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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및 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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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취재도 거부...日 민감한 반응(불교닷컴)_2011.05.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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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5-18 09:37 조회7,73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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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①] 의궤환수위 현지방문…잃어버린 역사 고향으로 돌아오길


조선의 보물, 왕실 의궤가 환국한다. 조선총독부가 일제강점기인 지난 1914년 오대산 월정사가 지켜온 사고에서 실록 등 오대산 사고를 몽땅 강탈해 강릉 주문진항을 출발해 동해를 거쳐 일본 본토로 가져갔다. 동경제국대(현 도쿄대)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실록 47책은 지난 2006년 귀국했다. 하지만 의궤는 여전히 귀향하지 못했다. 하지만 89년 만에 의궤도 귀국한다.

약탈은 불과 9일, 귀국은 98년 걸려

일제 총독부는 한일강제병합 당시까지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사고’에 보관된 장서를 약탈했다. <조선왕실실록>과 <조선왕실의궤> 등 귀중한 도서를 보관했던 오대산 사고를 약탈한 것은 1914년의 일이다. 일제 총독부는 오대산 사고본을 약탈해 몽땅 동경제국대학에 양도했다. 총독부는 오대산 사고본 약탈과 반출에 월정사 인근의 주민들을 총칼을 앞세워 동원했다. 강제 동원된 월정사 인근 주민들은 사고의 도서들을 등짐과 달구지로 강릉 주문진항으로 운반했다.

이때의 일을 <월정사 사적기>는 이렇게 적는다.
“1914년 3월 3일 총독부 소속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 등이 와서 본사에 머무르며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해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그때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 되었는데 3일 시작해 11일에 역사를 끝냈다.”

오대산 사고의 실록과 의궤 등이 약탈돼 일본으로 반출되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9일이었다.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던 도서는 1909년 기록으로는 실록 761책과 의궤 380책, 기타 서적 2,469책 등 모두 3,610책이었다.

이때 강탈된 오대산 사고본은 데라우치 총독의 한일강제병합 축하선물로 동경제국대학에 보내져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하지만 1923년 <조선왕실실록>은 도쿄 일원을 불바다로 만든 ‘관동 대지진’ 때 거의 대부분 불타고, 교수들이 대출해 갔던 20여 책 등 47책만 보존됐다.

조선왕실의궤는 1922년 ‘실록’과 마찬가지 경로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1922년 조선총독부는 명성황후 국장도감과 보인소 의궤 등 72종 141책을 일본황실에 기증했다. 이후 일본 황실은 궁내청 서릉부 황실도서관에 의궤들을 보관해 왔다.

의궤의 환국은 ‘강탈’보다 더 고난의 시간이었다. 일제의 강탈로 의궤가 일본으로 떠난 것은 찰나의 일이었지만 환국까지는 89년이 걸렸다. 조선왕실의궤의 환국은 우리 문화재의 수난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실록은 강탈 93년만인 지난 2006년 귀국했고, 의궤는 89년만인 오는 6월께 돌아올 예정이다.

   

의궤 환수위 5년여 노력의 결실…민간 주도 반환 확산 기대

의궤 환수는 조계종 중앙신도회,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문화재제자리찾기 등이 5년여의 환수활동 끝에 이뤄낸 결실이다.

2006년 9월 조계종 중앙신도회와 제4교구본사 월정사, 제25교구본사 봉선사를 중심으로 환수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불교계를 중심으로 한 의궤환수 운동은 본격화됐다. 의궤환수위는 발족 직후 일본대사관에 ‘조선왕실의궤 반환요청서’를 정식 전달했다. 이후 북한 조선불교도연맹의 지지 발표와 유네스코 본부 방문 및 의궤반환문제 협의, 대한민국국회의 ‘조선왕실의궤 반환 촉구 결의안’ 채택을 이끌어 냈다. 의궤환수위의 노력은 마침내 지난해 간 나오토 일본 총리의 도서 반환을 골자로 한 담화 발표를 이끌어 냈다.

