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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종이 만난 사람]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경향신문)_2010.08.2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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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0-09-15 19:59 조회8,1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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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의궤 환수는 ‘역사적 자존심’ 되찾은 사건”

“나를 ‘또라이’ 취급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을 겁니다. 하하하….” 섭씨 30도가 넘는 폭염,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 그의 웃음소리가 양양했다. 평소에도 늘 활기가 넘치는 그다.

지난 4년 동안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왕실의궤 반환운동을 주도해온 불교 조계종 중앙신도회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인 혜문 스님(37)이다. 지난 10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문에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도서를 가까운 시일에 넘기고자 한다’는 내용이 포함됐으니 신이 날 만도 했다.
혜문 스님은 실록과 의궤 환수 외에도 ‘조선 여인 신체 일부 표본’ 파기 소송, 명성황후 살해에 쓰인 칼 히젠토 환수 운동 등 쉴 새 없이 ‘뉴스’를 ‘생산’해내는 뉴스메이커다. |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지난 17일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홍릉(洪陵)에서 그를 만났다. 일본인들의 칼에 살해당해 불태워진 뒤, 시신도 없이 2년2개월 동안 장례를 치른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곳이다. 그 굴욕적이고 슬픈 국상의 기록인 ‘명성황후국장도감’ 의궤가 88년 만에 고국에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뭐랬어요. 국권 침탈 100년이 되는 올해 광복절에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그랬다. 지난 4월, 그와 함께 5일 동안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 궁내청 쇼로부(書陵部) 소장 의궤 열람, 일본 의회 방문, 외무성 방문, 일본 언론 인터뷰 등 무척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는 천방지축, 돈키호테 같았다. 일정은 즉흥적이고, 일의 순서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일단 부딪치고 보는 식이었다. 행동과는 달리 역사에 대해 해박하고 설명에는 조리가 있었다. 접근하기 어렵고, 절차도 복잡하기만 한 문화재 환수 문제를 그런 역사 지식과 돈키호테 기질로 하나씩 하나씩 돌파해내는 모습이 신기했다.

-문화재 찾기가 의병운동이라는 말을 했다. 무슨 뜻인가.

“지금까지 일본 왕실에서 식민지 지배에 대해 책임있는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런데 일왕이 조선왕실의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사실상 시인한 것 아닌가. 정부가 포기한 문화재를 민간이 싸워서 되찾았다. 우리나라 승병, 의병운동의 전통에 한 줄을 더 남긴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의궤 환수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가.

“실록과 의궤는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오른쪽과 왼쪽이다. 조선왕실 기록물 반환의 완전한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단순히 ‘유형의 물건’의 차원을 넘어 ‘역사적 자존심’을 되찾은 사건이다.”

-불교 승려가 수행은 하지 않고 너무 나댄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정부 관계자와 문화재 전문가들은 나를 사고뭉치라고 한다. 일개 승려가 정부 간의 문제에 사사건건 나서 국가의 이미지를 실추시킨다고 못마땅해했다. ‘불가능한 일’이라며 비웃었다. 그렇지만 신경쓰지 않는다. 나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것도 없다. 승려니까 돈을 모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절에서 ‘짤릴’ 것도 아니고….”

그는 의궤 반환 운동 말고도 최근 몇 년 동안 쉴 새 없이 ‘뉴스’를 쏟아냈다. 거둔 성과도 만만치 않다. 4년 전 도쿄대와 싸워서 실록을 반환받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친일파와의 내원암 토지 소송, 삼성과의 현등사 사리구 소송에서 이겼다. 명성황후 살해에 쓰인 일본 무사의 칼 ‘히젠토(肥前刀)’의 행방을 찾아냈고, ‘숭어’로 잘못 돼 있는 슈베르트 가곡 ‘송어’의 교과서 개정을 이끌어냈다. 또 고종의 투구와 갑옷, 명성황후의 표범가죽 카펫, 이순신 장군의 칼 ‘쌍룡검’도 찾아나서고 있다.

그는 지난 19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를 상대로 낸 ‘여성 생식기 표본 보관 금지’ 청구 소송에서 패소하면서 또 한번 ‘뉴스메이커’가 됐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서울 종로 명월관은 일제시대 일본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즐겨 찾는 요정이었다. 이중섭의 스승으로 알려진 화가 이시이 하쿠테는 1918년 조선에 왔다. 명월관 최고의 명기(名妓)인 홍련이라는 여인을 만났다. 홍련과 이시이의 사랑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이시이가 일본으로 떠난 뒤 조선과 일본의 사내들이 줄지어 홍련을 찾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홍련 곁에서 복상사했다고 한다.

홍련은 30대 나이에 요절했다. 경찰이 복상사의 원인을 찾기 위해 그녀를 부검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녀의 신체 일부 표본은 백백교주의 머리와 함께 포르말린 속에 보관된 채 최근까지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지하 냉장보관실에 남아 있었다. 백백교주 전용해는 “조선에 대홍수가 나는데 백백교를 믿으면 살 수 있다”며 신도를 끌어모았다. 그는 신도 620명을 살해하고 1937년 자살했다. 한때 국과수를 견학하는 경찰이나 학생들에게 이 표본을 보여줬다. ‘기생 명월이 생식기’로 알려진 여인의 신체를 보고 키득대며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일제시대 명월관 최고 기생은 ‘명월이’로 통칭됐다고 한다.

