이르시되, “너희들이 30년, 20년을 여법히 참구했는데도 만일 도를 알지 못하면 노승의 머리를 베어가라.”하셨으니, 어찌 우리 중생들을 속이셨으리오.

오래 익히는 분상(分上)에 대하여는 첫째 이 몸과 마음과 세간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헛되어 하나도 실다움이 없는 줄로 간파하여야 합니다.


천만고의 영웅호걸 하나도 간 곳 없고,
부귀문장 재자가인(才子佳人) 북망산에 티끌이라.
어제의 청춘홍안 어느덧 백발일세.
아홉 구멍에는 항상 부정한 물질이 흐르고,
가죽 주머니 속에는 피ㆍ고름ㆍ똥ㆍ오줌 담겨 있네.
광음이 신속함은 달리는 말과 같고,
잠깐 있다 없어짐은 풀끝에 이슬이라.
생각생각이 위태함은 바람 속에 등불과 같아서,
오늘 비록 살아 있으나 내일을 보전하기 어려우니,
무엇을 집착하며 무엇을 애착하리오.

이렇게 분명히 생각하면, 자연히 망념이 담박해지고 도념(道念)이 증장하여 밖으로 일체 미혹한 경계가 끓는 물에 얼음 녹듯 합니다.

이렇게 망념이 공적하고 몸뚱이는 송장인데 그 가운데 앉고, 눕고, 가고, 오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일체처소(一切處所)와 십이시중(十二時中)에 소소영령(昭昭靈靈) 지각(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옷 입고 밥 먹을 때 오줌 누고 똥눌 때와 사람 대해 문답할 때, 글 읽고 사기(史記) 쓸 때,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 조금도 간단없이 성성하게 돈각(頓覺)하여 천 가지 마장과 만 가지 곤고를 당하더라도, 더욱이 분발하여 순일하게 나아가 잠 자는 것도 폐해지고 밥 먹는 것도 잊어질 때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 절묘하다.

희도 않고 검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늙도 않고 젊도 않고, 나도 않고 죽도 않으니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세존 이 아닌가. 천만 가지 생각은 화롯불에 눈 녹듯 사라지고, 큰 지혜 대광명은 곳을 따라 현전하리니 선지식을 찾아가서 요연(了然)히 인가(印可)받아 다시는 의심이 없어진 뒤에 천하를 소요하며 인연있는 중생을 제도하면 부처님 은혜와 부모님 은혜, 시주의 은혜를 한꺼번에 갚아 마치리니, 어찌 유쾌하지 아니하며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오.

아! 성인이 가신 지가 이미 오래고 세월이 변하여 무상하건만, 우리 중생이 무명(無明)의 긴 밤에 깊이 잠이 들어, 알음알이(분별심)의 풍파에 나부끼고 고동쳐서 마음 돌이킬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정법(正法)을 흙덩이같이 보고 혜명(慧命)을 계승해 지키는 사람 알기를 아이들 희롱꺼리와 같이 여기니, 대도(大道)가 폐하여 행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도다. 어찌 애달프지 아니하리오.

이러한 때에 이르러 선사(禪社)를 경성(서울) 중앙에 건립하여 영령(英靈)한 신사(信士)를 권발(勸發)하여 이 도(道)로 들어오게 함은 참으로 희유한지라. 경에 이르시되, “한 가지 깨끗한 마음이 정각(正覺)을 이루는지라 항사보탑(恒沙寶塔)을 조성하는 것보다 낫다.” 하시고, 또 영가선사(永嘉禪師)가 이르시되, “듣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 종자의 바른 인연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천(人天)의 복을 덮는다.” 하셨으니, 하물며 듣고 믿으며 배워 이루는 자야 그 공덕을 어찌 다 말하리오.

필자는 본래 저술에 능하지 못하고, 또 지식이 얕고 짧아서 스스로 어리석음을 지키며 아무런 마음 쓸 일이 없으나, 경성 안국동 40번지에서 《선원(禪苑)》이라는 작은 책자를 간행한다고 선에 대하여 직절 평범하게 해설하여 보내라는 통지서를 받음에, 자연히 감상이 떠올라 문사의 황졸함과 어조의 실격을 살피지 아니하고 약간 이런 것을 초하여 송정하나이다.