지난해 8월 일본 간 나오토 일본총리는 한일강제병합 100년 담화 발표에서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발표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한일 양국정상회의에서 조선왕실의궤 81종 167책을 포함한 150책 1,205책의 도서를 반환하는 ‘한일도서협정’을 합의했고, 2011년 4월 일본 중의회 외무위원회가 의궤 반환 관련 도서협정 조약을 채택해 본회의에 상정해 결국 4월 28일 중의원 본회의 표결을 통해 공식 의결됐다. 현재 의궤 반환을 위한 절차는 일본 참의원 본회의 상정 및 의결만 남은 상태다. 참의원 의결이 없어도 중의원의 본회의 통과로 30일 후면 사실상 한일도서협정이 발효된다. 참의원 의결은 사후 처리도 가능하다.

반환되는 조선왕실의궤는 소유권 이전까지 포함한 완전한 ‘반환’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최대 문화재 반환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남다르다. 의궤 반환을 계기로 민간 주도에 의한 다른 문화재 반환 운동도 더욱 활발해 질 전망이다.

의궤 환국을 앞두고 의궤환수위원회와 문화재제자리찾기 등은 12~14일 일본 현지를 방문해 의궤와 약탈문화재가 보관된 장소를 방문했다. 의궤 환국을 축하하고, 새로운 문화재 반환운동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탐방이었다.

   

탐방단 견학 막아선 궁내청 경찰…취재사진 검사 시도도

12일 오전 9시 김포공항을 출발한 ‘의궤 환수 탐방단’이 일본 도쿄에 도착해 처음 찾아간 곳은 일본 궁내청 서릉부의 도서관이 있는 에도성이었다.

탐방단은 의궤가 보관된 도서관을 견학할 예정이었지만, 궁내청 소속 경찰들의 저지로 쫓겨났다. 탐방단은 도서관이 있는 에도성 견학에 앞서 도서관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려 했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황실 경찰의 저지로 결국 에도성 견학조차 하지 못하고 성 밖으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일본 궁내청 소속의 경찰들은 탐방단과 동행한 기자들의 취재기록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경찰은 ‘한국 문화재 일본 탐방단’ 펼침막의 내용을 수차례 물으며 탐방단을 막아 세웠다. 결국 탐방단은 1시간여의 실랑이 끝에 에도성과 도서관 견학을 하지 못한 채 성 밖으로 쫓겨났다. 일본 황실이 의궤 반환 등에 대해 얼마나 민감한 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서울시의회 도쿄도에 지진피해 지원금 전달

에도성을 나온 탐방단은 도쿄도의회를 찾아 동일본 대지진 참사‘를 위로하고 지원금을 전달했다.

도쿄도의회 방문에는 서울시의회 문화재환수특별위원회 위원들과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 등이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은 지진피해 돕기 지원금을 전달했고,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은 지진피해자 왕생극락과 조속한 복구를 기원했다.

정념스님은 “의궤환수에 도움을 주신 일본 의원 여러분에게 감사드리며 조선왕실의궤가 본 소장처인 월정사로 무사히 돌아오기를 염원한다”며 “의궤환수가 한일 양국 우호 증진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도 “의궤 환수가 끝이 아니라 더 많은 문화재 환수 운동의 계기로 삼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많은 협조를 부탁한다”고 당부했다.

스즈키 간타로 도쿄도의회 부의장은 “일본에 직접 와 지원금 전달한 것은 서울시의회가 처음”이라며 감사의 뜻을 밝히며 “(일본 정부의) 의궤 반환은 훌륭한 일이며 앞으로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금산사 향로.
탐방단은 13일 오전 도쿄국립박물관을 찾아 또 다른 약탈문화재를 눈으로 확인했다. 도쿄국립박물관의 한국관과 법륭사(호류지) 보물관에 전시된 ‘금산사대전 미륵전’ 명문이 새겨진 향로와 삼국시대(6~7세기)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협시불이 보좌하는 석가여래 입상 등을 확인하고, 약탈문화재 환수운동 결의를 다시금 다졌다.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지난해 4월 금산사 향로의 실체를 확인했었다. 당시 문화재제자리찾기는 “도쿄 국립박물관이 향로를 뒤집어 전시한 것으로 보아 약탈문화재일 가능성이 크다”며 “금산사와 협의해 구체적인 환수조치를 취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어 탐방단은 도쿄대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이곳은 조선왕조실록 환수를 둘러싸고 실록환수위원회가 도쿄대 측과 두 차례 협상을 벌린 곳이었다. 탐방단은 이곳에서 실록 반환 후 서울대 규장각이 보관하고 있는 실록에 도장을 함부로 찍어 문화재 훼손행위를 벌린 사건 등에 대하 설명을 듣고 조선왕조실록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염원했다.