혜문 스님이 소문을 들었다. 국과수를 방문해 표본의 존재를 확인했다. 포르말린 병에는 ‘조선 여인의 생식기’ ‘백백교주의 머리’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그는 “성적 쾌락, 호기심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존엄성에 반하는 표본을 즉각 폐기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냈다. 스님이 그런 소송을 하는 것이 망측하다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은 노스님이 용기를 줬다.

“일본놈이나 한국놈이나 다같이 나쁜 놈들이구먼, 제나라 처녀가 일본 놈들 손에 농락당한 줄 알면서도 여태 그걸 보관하고 있어? 네가 가서 혼 좀 내줘라.”

그는 한편으로는 이시이의 행적을 추적했다. 지난 4월 나가노현 마쓰모토시립박물관을 찾았다. 그곳에 이시이가 그린 조선 여인의 초상화 ‘홍련화(紅蓮畵)’가 있었다. 그는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그림 속의 홍련이 바로 표본의 주인이라고 믿고 있다.

지난 6월 재판부는 “원고는 피고에게 위자료를 요구하지 말고 피고는 표본을 폐기하라”는 화해권고 결정을 내렸다. 그는 불교계가 유골 처리를 맡게 되길 바랐다. 홍련의 초상화 사진을 영정으로 써 원혼을 달래줄 계획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국과수가 자체적으로 표본을 폐기한 것이다. 게다가 백백교주의 머리는 폐기되지 않았다.

“이미 패소할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국과수가 90년 동안 무신경 속에 보관해온 명월이 신체 표본을 파기했으므로 목적은 이뤘다. 다만 판사는 장례절차를 진행하라고 화해 권고했는데, 불복하고 임의대로 처리했다. 그것도 폐기물처리업체에 용역을 줘서 소각 폐기했다고 한다. 아쉬움이 크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아무도 ‘표본의 반인륜성’을 문제삼지 않고 모욕을 주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며 “이 소송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일제의 잔재라는 게 뭔가. 신체를 난도질당한 한 여인의 불행한 모습을 보며 키득대는 것 또한 우리 속의 일제 잔재다. 흉악범이라고 해도 시신을 박제할 권리는 없다. 그런 인간의 마성과 욕망을 극복해야 일제를 극복할 수 있다. 계획대로 백중인 24일 봉선사에서 홍련의 초상화를 영정으로 위령 천도재를 지내려고 한다.”

그는 “이 모든 것이 ‘제자리찾기’라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금강경>에 ‘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구절이 있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자기 자리를 잃어버린 중생에게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주는 것이 ‘불교의 진리’다. 나는 문화재 환수 운동이 불교사상을 사회화하는 과정이며 또 다른 수행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추적은 집요하다. 일본 교토에 유학 중이던 2004년 고서점에서 일본인 학자가 쓴 <청구사초(靑丘史草)>라는 책을 보게 됐다. 조선왕조실록이 도쿄대에 소장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즉시 실록을 열람했다. 2006년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를 구성했다. 실록 반환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한일협정 당시 반환받은 1432점의 문화재 목록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는 “그 목록에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같은 허접한 것들이 포함돼 있었다”며 “이런 것을 돌려주고 ‘문화재 반환이 종결됐다’고 하는 것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결국 도쿄대는 서울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실록을 돌려줬다.

-조선왕조실록 환수 과정에서 불만을 가졌던 것으로 안다.

“약탈자가 빼앗긴 이에게 기증함으로써 ‘약탈’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선의의 기증자’가 됐다. 민간단체가 자비를 들여 환수운동을 할 때 관심조차 없던 정부와 서울대는 실록이 돌아오자 공을 가로채기 바빴다. 정작 반환을 이끌어낸 우리는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이 돼 버렸다.”

-지금 실록은 어떻게 돼 있나.

“서울대가 한 일은 소유를 확인하는 규장각 도장을 찍은 일뿐이다.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추가 등재하기로 약속해놓고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실록의 ‘제자리’는 월정사가 있는 오대산 사고(史庫)였다. 오대산 사고에 있던 또 다른 문화재 행방을 찾다가 궁내청 도서관에 의궤가 소장돼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까다로운 절차와 협의를 거쳐 의궤 등을 직접 확인하고 열람했다. 실록 환수 과정에서 실망한 사람들을 다시 불러모아 의궤환수위원회를 만들었다.

-일본 궁내청 의궤 실물 확인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전문가들은 목록만 파악했을 뿐, 의궤를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도 틀린 것으로 확인됐지만. 그만큼 열람이 쉽지 않다. 궁내청 의궤에는 대정 11년(1922년) 5월 조선총독부 기증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약탈문화재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였다.”

그는 의궤반환 운동을 하는 동안 국내보다 일본 양심세력들의 도움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40여차례 일본을 오가며 일본의 여야 의원과 시민단체, 언론을 설득하고 공을 들였다.