다시 한 말 있사오니, “이 법은 대승심(大乘心)을 발한 자를 위하여 설하며 최상승심(最上乘心)을 발한 이를 위하여 설한다.” 하셨습니다.

다시 한 말 있사오니, “법 가히 설할 것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설법이라.” 하셨습니다.

다시 한 말 있사오니, “금일이 신미년 4월 9일이올시다.”

오대산 상원사에서

■ 原文 ■

大抵 參禪이라는 것은 驚群動衆하는 別別異常한 일이 아니라 다못 自己의 現前一念 흘러나오는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그 根源을 明白하게 了達하야 다시 外物相에 參雜함이 되지 아니하고 안으로 헐떡이는 생각이 없어, 一切境界를 對하야 不動함은 泰山 磐石과 같고, 淸淨하고 廣大함은 太虛空과 같아서 모든 緣法을 隨順하되 막힘도 없고 걸림도 없어, 終日토록 談笑하되 談笑하지 아니하고 終日토록 去來하되 去來하지 아니하야 常樂我淨의 無爲道를 未來際가 다하도록 受用無盡하는 것이니, 이것은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사람이 平等本有의 事이니 뉘가 들어올 分이 없으리요. 賢愚貴賤과 老少男女가 다 分이 있습니다.

다못 信願이 없는 故로 參하야 들어오지 못하나니 信願을 發하는 사람은 한번 뛰어 곧 如來땅에 들어가 大寂光의 道場에 安身立命하야 森羅物物이 淨佛國土가 아님이 없고 行住坐臥가 모다 海印三昧라 어찌 그 다른 것이 있으리요. 設或 根性이 微劣하야 一念間에 頓超하지 못하더라도 오래 익히면 畢竟에 얻어 들어가니, 그러므로 大慧禪師가 이르사되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自然히 성돌맞듯 맷돌맞듯 한다” 하시고, 또 趙州和尙이 이르사되 “汝等이 三十年 二十年을 如法히 參究하야 만일 道를 알지 못하면 老僧의 머리를 베어가라” 하였으니 어찌 我等衆生을 속이셨으리요. 오래 익히는 分上에 對하야는 첫째 이 몸과 마음과 世間에 있는 모든 것이 다 虛幻하야 하나도 實이 없는 줄로 看破하여야 합니다.

千萬古英雄豪傑 하나도 간 곳 없고

富貴文章 才子佳人 北邙山에 티끌이라,

어제 같이 靑春紅顔이 어느덧 白髮일세.

아홉 구멍에는 恒常 不淨한 物이 흐르고

가죽주머니 속에는 피와 고름과 똥오줌을 담아 있다.

光陰이 迅速함은 달아나는 말과 같고

잠깐 있다 없어짐은 풀끝에 이슬과 같고,

생각생각이 위태함은 바람 속에 등불과 같아서

어제 날에는 비록 살아있으나 明日을 安保하기 어려우니

무엇을 拘執하며 무엇을 愛着하리요.

이렇게 分明히 생각하면 自然히 妄念이 淡泊해지고 道念이 增長하야 밖으로 一切迷惑한 境界가 끓는 물에 얼음 녹듯 합니다.

이렇게 妄念이 空寂하고 몸뚱이는 송장인데 그 가운데 앉고 눕고 가고 오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一切處所와 十二時中에 昭昭 靈靈 知覺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옷 입고 밥 먹을 때 오줌누고 똥눌 때와 사람 對해 問答할 때와 글 읽고 사기 쓸 때 一切時處에 조금도 間斷없이 惺惺히 頓覺하야 千가지 魔障과 萬가지 困苦를 當하더라도 더욱이 잡들어 純一하게 나아가 잠자기도 廢해지고 밥 먹기도 잊어질 때에 忽然히 깨달으면 本來 생긴 나의 부처 天眞面目 絶妙하다.

