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
목조문수동자좌상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은 나무로 조성된 불상이며,
보관이 없는 머리는 양쪽으로 묶어 올리고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내려
이마를 가렸으며 얼굴은 양 볼을 도톰하게 하여 천진해 보인다.
이목구비는 온화하고 적당히 가는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인다.
가슴에는 영락이 달린 목걸이를 걸치고 오른편 가슴 쪽으로 치우쳐 드러난 통견의 천의를 걸치고 가슴 밑으로 띠를 매었는데 옷주름이 명확하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을 내려서 엄지와 약지를 맞댈 듯한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을 하고 있으며, 왼쪽 다리는 안으로 접고 오른쪽 다리는 밖으로 둔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이 불상은, 조각 수법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1984년 7월 문수동자상에서 조성발원문 등 23점의 복장(腹藏)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이 불상이 조선 세조 12년(1466)에 조성된 것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불상에서 조선 전기 불상으로 전개되는 불상조성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또 발원문과 함께 나온 조선시대 초기의 의상과 다수의 불경은 조선 복식사 및 불교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조선 세조 대왕이 직접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크기는 98㎝이며, 국보 221호.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는 단종의 어머니이며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치는 등 패륜을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렸다. 전신에 종기가 돋고 고름이 나는 등 잘 낫지도 않고 견디기가 무척 힘든 병이었다.
세조는 명의와 명약으로도 효험을 보지 못하자 오대산으로 발길을 돌려 부처님께 참회기도를 올려 낫기를 발원하였다. 세조가 상원사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오대천의 맑은 물이 너무 좋아 혼자 몸을 담가 목욕하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한 동승(童僧)에게 등을 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동승이 등을 밀자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동승에게 "그대는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니 동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은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세조가 놀라 주위를 살피니 동승은 간 곳 없고 어느새 자기 몸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을 알았다. 이렇듯 문수보살의 가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그리고, 목각상을 조각하게 하니 이 목각상이 바로 상원사의 문수동자상이다.
지금은 문수동자의 화상은 없어졌으나 목각상은 상원사 법당에 모셔져 있다. 세조가 당시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려고 많은 화공을 불렸으나 잘 그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 보겠다고 했다. 세조가 이러저러한 모습을 설명해 주자 노스님은 자신이 알아 그리겠다고 설명도 듣지 않았다.
이윽고 그려온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도 똑같아 세조는 놀라고 기쁜 마음에 "스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하자 노스님은 "나는 영산회상에서 왔습니다." 하고는 곧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결국, 세조는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한 것이다.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상에서 발견된 23점의 복장유물은 불상에도 사리를 보장하고 복장을 만들어 넣는 매우 드문 예를 보여주고 있다. 유물로는 의숙공주발원문, 문수상등중수발원문, 백지묵서진언집(白紙墨書眞言集) 두루마리 대방광불 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대방강원 각수다라요의경 , 육경합부, 명주적삼, 생명주적삼, 금동제 사리함, 사리, 수정구슬, 백색수정 사리병, 세조의 어의御衣를 싼 노랑색 명주 보자기 등이 있으며 전시는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