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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일발록

선문답 21조_제10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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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12-09 17:00 조회6,557회 댓글0건

본문

■ 번역 ■
제10문 : 간화(看話)와 반조(返照)는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오늘날 참선인들을 보면 항상 서로 논쟁하니, 바라건대 자상히 논변하여 밝혀 주소서.

제10답 :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앞에서 질문한 것들은 곡조가 같은 곡조여서 들을 만했는데, 이번 질문은 또 다른 별조(別調)로구나. 하지만 나의 한 마디 말을 들어보아라.

큰 코끼리가 강을 건넘에 물의 흐름을 밟아 끊나니
토끼와 말이 밑바닥까지 닿지 못함을 탓하지 말라.
알겠는가. 만일 알지 못했다면, 나는 오늘 그대에게 자세히 말해주리라.

옛날에 앙산스님이 위산20)스님에게 물었다.
“어떠한 것이 참 부처의 주처(住處)입니까?”

위산이 말하였다.

“생각〔思〕하되 생각함이 없는〔無思〕 묘한 이치로써 돌이켜 신령스러운 불꽃〔靈焰〕의 무궁함을 생각〔返思〕하라. 생각이 다하여 근원(根源)으로 돌아가면 성상(性相)이 상주(常住)하여 일〔事〕과 이치〔理〕가 둘이 아니요, 진불(眞佛)이 여여하리라.”

앙산이 이 말에 곧바로 대오(大悟)하였다. 그 후 심문분(心聞賁)21)선사가 이 화두를 들어서 말씀하셨다.

“‘생각〔思〕하되 생각함이 없는〔無思〕 묘한 이치로써 돌이켜 신령스러운 불꽃〔靈焰〕의 무궁함을 생각〔返思〕하라. 생각이 다하면 근원(根源)으로 돌아간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깨닫는다면 다시 무슨 정결(淨潔, 청결한 척 하는 선병)한 병에 걸릴 까닭이 있겠는가. 이렇게 해서 세속의 역순 경계에 들어가서, 물리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면, 그런 경지에 있는 사람을 뉘라서 성나게 하고 기쁘게 할 수 있으리오. 그러한 이후에 밝음과 어둠 두 가지를 철저하게 타파하여,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곳에서, ‘대비원(大悲院)에 재(齋)가 있다(大悲院裏有齋)’22)는 화두를 간파하여야 비로소 그 까닭을 알 수 있으며, 바야흐로 낙처(落處)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때가 되면 일척안(一隻眼, 혜안)으로 산하대지를 조파(照破)하는 것이 마치 하늘에 장검을 빗겨든 것 같으리니, 어느 누가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대에게 이와 같은 힘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능히 성인의 대열에 들어가서, 인행(因行)을 부지런히 닦아 자비와 지혜의 원력(願力)을 성취하게 되며,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이로운 법문도 오직 이 길을 따라 나아갈 뿐이요 별다른 도리(道理)가 없는 것이다.”

‘돌이켜서 신령스런 불꽃〔靈焰〕의 무궁함을 생각한다’는 것이 반조(返照)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대비원(大悲院)에 재(齋)가 있다는 공안을 참구하는 것’이 화두(話頭)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앙산은 ‘돌이켜서 신령스런 불꽃〔靈焰〕의 무궁함을 돌이켜 생각한다’는 말에서 이미 대오(大悟)하였는데, 심문분(心聞賁)선사는 무엇 때문에 다시 화두를 참구하도록 하였을까?

깨달음을 얻은 자가 모두 앙산과 같다면 다시 말할 것이 없으려니와, 만일 앙산의 깨달은 바에 미치지 못한다면 지견(知見, 분별심)이 없어지지 않아서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할 것이다. 생사의 마음을 타파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대오(大悟)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는 심문분(心聞賁)선사가 특히 반조 중에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이처럼 말한 것이다.