희도 않고 검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늙도 않고 젊도 않고 나도 않고 죽도 않으니 阿彌陀佛 이 아니며 釋迦世尊 이 아닌가. 千思萬想은 紅爐點雪같이 사라지고 大智光明은 곳을 따라 現前하리니 善知識을 찾아가서 了然이 印可 맞아 다시 의심없는 後에 逍遙放曠 지내가며 有緣衆生을 제도하면 佛陀恩과 父母恩 施主恩을 一時에 갚아 마치리니 어찌 快하지 아니하며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요.

嗚呼라 聖人이 가신 지가 이미 오래고 劫火가 자조자조 變遷하야 我等衆生이 無明長夜에 잠을 깊이 들고 識境風波에 나부껴 鼓動하야 마음 돌이킬 줄을 알지 못하는 故로 正法 보기를 土塊와 같이 보고 慧命을 續持하는 者를 알기를 아이들 희롱지거리와 같이 알아 大道가 廢하야 行치 못할 境遇에 이르렀으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요.

이러한 때를 當하야 禪社를 京城 中央에 建立하야 英靈한 信士를 勸發하야 이 道로 들어오게 함은 참 希有한지라, 經에 이르사되 “한 가지 깨끗한 마음이 正覺을 이루는지라, 恒沙寶塔을 造成하는 것보다 勝하다.”하시고, 또 永嘉禪師 이르사되 “듣고 信치 않더라도 佛種에 正因을 맺고 배워 이루지 못하여도 人天에 福을 덮는다.”하셨으니 하물며 듣고 信하며 배워 이루는 者야 그 功德을 어찌 다 말하리요.

筆者는 本來 著述에 能치 못하고 또 知識이 淺短하야 스스로 愚魯를 지키며 아무 마음쓸 것이 없아오나, 京城 安國洞 四十番地에서 《禪苑》이란 小誌를 刊行한다고 禪에 對하여 直截平凡하게 解說하야 보내라는 通知書가 來付함을 받으매, 自然히 感想이 發하야 文辭의 荒拙과 語調의 失格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若干 이까짓 것을 草하야 送呈하나이다.

다시 한 말 있아오니 “이 法은 大乘心 發한 者를 爲하야 說하며 最上乘心 發한 者를 爲하야 說한다.”하셨습니다. 다시 한 말 있아오니 “法 可히 說할 것 없는 것이 이름이 說法이라.”하셨습니다. 다시 한 말 있아오니 “今日이 辛未年 四月 九日이 올시다.”

                                                                                                                五臺山 上院寺에서




1) 상락아정(常樂我淨) : 열반의 4덕(德)
① 상(常) : 열반의 경지는 생멸변천함이 없는 덕.
② 락(樂) :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無爲) 안락한 덕.
③ 아(我) : 망집(妄執)의 아(我)를 여의고 팔대자재(八大自在)가 있는 진아(眞我)의 덕.
④ 정(淨) : 번뇌의 더러움을 여의어 담연청정(湛然淸淨)한 덕.

2) 여래지(如來地) : 여래(如來)란 범어 다타아가타(多陀阿伽陀)의 번역으로 ‘여실히 온 자’, ‘진실 그대로인 자〔眞如〕’라는 뜻이다. 어디로부터 오는 곳도 없고 어디로 가는 곳도 없다는 의미에서 진리〔如〕에 따라서 왔고, 진여(眞如)에서 현출(現出)한 이, 곧 불타(佛陀)를 말하며 이러한 불타의 경지룰 여래지라 한다.





■ 해설 ■
이 글은 선의 진면목을 면밀하게 설파한 법문으로, 선(禪) 전문 잡지인 <선원(선원)>창간호(1931년 10월호)에 실려 있다. 요지는 대신심(大信心)을 발원하여 색계(色界)의 무상함을 자각하고, 나아가 망념을 일으키지 않고서 성성돈각(性性頓覺)에 이르면 그것이 곧 부처의 천진면목(天眞面目)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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