도쿄국립박물관·영친왕 관저 등서 문화재 환수 결의 다져

   
탐방단은 이어 도쿄 중심부 아카사카에 위치한 그랜드 프린스 호텔을 찾았다. 지금은 영업을 중단한 이곳에는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의 아들인 영친왕의 관저가 있었다. 영친왕은 1900년 12월 통감(統監)으로 부임해 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교육을 받고 일본 나시모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강요당한 비운의 인물이다.

탐방단에 동행한 이상협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황사손)는 “지난 10일은 부처님오신날이었지만, 이날이 영친왕의 기일이기도 했다”며 “이곳은 아프지만 꼭 기억하고 찾아야 할 우리의 역사가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또 이 씨는 “영친왕의 관저는 전주이씨 종친회뿐만 아니라 온 국민이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며, 잊혀진 역사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일어나길 기대한다”고도 했다.

정념 스님도 “영친왕이 구금된 애환의 역사 현장에서 우리는 과거사를 해소하고 한일 양국의 우호와 새로운 미래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불행한 역사인 과거사를 정리하고 문화재 환수를 위해 국민이 함께 의식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탐방단은 영친왕 관저 방문에 앞서 의궤 반환을 위한 일본 참의원의 한일도서협정 조약 현장을 찾아 의궤 반환의 최종 결정을 눈으로 확인할 계획이었지만, 일본 참의회의 외무상임위원회 논의 불발로 본회의 상정이 어렵다는 소식을 접했다.

탐방단은 5월 13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 의궤 반환을 위한 ‘한일도서협정’이 상정될 것으로 보았지만, 일본 국회의 여야 마찰로 관련 조약이 참의회 상임위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접해 <조선왕실의궤> 반환을 위한 한일도서협정의 일본 참의원 통과라는 역사적 현장 참여는 불발로 끝났다.

환수위, 약탈문화재 보관 현장서 의궤 환국 연회 개최

의궤 환국을 위해 노력한 일본 현지 조력자들을 격려하고 새로운 문화재 반환운동을 다짐하는 자리로 마련된 ‘조선의 보물, 왕실의궤’ 환국기념 축하연에 앞서 탐방단은 오쿠라 호텔 내에 위치한 오쿠라 박물관(집고관)을 찾았다. 이곳에는 이천동 오층석탑과 평양율리사지탑이 보관된 곳이다. 이천오층석탑은 현재 이천시와 이천불교계가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고, 평양율리사지탑은 문화재제자리찾기가 환수운동을 선언한 상태다.

   
조선왕조실록 반환 협상이 이루어진 도쿄대 도서관.

탐방단은 13일 오후 6시 30분, 일제 강점기 약탈된 문화재인 이천오층석탑과 평양율리석탑 등이 보관된 오쿠라 호텔에서 의궤환국 기념 연회를 가졌다.

오는 6월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조선왕실의궤가 환국을 앞두고 있는 가운데, 의궤 환수 운동을 펼쳐 조선왕실의궤환수위는 기념 연회를 개최하고 문화재 환수의 의지를 다진 것. 또 의궤 환수를 계기로 약탈 문화재 환수에 더욱 매진해 나가겠다는 뜻도 선언하는 자리였다.

이번 연회는 조선왕실의궤 1205책의 환수를 축하하고 그동안 문화재 환수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의궤환수위의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됐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 공동대표 정념 스님(월정사 주지), 의궤환수위 운영위원장 법상 스님, 의궤환수위 사무처장 혜문 스님, 손안식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 박영선·최재성 국회의원(이상 민주당),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 최명희 강릉시장, 이석래 평창군수 등 불교계, 정관계 인사 150여 명이 참가했다.