또한 고봉(高峰)23)은,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화두를 들다가 ‘죽은 시체를 끌고 다닌다’는 언구(言句)를 타파하여, 대지가 잠기고 물아(物我)를 모두 잊어서 분명한(把得定) 견처(見處)가 있었지만, 설암화상의 ‘잠잘 때에 꿈도 없고 생각이 없는 곳에서는 주인공이 어느 곳에 있는가’라는 물음을 받았을 때, 곧바로 대답할 말이 없고 말할 수 있는 이치가 없었다. 설암화상이 다시 나(고봉)에게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이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을 하는가’를 참구하도록 하였는데, 결국은 함께 잠자는 도반이 목침을 떨어뜨리는 소리를 듣고서, 그물 속에서 뛰쳐나온 듯이 툭 트이어 한 생각에 작위가 없어 천하가 태평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옛 그 사람이오, 옛날의 행리(行履)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일귀하처(一歸何處)’가 화두(話頭)를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을 보라’는 것이 반조(返照)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고봉은 이미 ‘일귀하처’에서 분명한 견처가 있었거늘(把得定, 作得主) 설암화상은 무엇 때문에 힐책하여 다시 ‘일각주인공(一覺主人公)’을 참구하라고 한 것일까?

이는 특별히 화두를 참구하는 가운데 철저하지 못한 자를 위하여 이와 같이 가르쳐준 것이니, 과연 무엇이 우수하고 무엇이 열등하며, 무엇이 원만하고 무엇이 편벽하다는 차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깨달음이 철저하고 철저하지 못함이 당사자의 진실과 허위, 구경처(究竟處)를 얻었느냐와 못 얻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방편의 우열(優劣)과 심천(深淺)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삼가 불조(佛祖)의 정법(正法) 위에서 어지럽게 이견(二見, 返照와 看話)을 내어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종고24)선사가 영시랑(榮侍郞)에게 보내는 답서에 이르기를, “다만 일상생활의 반연하는 곳에서 무시로 살피되, 내가 타인과 더불어 명쾌히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끊어버린 것은 누구의 은혜를 입은 것이며, 필경 어느 곳에서 나왔는가를 살피고 살핀다면, 평소에 생소한 곳〔生處, 화두〕은 저절로 익숙한 곳〔熟處〕이 되리니, 생소한 곳〔生處〕이 이미 익숙하게 되면, 익숙한 곳〔熟處〕은 도리어 생소한 곳〔生處〕이 될 것이다. 어느 곳이 익숙한 곳〔熟處〕인가? 5음(五陰)·6입(六入)·12처(十二處)·18계(十八界)·25유(二十五有) 등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사량계교(思量計較)하는 심식(心識)이 밤낮으로 아지랑이처럼 번뜩여서 잠시도 쉼이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한 줄기 번뇌〔一絡索〕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사에 유랑케 하며 모든 고통을 만들어 내나니, 이 한 줄기 번뇌가 이미 생소하게 되면 보리열반과 진여불성이 문득 현전(現前)하게 될 것이다. 현전(現前)할 때에 이르러서는 또한 현전했다는 생각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스님이 깨달음을 얻고서 말하기를, ‘눈으로 볼 때에는 일천 개의 태양이 비춤과 같아서, 만상이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고, 귀로 들을 때에는 깊은 골짜기와 같아서 크고 작은 소리가 족히 응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일들은 다른 데에서 찾을 필요도 없고 타인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자연히 반연하는 곳에서 활발발하게 될 것이다. 아직 이와 같음을 얻지 못했다면, 또한 세간의 속된 일을 사량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돌이켜 사량해 보아라. 어떤 것이 사량이 미치지 못한 곳인가.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스님이 ‘없다〔無〕.’고 말씀하셨으니, 이 하나의 글자(無字)에 어떠한 기량(伎倆)이 있는 것일까? 청컨대 안배(安排)하여 헤아려 보도록 하라. 계교안배를 할 곳이 없을 것이다. 다만 뱃속이 답답하고 마음속에서 번뇌가 일어남을 알아차릴 때가 바로 좋은 때이니, 그때엔 제8식(第八識)25)이 즉시 활동을 못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음을 알 때에는 방치해 버리지 말고 오로지 ‘무자(無字)’만을 참구해야 한다. 무자화두를 참구하고 참구하면 생처(生處)는 저절로 숙처(熟處)가 되고 숙처(熟處)는 저절로 생처(生處)가 될 것이다.”고 하였으니, 대저 일상 생활 속에서 살피고 살피는 것이 반조가 아니겠는가. 사량진로(思量塵勞)의 마음을 가지고서 ‘무자상(無字上)’으로 돌아가서 참구하고 참구하는 것이 화두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종고선사 또한 사람들에게 반조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겸하여 화두드는 것으로써 대략(大略)을 보여주었으니, 다만 그 방법과 대략(大略)만을 가르쳐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분명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보리열반과 진묘여불성(眞妙如佛性)이 문득 현전(現前)하면 생처(生處)는 저절로 숙처(熟處)가 되고 숙처(熟處)는 저절로 생처(生處)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화두를 드는 것과 반조, 이 두 가지는 공부상(功夫上)에서 그 효험을 얻음이 어찌 깊고 얕음이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와 같이 가르쳐준 기연을 하나하나 낱낱이 들어 말할 수는 없으나, 모두 반조와 간화(看話)에 대하여 차별상을 두지 않았거늘, 오늘날의 학인들은 서로가 공격하여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 이처럼 배워 왔는가.

