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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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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화실장 작성일06-08-26 13:36 조회2,7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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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사고. 앞의 건물이 실록을 보관하던 사각(史閣)이며 뒤의 선원보각(璿源寶閣)은 왕실의 족보와 같은 것을 보관하던 곳이다.

사고와 영감사로 오르는 길은 상원사에서부터 오대천을 따라 4㎞ 남짓 월정사 방향으로 내려와야 만날 수 있다. 길 오른쪽으로 이정표가 있으며 큰 길에서 0.9㎞, 느린 걸음이라도 20분이 걸리지 않는다. 경사가 급하지도 않으며 자동차 한 대가 너끈히 다닐 만큼 넓어서 걷기에는 더없이 훌륭하다. 더구나 골짜기로 접어드는 순간 큰길의 기억은 금세 잊어버릴 만큼 계곡이 깊어 매력적인 길이다. 본디 사고는 물과 불, 그리고 바람의 삼재(三災)로부터 안전한 곳을 택하게 마련이니 그곳으로 가는 길 또한 더할 나위 없지 않겠는가.

오대산사고는 세인들의 관심에서 까마득히 잊혀 있다가 최근 들어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에 봉안되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47책이 최근 돌아왔기 때문이다. 오대산에 조선왕조실록을 봉안하려던 움직임은 1605년 10월부터였다. 처음에는 상원사를 봉안 장소로 정했다가 남호암골에 사각(史閣)을 짓기로 변경한 것이다. 다음해인 1606년 지금의 자리에 사고가 지어졌으며 당시에는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 초고본을 봉안했다고 한다. 그 후, 1616년에는 ‘선조실록’, 1653년에는 ‘인조실록’, 1657년에는 ‘선조수정실록’, 1661년에는 ‘효종실록’, 1678년에는 ‘광해군일기’, 1728년에는 ‘경종실록’ 그리고 1805년에는 ‘정조실록’을 봉안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사고를 관리하던 최고책임자인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總攝)은 월정사 주지가 맡았으며 수호군 60여명에 승군 20여명이 사고를 지켰다. 지금의 영감사를 당시에는 사고사(史庫寺)로 불렀으며 사고를 지키는 승군들이 묵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3년 10월, 총독이었던 데라우치에 의해 도쿄제국대학도서관으로 강탈된 후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대출되었던 47책만이 화를 면했던 것이다.

최근 이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이 돌아오게 된 것은 월정사가 중심이 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 덕분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월정사의 주지가 실록수호의 책임을 끝까지 다한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실록은 제자리인 오대산사고로 오지 못하고 서울대 규장각으로 가고 말았다. 그것도 되찾은 것이 아닌 도쿄대학으로부터 기증을 받는 모양으로 말이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월정사가 실컷 재주를 부렸더니 떡은 규장각이 먹은 꼴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떡마저도 제 권리를 다 갖추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먹은 꼴이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더욱 돋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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