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대와 오대산사고, 영감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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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화실장 작성일06-08-26 13:13 조회9,513회 댓글0건본문
오대산사고와 영감사로 오르는 남호암골은 오대산중의 보물과도 같은 곳이다. 오대천으로 흘러드는 계류 또한 오대천 물길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내놓는다.
-온산 참견하며 오르자니, 몸에 물길이 열려…-
길을 간다는 것은 반드시 앞으로 향하는 것만은 아니다. 더러는 이미 다녀온 길을 되짚어 돌아가기도 하며 우두커니 한 곳에 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거나, 앞으로 가야 할 길을 가늠하는 것 또한 길을 가는 행위이다. 그러나 물은 다르다. 샘을 떠난 그는 오로지 앞으로만 향할 뿐, 스스로 거슬러 오르지 못한다. 오히려 허방다리라도 짚은 듯 폭포로 떨어지고 나면 거친 숨을 고르느라 소(沼)나 연(淵)이 되었다가는 이내 다시 흐르곤 할 뿐이다. 그처럼 물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며 낮은 곳에서 더욱 낮은 곳으로 향하는 질주본능을 지닌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그러나 나는 낮게 드리운 안개를 이불 삼아 덮고는 아직 곤한 잠에 빠진 오대천을 거슬러 상원사로 향했다. 막바지 장마의 심술인 양 어김없이 흩뿌리는 는개를 맞으며 말이다. 그러나 이슬과 같은 영롱한 지저귐으로 반기던 새들은 모두 어디로 갔으며,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바람은 또 어디에서 잠이 들었는가. 울창한 숲은 적막할 뿐 오로지 오대천 물소리만 온 산에 가득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분주히 길섶을 오가던 다람쥐마저 흠칫 놀라 멈춰서는 시간에 다시 상원사에 오른 까닭은 지인을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이태 동안 매주 한 차례, 서대 염불암을 오르내리며 사진 작업을 했다. 그런 그가 한 해가 지나자 그동안 찍은 사진을 들고 찾아왔다. 100평 남짓한 터에 앉은 암자를 일년 동안 수십 차례나 오르내렸으니 사진이 볼 만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만그만했다. 왜 이러냐고 묻자 머쓱해진 그의 대답은 명료했다. 사시사철을 오른들 암자에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며 당연히 사진 또한 그만그만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맞는 말도 아니다.
독일의 유대계 철학자인 마틴 부버(1878~1965)에 따르면 인간이란 비단 사람과의 만남뿐 아니라 사물이나 자연과의 만남으로서 존재에 대한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과의 만남에서는 서로의 언어로 소통이 가능할뿐더러 내가 너에게 혹은 네가 나에게 다가가거나 오기가 수월하지만 사물이나 자연은 그렇지 못하다. 사물이나 자연이 나에게 먼저 다가올 수 없으므로 그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의 적극적인 몸짓을 통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와 동행한 지인은 변하지 않는 암자를 앞에 두고 스스로가 변할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다. 바위와 이야기를 하려면 바위가 먼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먼저 다가서야 한다. 나무와 하늘, 바람과 구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은 길 위를 부유(浮遊)하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 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생각의 규모가 달라진 지인을 염불암 들머리까지 배웅하고 산길을 되짚어 내려와 사고(史庫)와 영감사(靈鑑寺)가 있는 남호암(南虎巖)골로 접어들었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인 삼연(三淵) 김창흡(1653~1722)이 숙종 21년인 1695년 윤8월7일, 마침 오늘과 같이 빗발이 흩어지는 날 오대산을 찾았다. 그가 쓴 ‘오대산기’(五臺山記)에 따르면 강릉의 구산서원(丘山書院)을 출발한 그는 대관령을 넘어 횡계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빗길을 걸어 다다른 월정사에서 밤을 밝혔다. 8월8일은 맑게 개었으며 이윽고 남호암골을 거닐었다.
그는 오대산중 어디에 그런 곳이 있었냐 싶게 빼어난 오솔길을 걸으며 곁으로 흐르는 맑은 계류에 취해버렸다. 오죽하면 물 흐르는 소리마저 거문고소리나 비파소리 같다고 했을까. 그러나 지금도 귀 기울이면 과연 그렇다. 그지없는 오솔길의 아름다움에 이미 취해 버렸는데 흐르는 계류 소리인들 어찌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로 이어지는 둔중한 비올라나 첼로 소리로 들리지 않겠는가.
영감사. 본디 사고를 지키던 승군들이 머물던 곳으로 이름 또한 사고사(史庫社)로 불리기도 했다.
어정어정, 길섶에 베풀어진 풍경에 갖은 참견을 하며 오르다보면 정작 놀라운 것은 자연만이 아니다. 김창흡의 글에 “서쪽으로 느릿느릿 오르면 산기슭에 작은 암자가 있는데 금강대(金剛臺)라고 한다. 그윽하고 외딴 곳에 있어 쉴 만한 곳이다”라고 했으니 사고와 영감사만 있는 줄 알았던 곳에 암자가 다소곳이 있었다는 말이다.