어떤 사람은 본분화두에 따라서 여법(如法)히 참구하다가 조금 쉬워진 곳이 있으면 곧 만족하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또 조금 이치로 탐구해 본 자는 곧 이(간화)를 쓸어버려서 자취를 없애고자 하니, 이는 불조(佛祖)의 가르침 가운데 무한한 방편이 모두 의리(義理, 교학)에서 나와 진흙에 들어가고 물에 들어가 사람들을 위하여 대단히 애쓴 대방편인 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냉담무위(冷淡無爲)의 깊은 구덩이 속에 빠져 꼼짝도 하지 않는 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조의 법문으로써 여실히 참구하다가 조금이라도 얻은 것이 있으면, 스스로 다 얻었다고 생각하여 다시는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고, 기이한 생각〔奇特想〕을 가져서 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도리를 말하고 지견을 드러내니, 이는 납승가(納僧家)의 본분정령(本分正令)이, 부처도 삶고〔烹佛〕 조사도 삶으며〔烹祖〕, 뼈에 사무치고 골수에 사무쳐, 철저하게 명근(命根)을 모조리 끊어버리는 참 수단인 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그 사람은 문호(門戶)의 빛과 그림자를 잘못 알아서 구경(究竟)의 안락처로 삼은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방치해 버린다면, 우리 부처님의 바른 종지가 거의 땅에 떨어질 것이니 애통하고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침에, 그대가 물은 바는 때에 맞게 힘써야 할 일을 바로 알고서 물은 것이라 하겠다. 내 비록 얇은 지식으로 공부한 게 없으나 어찌 한마디 말로 분명한 것을 가려서 말류(末流)의 폐단과 고질병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때문에 나도 모르게 이와 같이 말했노라.

그러나 옛 사람이 말하기를, “학인은 다만 활구(活句)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말지니, 사구(死句)는 이로(理路)와 어로(語路)와 들어서 알고〔聞解〕 사상(思想, 생각)이 있기 때문이며, 활구(活句)는 이로(理路)와 어로(語路)와 재미가 없고 모색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셨으니, 참선을 하는 사람이 반조와 간화를 막론하고 여실히 참구하는 자라면, 마치 한덩이의 불과 같아서 가까이 하면 얼굴을 태우게 됨과 같나니라. 도무지 불법의 지해(知解)를 붙일 곳이 없으리니 어느 겨를에 화두니, 반조니, 같으니, 다르니 하는 허다한 것들을 논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한 생각이 앞에 나타나 투철하게 관조하여 남음이 없으면, 백천법문과 무량한 묘의(妙義)을 구하지 않고서도 원만하게 얻어서 여실히 보고 여실히 행하며 여실하게 써서 출생입사(出生入死)에 대자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깊은 바램은 여기에 있다.



