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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종 원찰 봉선사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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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3-05-29 22:26 조회8,3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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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종 원찰   봉선사 ]

위치- 경기도 광릉수목원내

                                                                                    후세백작 2010.05.1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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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봉선사가 명종 6년에(1551년) 교종 갑찰로 되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역사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2년

만에 죽자 중종계비 문정왕후 소생의 명종이 어린 12살에 왕에 오르며 문정왕후가 명종 나이 스무살 될때까

지 섭정에 들어간다.

일전 드라마에 정난정과 문정왕후의 스토리가 재밋게 다루어지며 좀 미화되었는데 드라마 작가들은 시대의

본질을 엿가락처럼 주물러서야,,,,아마 단군이래 최대의 악녀는 이 문정왕후일것이다.

 

중국의 측천무후나 누구와 견줄수 있는 악녀로서  대윤파를 밀어내는 모함의 을사사화를 일으켰고

이야기가 이상해 지는데 중략하고 이 블로그에 여인천하란 글에 그가 악녀란 점이 드러나 있다.

이러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보우선사를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고 봉은사는 선종수찰(禪宗首刹)로,

봉선사(奉先寺)는 교종갑찰(敎宗甲刹)로 하는 승과(僧科)를 부활하여 불교 재흥정책을 폈다.

 

이 승과에 급제한 스님들로는 서산대사, 사명당등이 걸출한 스님들이,,, 문정왕후의 불교정책은 그의 또다른

면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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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스님들 선방,,

 

 마치 중국 무협의,,,, 칼 잡이 스님이 지붕위를 날아올것같은...

지난번 월정사 탐방에선 가람배치는 논하지 않고 탑의 문화양식만 논 하였는데 그는 월정사 중창의 가람배치는 서울의

 골목느낌같고 양식을 논할수 조차 없게 만들엇기 때문이나  이 봉선사의 가람구조는 지리적 산세에 적절하게 편리하며

건축물들 사이의 시각적 느낌도 시원하게 건축되어 있다.

 

내가 알기에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이 되고 모두들 즐거워하는 마당에 일제 부역의 춘원 이광수는 스스로의 고뇌보단

괴리에 빠져서 서울에 가족을 놔두고 당시 주지스님이 친구라 이 선방 어디엔가 거처하였다는 역사도...

 

 

 

 

 좀 안된 이야기이지만,,,

교회는 매주 헌금 받지만 절에선 일년에 한번 돈을 받는날이다.

그것으로 일년살이 모든 경비가 충당되는 것인데...

봉축등 하나에 평균 십만원이라 가정하면 석가 탄신일 하루에  얼마나 벌까?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메고 탑돌이가 전국 사찰중 제일 많은 액수일까?

아니면 삼성동 봉은사엔 산위쪽의 뒤켠의 모든 길들의 양옆에 4-5단 줄을 엮어 등을 달아 오솔길 양옆의 담장을 한듯한,,

어느 사찰이 젤 부자인지 자못 궁금하다.

 

 

 

   

 

 

대웅전이란 현판이 한글로 큰 법당, 그리고 기둥의 모든 주련들이 한글로 되어 이해가 쉬웠다.

사실 어는 절을 가나 보통의 시민들이 그를 다 읽어 내려가고 그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 것이다.

불교의 권위적이랄까?? 또는 장식적 매너리즘의 시각적 느낌밖엔...

그 보단 우리 한글로 쓰고 우리가 이해하고 배움이 더 조치 않을련가 한다.

 

 

 

 

 이 봉선사의 모든 축조물이라든가 눈에 보이는 모든것중 탑은 조선 말기에 시줏돈으로 만들어지고

그보다 더한 역사는 아마 이 노목인듯하다.

 역사의 세월을 잘 표시한 고목으로 보인다.

 

 

 

 

 

 

 

 이 종은 그 각선미가 상원사 동종의 각선미를 따르지 않은듯 하다.

그리고 또한 문양의 양식면도 통일신라의 기법과는 상이하다.

종산단의 아취형에 비해 그 위의 용뉴등 균형미가 시각적으로 작은듯 하다.