나의 지나친 궁금증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한 줄 글이었다. 더군다나 두루 섭렵한 오대산에 대한 글들 중 금강대에 관한 이야기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터이니 더욱 마음이 동했던 것이다. 금강대로 가는 길은 온통 안개에 쌓여 있을뿐더러 사람의 흔적이 배어 있지 않은 아름다운 숲을 지나야 했다. 얕은 능선을 두엇 가로질렀을까. 조개골에 들어서자 희뿌연 안개 속에 희나리를 잔뜩 쌓아 놓은 금강대가 넌지시 보였다.
흔한 단청이나 현판조차 걸려 있지 않아 약초꾼들의 초막과도 같은 집 앞에 서서 인기척을 내며 스님을 찾았다. 화들짝 놀란 스님이 이른 아침부터 찾아 든 이를 내치지는 않았지만 썩 달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자신이 이곳에 머문 지 90일 만에 처음 찾아온 사람이라고 하니 반갑기는커녕 익숙함이 깨져버린 당혹스러움이 얼굴에 묻어났던 것이다.
금강대임을 확인하고는 채 10분도 머물지 않고 돌아섰다. 그만하면 됐지 싶었다. 나에게는 용맹정진중인 스님을 방해할 아무런 까닭도 지니고 있지 못했으며 굳이 샅샅이 산을 뒤져 이곳까지 찾아든 것조차 미안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나에게 골방이나 다락방이 절실했듯이 스님들 또한 자신만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 필요하리라.
되돌아서서 괜스레 산길을 걸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길이 곤혹스럽게 이어졌지만 높은 곳에 서면 한 눈에 사고가 보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개를 뚫고 불쑥 나타날 것만 같은 사고는 보이지 않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거칠어질 무렵 단원(檀園)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사고’(史庫)도를 꺼내들고는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가 그림을 그린 시기는 정조 12년인 1788년 가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무렵 사고로 오르는 길에는 멀리 남호암골의 들머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사고의 오른쪽 아래로는 암자와 같은 것이 그려져 있는데 그것이 금강대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당시 사고 주변에는 모두 다섯 곳에 사고를 호위하는 승군(僧軍)들이 묵는 암자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그려진 것이다.
안개와 는개에 촉촉이 젖은 몸을 일으켜 사고로 가는 길에는 안개가 걷혔다가 다시 덮쳐오기를 거듭했고 봄이면 매발톱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던 사고 돌담 아래는 풀이 웃자라 있었다. 완당(阮堂) 김정희(1786~1856)도 이 길을 걸어 사고에 오른 적이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가 예문관검열의 관직에 있을 때로부터 규장각 대교로 임명된 1819~23년 사이의 일이지 싶다. 그때 완당은 포사관(曝史官)이 되어 오대산을 찾았던 것이다. 포사관이란 ‘포쇄관’이라고도 하며 사고에 있는 책을 꺼내 햇볕을 쬐며 거풍(擧風)시키는 일을 맡은 사람을 이르는 것이다. 대개 예문관검열이 이 직책을 맡았으니 완당이 오대산으로 향했던 것도 그 즈음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
그는 남호암골을 오르며 시를 한 수 남겼는데 ‘포사를 위해 오대산을 오르다’(曝史登五臺山)라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흥미로운 것은 법운(法雲) 곧 부처는 사고의 밖을 지켜 주고, 선(仙) 곧 산신령이 사고를 밝게 빛나게 해 준다는 것이다. 물론 완당 스스로가 불교친화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부처와 산신령이 사고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뜻밖이 아닐 수 없다. 불경을 번역했는가 하면 사고 뒤의 영감사와 상원사의 중창기를 쓴 괴애(乖崖) 김수온(1410~81)이나 교산(蛟山) 허균(1569~1618)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앞세웠다가 유신(儒臣)들로부터 탄핵을 받기까지 했으니 더욱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말끔하게 단장된 사고 마당을 거닐다 먼 산을 바라보면 완당이 읊었듯이 산봉우리는 온통 하얀 구름에 감겨있고, 숲의 끝은 아스라이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적막한 곳에 이른 매미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잠자리들이 날기 시작했다. 비가 그친 것이다. 사고를 뒤로 하고 영감사로 오르자 각수(覺首) 스님이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법당 한 채와 요사 한 채가 단출한 절 마당에서 잠시 사고와 영감사의 중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는 이내 돌아섰다. 삼연이나 완당이 그토록 아름다움을 노래한 길을 다시 걷고 싶어서였다.
단원 김홍도가 그린 오대산사고. 간혹 나뭇잎에 맺힌 빗방울이 떨어지는 길에는 소리가 있었다. 늦잠을 잔 바람이 서둘러 찾아왔는지 분주히 나뭇잎을 흔들고 계류는 여전히 둔중한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 좋다는 곳 모두 놔두고 한강으로 흘러갈 계류 곁에 앉았다. 꼬박 두어 시간, 자리를 뜨지 않고 그를 봤다. 열흘이 넘도록 큰 비가 내린 탓인지 그는 잠시도 머물 틈이 없는 듯했다. 강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물줄기이지만 바다가 드넓은 것은 이 가느다란 물줄기를 모두 받아들인 때문이 아닌가.
산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높은 산은 언제나 넓게 마련이지만 사람들이 깃드는 것은 정작 높이가 아니라 그 넓음 속이다. 그렇게 찾아든 사람들로 인해 산은 더욱 넓어지고 커질 뿐 결코 높아지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니 우통수에서부터 내려올수록 물줄기도 굵어지고 산도 굵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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