■ 原文 ■
第十問 : 看話與返照가 有何差異乎잇가 每見今之學者 互相諍論하오니 幸垂詳細辦明하소서

第十答 : 余笑云, 上來所問은 依�似曲�勘聽이어니와 此之問意는 又被風吹別調中이로다 雖然如是나 聽吾一言하라 香象이 渡河에 能截流하나니 莫關兎馬未窮底로다 會큯아 若未會댄 吾今日與公으로 仔細說호리라 昔에 仰山이 問펨山호대 如何是眞佛住處잇고 펨山云하사대 以思無思之妙로 返思靈焰之無窮하라 思盡還源하면 性相이 常住하야 事理不二오 眞佛이 如如니라 仰山이 於言下에 大悟하시다 後來에 心聞賁이 擧此話云하사대 以思無思之妙로 返思靈焰之無窮하야 思盡還源이라 하시니 這裏에 脫得去하면 更有什큯淨潔病이리요 恁큯入�塵逆順하면 敎誰로 嗔喜染着이리요 然後에 打徹明暗兩頭하고 向不明不暗處하야 看大悲院裏有齋話하야사 方知來由며 方知落着하리니 恁時에 一隻眼으로 照破山下大地호대 如倚天長劒할새 誰敢當頭 着고 爾有如是筋骨이라사 方能向列聖叢中入作하야 因行掉臂하야 成就悲智願力하며 己他兼利法門도 亦只從遮一條路去오 別無道理라하니라 返思靈焰之無窮이 非返照乎아 看大悲院裏有齋話가 非話頭乎아 仰山이 於返思靈焰之言下에 旣大悟어늘 心聞賁이 何故로 更敎看話頭耶아 發悟人이 皆如仰山則已어니와 若未及於仰山所證處則知見이 未忘하야 生死心不破矣니 生死心이 不破則何言大悟리오 此賁禪師가 特爲返照中未徹者하야 言之也요 又高峰이 擧萬法歸一 一歸何處하다가 觸破打死屍句子하사 大地平沈하고 物我俱忘하야 把得定, 作得主어늘 而被雪岩和尙의 問正睡着時에 無夢無想쫛(무슨 字인지 알 수 없음) 主在甚處오하야 直得無言可對하며 無理可伸하야 更敎看我者一覺主人公이 在甚處하야 安身立命고하야 畢竟於同宿道友가 推枕作聲之下에 如網羅中跳出하야 一念無爲하야 天下太平이라 依前只是舊時人이오 不改舊時行履處라하시니 一歸何處가 非話頭乎아 看一覺主人公이 非返照乎아 高峰이 旣於一歸何處上에 把得定, 作得主어늘 而雪岩이 因甚詰問而更敎看一覺主人公乎아 此는 特爲看話中未徹者하야 敎之也라 果何優何劣이며 何圓何偏之差異乎아 是知悟之徹不徹이 在於人之眞實與虛僞와 究竟與不究竟이요 不在於方便之優劣淺深也라 愼莫於佛祖正法上難生二見하야 自作障難焉이어다 且┳禪師가 答榮侍郞書云하사대 但向日用應緣處하야 捕호대 我自能與人으로 快斷是非曲直底는 承誰恩力고 畢竟에 從甚큯處流出고 �捕來, �捕去하면 平昔에 生處路頭는 自熟하리니 生處旣熟則熟處却生矣리라 那箇是熟處오 五陰, 六入, 十二處, 十八界, 二十五有가 無明業識으로 思量計較하며 心識이 晝夜焰焰호대 如野馬하야 無暫停底가 是라 遮一絡索이 使得人으로 流浪生死하며 做不好事하니 遮一絡索이 旣生則菩提涅槃과 眞如佛性이 便現前矣리라 當現前時하야 亦無現前之量이니 故로 古德이 契證得了코 便解道하사대 應眼時에 若千日하야 萬象이 不能逃影質이오 應耳時에 若幽谷하야 大小音聲이 無不足이니라 如此等事는 不假他求요 不借他力이라 自然向應緣處하야 活潑潑地니 未得如此댄 且將這思量世間塵勞心을 回在思量不及處하야 試思量看호대 那箇是思量不及處오 僧이 問趙州호대 狗子還有佛性也無잇가 