-의궤 반환이 순조롭게 이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양국간 외교적 절차가 남아 있다. 제실도서의 경우에는 가치있는 것도 있지만 인사동에서 20만원에 팔리는 책도 있다. 의궤 81종 167책 가운데 4책은 대정 6년 궁내청 도서비로 구입했다는 기록을 최근 새로 확인했다. 그런 것은 우리가 깨끗이 인정하고 포기해야 한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신속하고, 유연하고, 품위있게, 합리적으로 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는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를 부각시키기 위해 명성황후의 죽음을 추적한 <조선을 죽이다>라는 책을 썼다. 그 과정에서 히젠토와 명성황후 표범가죽 카펫, 충무공 칼의 행방을 찾아나섰다.

“우리 주변에 무수한 인연과 정보가 흘러다닌다. 고종이 도 가쓰아키에게 황금 1만냥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기록을 봤다. 도의 행적을 조사하다 보니 후쿠오카의 구시다 신사에 히젠토가 있었다. 칼집에는 ‘一瞬電光刺老狐(늙은 여우를 단칼에 베다)’라고 쓰여 있었다. 거기서 끝내지 않고 범죄에 쓰인 칼이니 폐기해야 한다고 환수를 요구하는 것이 내 방식이다.”

그는 명성황후 표범가죽 양탄자에 대한 미국 라이프(LIFE)지 기사를 발견하고 문제를 제기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에브론 길트너가 서울의 한 고미술상을 통해 당시 25달러를 주고 48마리의 표범가죽으로 만든 카펫을 사들여 집으로 보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뉴욕주재 한국총영사관은 ‘명성황후가 쓰던 국가 보물’이라며 반환을 요청했다. 미국 정부의 전후(戰後) 보상업무 기록에 따르면 이 카펫은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반환됐다. 그러나 이 카펫은 60년째 행방이 묘연했다.

그가 이런 내용을 공개하고 소재 파악에 나서자 국립중앙박물관은 ‘명성황후 표범가죽 양탄자’로 추정되는 표범가죽 카펫을 공개했다. 그런데 얼마 후 박물관 측은 “자문위원회 조사 결과 양탄자 뒷면의 이화문양과 유전자(DNA) 분석, 표피 조각 수가 달라 같은 유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표범 카펫은 그동안 공개된 적이 없다. 박물관이 60년간 수장고에 방치해둔 과오를 덮기 위한 것이라는 의구심이 든다. 같은 카펫이 아니면 명성황후 카펫을 찾아내야 할 것 아닌가. 표범가죽의 유전자 검사를 왜 하나. 무슨 친자확인도 아니고…. 문화재를 반환받고도 정부와 문화재 관련 기관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한심한 일이다.”

혜문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는 일을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비웃었지만 영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깬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 혜문 스님은 누구
친일파와의 내원암 토지소송 제기…‘재산환수 특별법’ 결정적 계기


혜문 스님은 경기 남양주시 봉선사 승려다. 그는 출가 이전의 이력을 밝히는 것을 꺼렸다. 성균관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흥선대원군에 관한 졸업논문을 썼다. 대학원에서는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사법시험 준비를 하다가 1998년 봉선사 철안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3년 동안 봉선사 조실인 동국역경원장 월운 스님을 시봉했다. 당대의 대강사인 노스님은 혹독하게 한문 경전 공부를 시켰다. 그는 역사와 법률, 문학적 상상력, 한문과 불교 경전 등이 문화재 환수운동에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2002년 부산의 해운정사 선방에서 참선 중에 고막이 터졌다. 지금도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선방에서 쫓겨나 봉선사와 양주 회암사에서 지냈다.

2003년 어느날, 주지인 철안 스님이 그를 찾았다. “봉선사가 관할하는 사찰의 문화재와 토지를 조사해봐라.” 먼지가 가득 쌓인 서류를 하나씩 조사해 나갔다. 토지도 문화재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이 일은 그가 문화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그 과정에서 현등사 3층석탑에 봉안되어 있던 사리구가 도난당한 뒤 삼성문화재단에 흘러들어간 사실을 확인했다. 도난품을 알고도 삼성이 구입했다면 법적·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보고 소송을 제기했다. 1심에서는 패소했다. 옛날 현등사와 지금 현등사는 다르다는 것이 이유였다. 현등사는 한국전쟁 때 불타지 않은 유일한 사찰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사리를 훔쳤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삼성문화재단 측은 현등사 사리구를 조건 없이 돌려주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현재 사리구는 현등사에 봉안되어 있다.

소유권 확인소송을 통해 회암사 토지 60여만㎡(20만평)를 찾았다. 회암사 출토 문화재 소유권 재판에서도 승소했다. 2005년에는 친일파의 후손들이 봉선사 관할인 내원암 토지 20여만㎡(4만8000평)에 대한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후손들은 내원암 문제가 사회쟁점화하자 돌연 소송을 취하했다. 이 사건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문화재 환수운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 간사,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 문화재제자리찾기 사무총장을 맡았다. 김의정 조계종 중앙신도회장과 이상근 신도회 사무총장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다.


<김석종 문화에디터 s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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