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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천고의 학! 한암의 사상 ③ (불교저널) 2014.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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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12-05 12:43 조회6,8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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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천고의 학! 한암의 사상 ③
선사지만 삼학 균수…율사적 이미지 강해
이덕진 기자 01081101@hanmail.net
한암은 분명하게 간화선사이다. 그런데 율행이 보다 뚜렷하게 각인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대중들은 당시 고승 중에서 네 스님을 생불이라고 불렀다. 경허(1849~1912), 용성(1864~1940), 만공(1871~1946), 그리고 한암(1876~1951)이 그렇다. 이 네 선사 중에서, 특히 경허와 한암, 한암과 만공이 비교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것은 우선, 경허와 한암의 삶이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으로 한암과 만공 두 스님 모두 경허의 법제자인데, 이후 삶의 궤적에서도 많은 부분에서 서로 비교되기 때문일 것이다.
 
삼각형의 꼭지점에는 경허가 있다. 그리고 그 양변에 만공과 한암이 있다. 그리고 경허의 법을 잇기는 했지만, 만공과 한암은 다르다. 만공은 경허와 많이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한암은 경허와 많이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대중은 은연 중 계율이 그 차이점을 알아차리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경허는 법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단절된 한국불교 간화선의 법맥을 이었다는 것만을 가지고도, 기라성 같은 한국 근․현대 선사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빛나는 인물이다. 그러나 행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의 음주와 음행을 마다 않은 역행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도덕적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결국 계율의 문제와 만난다. 경허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깨친 자의 음행은 흔적이 없으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고, 경허는 무심도인(無心道人)의 경지에 이른 선사이기 때문에 그에게 계율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경허를 비난하는 측에서는 깨침 속에는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선정과 지혜가 나타난다. 따라서 경허가 깨달았다면 선정력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수행을 마쳤다고 하는 무심도인이 망념에서 비롯된 음행을 자행하는가? 하고 비판한다.
 
한암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선사 경허화상 행장>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일관되고도 진솔하게 스승의 법화(法化)를 옹호하고, 행리(行履)를 변호한다.
 
한암에 의하면, 경허의 법화나 안목을 배우는 것은 가당하나, 법을 간택하는 눈을 갖추지 못하고 단지 그의 행적의 걸림 없는 겉모습만을 따르고 믿는 것은 옳지 못하다.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묘법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지 사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고 함은 그 사람의 행동이 어떠하던지 간에 그 행동을 자기 행위의 모범으로 삼지 않고 법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즉 한암은 경허의 법화나 사상이 중요하지, 기행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중들이 계행을 무시하면서 무애행이라는 미명 아래 경허의 행위를 답습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완곡하기는 하지만 후대의 학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주는’, ‘경책의 성격을 가진 주의’가 들어 있다는 점 또한 한암의 성향과 관련하여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한암은 자기 삶의 전개과정에서 스승의 법화와 행리, 이 둘 사이의 연속성을 읽어내려 하거나 연결시키고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는 하나를 접는 방식으로 스승 경허를 수용한다. 스승에 대한 간절한 사모의 정이 행리를 두고 부당하다고 할 수는 없게 하였지만, 사표가 되기에는 부적당하다고 판단한다.
 
1903년(28세) 경허는 만행을 떠나면서 한암에게 전별사를 준다. 거기에 한암선사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보인다. “성행이 질직하며, 학문이 고명했다〔性行質直, 學問高明〕.”라는 구절이다. 아마도 경허는 자신에게 모자란다고 생각되는 부분, 즉 품행이 방정하고 곧은 수행자의 모습을 한암에게서 발견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한암의 품성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이 구절은, 이후 한암의 삶의 궤적을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한암의 이러한 성품은 계행과 교학을 중시하는 태도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한암은 1912년(37세) 맹산 우두암에서 확철대오한 이후, 1921년(46세) 건봉사 조실로 추대되었고, 1923년(48세) 봉은사 조실로 추대된다. 그런데 1925년(50세) 가을, “내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긴 채 서울 봉은사 조실을 그만 두고, 오대산 상원사로 이거한다. 이후 한암은 1951년 입적할 때 까지 오대산 산문 밖을 나오지 않는다.
 
한암은 간화선사이지만 선우월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일제 암흑기 조선불교계의 원칙과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한암의 의지와 노력은 남달랐다. 한암은 <선원규례>, <승가오칙>, <선문답 21조>, <화두 드는 법> 등을 작성하고, 이 모든 것을 ‘계잠’의 형태로 만들어 자신을 단속하고 대중을 경책했다. 그는 스스로 원칙과 기준 속에서 살고자 했고, 대중들도 그러기를 원했다.
 
만공과 한암은 경허의 전법제자이지만 한암은 오대산에서, 만공은 덕숭산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후학들을 제접하였다. 한암은 1925년 무렵부터 1951년 입적하는 그날까지 오대산에서 은둔적 수행을 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현하였다. 이에 반해 만공은 경허의 체취가 가득한 호서지방의 덕숭산에서 개당설법을 한 1905년부터 입적한 1946년까지 자신만의 가풍을 구현하였다. 즉, 만공은 경허의 사상과 선풍을 계승하면서 덕숭산에 독자 살림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에 반해서 한암은 오대산에서 경허의 색채와는 다른 자신만의 불교세계를 구축하였다.
한암과 만공은 경허에게 수법한 제자로, 동 시대를 함께 살아간 수행자이면서, 조선불교 선종의 종정을 함께 역임하였지만 그들의 행적은 몇 가지 점에서 이질적이었다.
 
우선, 한암은 종단 활동을 소극적, 은둔적으로 하였다. 한암은 선사로서 당연하게 맡아야 할 조실 이외의 소임은 맡은 적이 없다. 더하여 공적인 소임을 자진하여 맡은 적이 없으며 실무적인 불사에 개입한 적이 없다. 부득이하게 4차례나 교정, 종정을 맡았지만, 오대산을 벗어난 적이 없다. 기본적으로 은둔의 노선을 지향하였지만 종무에 필요한 경우에는 철저하게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였다. 반면에 만공은 적극적 외향적으로, 종단소임과 주지활동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는 중창불사, 외적으로는 대사회적 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만공이 총독에게 고성으로 일갈을 하여, 한국불교와 수좌의 자존심을 널리 알린 사건이 그러하다.
 
다음으로 한암은 계정혜 삼학을 균수하는 등 율사적인 이미지가 상당히 강하였다. 그렇지만 만공은 선 우월주의, 선 지상주의 입장만을 강조하였다. 자연히 만공은 학인들을 제접함에 경전과 계율에 대한 강조를 희박하게 하였다. 즉 학인교육에 있어서도 한암과 만공은 달랐다.
 
마지막으로, 불교 개혁에서 대해서 본다면, 한암은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불교 개혁에 대한 입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본적으로 전통을 계승하는 복고의 노선을 걸었다. 따라서 불교의 세속 활동 및 외형적 개혁에 대한 관심도 적었다. 한암은 참선 수도 자체가 국가와 사회에 복이 되는 터전을 삼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만공은 대사회적인 의미에서의 불교개혁에 대한 상당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개혁의 일선에서 수좌들을 추동하고, 그 일선에 있었다.
- 이덕진(창원문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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