 

그러나 나는 어느 사찰에 가든 모든 것은 눈으로 잘 보았으나 종은 그 소리가 맛이라

 종앞에만 가면 그를 한번크게치고 귀로 감상하고픈 충동을 일으킨다.

그것이 보통사람들의 정상적 생각일까??

 각 사찰은 관람객에게 그 종소리를  들을수 있는 방법은 모색함도...

 

 

  

 

 

 

 

 글쎄요,,, 당간지주가 이 설명으로만 충족될수 있슬까요??

우선 위의 설명중 제작 기밥이 뛰어나지는 않다고 생각하며 이 당간지주 받침석은

니 싸이즈로 돌 하나를 파내어 "ㄷ" 자형으로 바닥면도 있는게 특징이다.

 

당간지주는 기를 걸어 외부에 알리는 것을 했다는데...

산 속에서 외부에 알리는 표현의 양식을 표출하더라도, 그럼 지금까지 당간지주는

에 50개쯤, 그럼 이 사찰들이 고유의 문장의 깃발을 사용했슬까??

우리는 다른 역사에 비해서 불교에 관한 기록들은 좀 있어서 신라시대의 불교 역사까

지도  너무나 잘 알고있다.

 

그런데 왜 당간지주의 게시 기록도, 또한 용도와 제반사항들을 역사속에 단 한줄도 기

록을 찾을수 없다. 이 당간지주는 지름 40쎈티의 나무를 세울수 있다. 그럼 그 높이가

20m이상 될수있다면 그위에 다시 나무를 올려세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휘장은 얼마나 클까?? 대나무로 장대를 만듬이 빠르지 않을까??

당간지주가 최고로 큰 것은 강릉 시내에 있는데 높이가 무려 5m 이고 당간석 사이가

1m는 상회할 것이다.

이는 아름드리 통나무를 세우고 깃발을 드리웠슬까??

 

아니면 공주 갑사의 현존하는 철 당간지주처럼 마치 연통을 연속적으로 잇고 높이 올

렸슬까?? 그럼 강릉의 지름 1m 정도의 당간지주에 사람이 올라가 깃발을 드리웠슬까??

아니면 현재 우리가 보는 국기 게양대식 노끈 도르래를 달았슬까?? 그럴랴면 지금의

게양대 파이프처럼 지름이 1-20cm도 충분할텐데.

 

또한 한국전 이후 경상도에서 보았다던 당간지주 머리용도의 용머리 70cm짜리는 아마

고물상으로 가서 녹은듯에서 이제는 찾을수 없으나 그 용머리는 무엇을 말함인가??

 

스님들은 아함경이나 금강경 화엄경하며 2천년 된 책들은 외우기 바쁘나 사찰의 문화사

적 기록은 단 한줄도 등한시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록성을 사대부나 양반

이 할일이 아니라고 점잖은 생각들은 하였던 모양이다.

 

분명 당간은 철재 연속으로 올려졌슬 것인데 대동아 전쟁에 일본이 전시물자 철로 녹여

없앤것도 틀림은 없슬텐데 그에 기록도 전국에  그 많은 사찰에서 한번도 그런 기록은

나오지 않고 있다.

 

 

 석등은  계단 앞에서 양쪽으로 2기가 설치되어 있다.

위의 봉은사 석등은 위의 본당앞에는 3층 탑만 있고,

한층 아래에 석등이 있지만  이것은  누가 뭐래도

본당의 세존불에대한 석등 공양의 표시이다.

 

 등기구는 계단의 오르내림에 조명시설적 의미를 부여 할수도 있으랴만은

 불가에서 석등은 부처님에게 등 공양이다 ,

  

 나의 글 월정사 중창에서.....

 연화경에 어는  "부자가 수 백개의 등 공양을 하는것보다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모두 하나씩 하여야 바람직하다"그래서 석등은 하나씩 하던 전통이 깨져 버리고...

 

 

 

 

 

연등행사때 밤하늘 아래에 물위로 비취는 연등의 불꽃은 볼만한 그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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