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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환수과정 정부 역할 아쉬워”(위클리경향8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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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0-09-15 19:52 조회7,8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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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선왕실의궤 반환 공신 혜문스님, 지속적 환수활동 다짐
ㆍ경술국치 100주년·한국전쟁 60주년·전태일 분신 40주년·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


“처음에는 주변에서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했어요. 일개 스님이 일본 왕실을 상대로 문화재를 환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보였던 것이죠.”
혜문스님은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일본 정치인을 설득하며 조선왕실의궤 환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 궁내청에 묻혀 있던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인 <조선왕실의궤>가 현해탄을 넘어 8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의궤가 환수된다는 사실은 강제병합 100년을 앞두고 지난 8월 10일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의 뜻에 반한 것이었음을 사과하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담화문에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도서를 가까운 시일에 넘기고자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면서 국내에 알려졌다. 이러한 내용이 담화문에까지 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환수위원회) 사무처장 혜문스님이 꼽히고 있다.

지난 2006년부터 치밀하게 준비
지난 2006년부터 의궤를 돌려받기 위해 일본을 수십 차례 드나들었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그러나 혜문스님의 목소리에는 기쁨만큼 아쉬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다른 문화재에 대한 환수 노력이 병행됐다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더 많은 문화재가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일협정 이후 정부가 문화재 환수에 대해 너무 무관심했어요. 이번 의궤 환수과정에도 정부의 외교적 역할은 거의 없었죠. 민간 차원에서 오랫동안 노력한 것을 일본 정부가 받아들인 겁니다.”

혜문스님이 문화재 환수활동을 벌인 것은 의궤가 처음이 아니다. 혜문스님은 2004년 도쿄대에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실록 환수운동을 벌였다. 도쿄대가 2006년 7월 서울대에 기증 형식으로 실록을 반환하는 과정에서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혜문스님은 같은 해 10월 실록 환수활동을 통해 의궤도 침탈된 사실을 파악해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를 구성했다. 실록에 이어 의궤 환수활동에도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혜문스님이 문화재 환수에 나선 계기는 무엇일까. 혜문스님은 ‘상식’을 이유로 꼽았다.

지난 2004년 한일협정 문서가 완전히 공개되자 혜문스님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환수한 1432점의 문화재에 대해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다. 확인 결과 문화재적 가치가 비교적 낮은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등이 상당수 포함돼 있었다. 청구권을 포기하고 졸속으로 체결된 협상임을 느꼈다.

“석굴암, 다보탑에 있는 가치 있는 문화재는 다 털리고 짚신을 받아온 격이었습니다. 국가적 자존심은 물론 사회 상식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문화재 환수운동을 시작하게 된 거죠.”

혜문스님은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2010년 8월까지 의궤를 돌려받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번에 환수될 조선왕실의궤 가운데 하나인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에 나오는 장례 행렬도‘발인반차도’.

우선 의궤를 강제적으로 일본에 뺏겼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어떤 형식으로 의궤를 약탈당했는지 구체적이고 정확한 증거가 있어야 환수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혜문스님은 2006년 10월 일본 궁내청에 찾아가 의궤를 열람했다. 의궤마다 ‘대정 11년(1922년) 조선총독부 기증’이란 뻘건 도장이 찍힌 것을 직접 확인했다. 일본이 스스로 의궤를 강탈해 반출했다고 인정한 사실을 확인한 혜문스님은 의궤 환수에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혜문스님은 북한 조선불교도연맹과 조선왕실의궤 반환촉구 남북 공동 합의를 추진했다. 또 수시로 일본 정치인들을 찾아가 의궤 반환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설득했다. 특히 간 나오토 총리 등 유력 정치인에게는 꾸준히 서한을 보내 의궤 반환을 일본 내에서 이슈화해줄 것을 촉구했다. 2009년 10월에는 일 외무성을 방문해 ‘조선왕실의궤 반환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꾸준히 환수작업을 벌였다.

관련부처 소극적 태도 변화 필요
어려움도 많았다. 수십 차례 일본과 북한을 오가는 비용만 해도 수천만원이 들었다. 문화재청의 지원이 있었지만 턱 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가장 큰 어려움은 무관심이었다. 시민사회와 언론은 이들의 행보에 무관심했고, 주무부처인 외교부와 문화재청의 지원도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위기는 지난 7월에 있었습니다. 일본 외무성에서 한국 정부의 요청이 있으면 의궤를 반환할 것이라고 밝혔죠. 그러나 한국 외교부가 정식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일본에 있는 6만1000여 점의 문화재 가운데 의궤만 내놓으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죠.”

이 소식을 접한 혜문스님은 7월 20일 일본으로 건너가 8월 6일까지 일본 민주당 의원들을 만나 일본 정부가 자발적으로 환수하도록 설득했다. 또 한국 외교부를 압박해 정식 요청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나라당 이해봉 의원 등과 함께 조선왕실의궤 환수 국회 포럼까지 준비했다.

결국 일본이 자발적으로 담화문을 통해서 의궤 반환의사를 밝혀 환수위원회와 외교부는 갈등을 피했지만 혜문스님 입장에서는 여러 모로 아쉬운 마음이었다. 의궤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질 문화재 환수를 위해서는 관련 부처의 무관심이나 소극적인 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환수는 꾸준히 준비해야 하는데 지난 5년 동안 제대로 준비한 것이 의궤밖에 없다”면서 “만약 정부가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미리 문화재 환수를 준비하거나 민간단체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면 더 좋은 성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이 담화문을 통해 ‘조선왕실의궤 등’이라고 밝혔듯 의궤 외에 다른 문화재의 환수는 앞으로 주무부처인 외교부와 문화재청이 일본 정부와 협의해 이뤄질 것이다. 혜문스님은 이와는 별개로 문화재 환수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어떤 문화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의궤 환수 협상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의궤를 완전히 환수하면 다른 문화재 환수작업에 나선다는 것이다.

“과거에 왜란 등 나라에 큰일이 발생하면 중요한 문화재는 사찰에서 보관하거나 스님들이 지켰습니다. 이번에 되찾은 의궤도 마찬가지였죠. 일종의 관리자 역할을 했던 셈입니다. 따라서 옛날 스님들이 그랬듯이 저 역시도 불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조선왕실의궤란?

의궤란 ‘의식’과 ‘궤범’을 합한 말로서 조선왕실의궤는 조선시대 국가나 왕실에서 행한 주요 행사를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기록문서다. 주로 왕실의 혼사, 장례, 잔치 등을 기록했다. 현재 일본 궁내청에는 명성황후의 장례 절차가 기록된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 등 총 81종 167책의 조선왕실의궤가 보관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대 규장각과 한국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된 조선왕실의궤는 2007년 6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에 지정될 만큼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임석빈 인턴기자 zomby0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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