州云無라하시니 只這一字는 �爾有什큯計伎倆고 請安排計較看하라 計較安排를 無處可以頓放이오 只覺得 服裏悶하고 心頭煩惱時가 正是好底時節이니 第八識이 相次不行矣리라 覺得如此時에 莫要放却하고 只就這無字上提옜하야 提옜來, 提옜去하면 生處自熟하고 熟處自生矣라 하니 大抵向日用應緣處하야 �捕來, �捕去가 非返照乎아 將思量塵勞底心하야 回在無字上하야 提옜來, 提옜去가 非話頭乎아 然則┳禪師도 亦敎人以返照法式而兼示以擧話大略하나니 非特敎示其法式大略而已라 明明道하사대 菩提涅槃眞妙如佛性이 便現前하면 生處自熟하고 熟處自生이라하니 推此觀之則看話與返照兩箇做工上에 得其效力이 有何淺深也耶아 古人之如斯敎示機緣을 不可一一校擧而皆以返照與看話로 不存差別想이어늘 今之學者가 互相攻擊하야 以爲杜撰者는 從甚큯處學得來오 或依本分話頭하야 如法參究하다가 小有休歇處則便以爲足而更不進步하고 �見涉理路者는 卽欲掃除하야 使滅�跡하나니 殊不知佛祖化門中에 無限機權이 全從義理中出來하야 入泥入水하야 爲人徹困底大方便이니 此人은 滯在冷淡無爲深坑中하야 動彈不得者也니라 或以返照法門으로 如實看實究하다가 小有凝閒意味則自以爲得而更不細審하고 便作奇特想하야 逢人에 輒說道理呈知見하나니 殊不知衲僧家本分正令이 烹佛烹祖하며 徹骨徹髓하야 七穿八穴하야 斷盡命根底活手段이니 此人은 認門頭戶口光影하야 爲究竟安樂處也니라 若如是乃已(爾)則吾佛正宗이 幾墜地矣리니 可不痛惜哉아 言念及此에 公之所問이 正識時務而發起也라 余雖淺識蔑學이나 豈可無一言辦明하야 以救其末流之弊痼也哉아 故로 不覺打葛藤如此하노라 然이나 古人이 云하사대 學者가 但參活句언정 莫參死句니 死句者는 有理路語路聞解思想故也오 活句者는 無理路語路沒滋味摸 故也라하니 學道人이 莫論返照與看話하고 如實參究者댄 如一團火相似하야 近之則燒却面門이라 都無佛法知解措着之處어니 何暇에 論及於話頭也, 返照也, 同別也, 許多之乎者也아 但現前一念하야 照徹無餘則百千法門과 無量妙義를 不求而圓得하야 如實而見하며 如實而行하며 如實而用하야 出生入死에 得大自在矣리라 深願은 在玆焉이니라

〔※아래의 열 가지 질문(11문~20문)은 나옹조사가 제시한 공부 십절목(工夫十節目)을 인용하여 질문함.〕

※此下十問은 懶翁祖師垂問을 仍用함.

제11문 : 온 세상 사람들은 색을 보고 색을 초월하지 못하고 소리를 듣고 소리를 초월하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소리〔聲〕와 색(色)을 초월할 수 있습니까?

〔※아래의 열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나옹조사가 제시한 공부의 열 가지 절목(節目)에 대하여 물은 것이기 때문에 착어(着語)만 붙인다.〕

※ 此下十問은 懶翁祖師 垂問工夫十節目故로 但着語而已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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