또 카사이 아키라(일본 공산당), 이시게 에이코(일본 민주당), 히토리 료이치, 오카와 야스오 아베 토모코 등 일본 국회의원과 와타나베 미쓰구 일조협회장 등 일본 측 인사들도 함께 자리해 의궤의 한국 반환을 축하했다. 특히 일본 NHK 등 현지 언론에서도 이날 행사를 취재를 하며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이어 의궤환수위는 조선왕실의궤 환수를 위해 노력한 아키라 일본 국회의원을 비롯해 일본 현지의 언론인, 사회단체 관계자 등 모두 18명의 공로를 치하하며 감사패를 전달했다.

“의궤 반환 일본 정부 결단 용기있는 결정”

의궤환수위 공동대표 정념스님은 “5년여의 걸친 의궤환수위의 노력으로 지난해 8월 간 나오토 총리는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을 발표하였고 올해 4월에는 일본 중의원 심의가 통과되어 조선왕실의궤의 반환을 목전에 두고 있다”며 “의궤 반환은 진심을 다해 물심양면으로 힘써준 한일 모두의 결실이자 의궤와 조선의 도서를 반환하기로 한 일본 왕실과 정부의 결단은 참으로 용기 있는 결정”이라고 밝혔다.

   

김원웅 의궤환수위 공동대표(전 17대 국회통일외교통상위원장)는 “일본이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재반환 등 과거청산에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며 “조선왕실의궤의 환수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지난 1세기 동안 민족적 수모를 씻어내는 일이라면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폐성과 국수주의를 극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박영선 국회의원은 축사를 통해 “이번 환수는 한일협정으로 정부가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은 민간단체인 의궤환수위가 이뤄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며 앞으로도 한일 양국의 우호 증진을 당부했다.

“의궤 환국은 한일 관계 새로운 장을 연 것”

일본 공산당 카사이 아키라 의원은 “왕실의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한국과 일본 관계의 새로운 장을 연데 이어, 관(官)이 하지 못한 일을 민간이 주도해서 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축하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의궤환수위의 일본 탐방은 약탈문화재 반환운동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자리였다. 1965년 한일조약으로 인해 문화재 환수에 정부가 나서지 못하는 현실에서 민간 주도로 약탈문화재 환수에 나서 <조선왕조실록>을 가져왔고, 다시 <조선왕조의궤> 마저 환수하는 성과를 격려했다. 아울러 평양율리석탑과 보스턴 미국 보스턴박물관이 소장한 고려시대 ‘금은제 라마탑형 사리구’ 환수 운동의 본격전개를 다짐하는 자리였다.

특히 <조선왕실의궤>가 환국한 이후 고향인 강원도 오대산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강원도와 불교계의 결의를 다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최명희 강릉시장과 이석래 평창군수, 장문혁 평창군의회 부의장 등이 탐방단에 동참한 이유 역시 ‘의궤의 제자리찾기’를 위한 것이었다.

문화재 제자리찾기 사무총장 혜문 스님은 의궤 반환에 대해 “일본 궁내청 소장 의궤의 반환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지만 결국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혜문 스님은 “문화재 제자리찾기는 문화재 반환 뿐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안된다고 말해왓던 일들이 진실하고 언제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스님은 이어 “의궤 반환은 한일관계의 새로운 우호 선린관계를 맺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향후 보스턴 미술관 사리구 등 반환과 평양율리석탑 반환운동을 장기적으로 지속할 것”이라고 했다.

의궤환수위원회 등 탐방단은 의궤환국 축하연을 끝으로 공식일정을 마치고 14일 오후 귀국했다.

■조선왕실의궤 환수 활동 주요 경과

2006년 9월 조선왈실의궤환수위원회 발족
2006년 10월 일본 궁내청 서릉부 방문 ‘의궤’ 열람
2007년 2월 조선불교도연맹, 환수위 공동으로 진정서 제출
2007년 10월 일본 시민단체 일조협회 총리에게 진정서 제출
2008년 7월 환수위 유네스코 사무총장 면담
2008년 8월 약탈문화재환수위해 평양 방문. 남북공동합의문 채택
2008년 9월 일본 궁내청 및 관방성 방문. 공동합의문 전달
2008년 12월 서울시의회 의궤 반환 촉구 결의문 채택
2009년 5월 2차 평양방문 의궤 촉구문 채택
2010년 4월 일본 방문. 의궤 5종 추가 발견
2010년 8월 일본 방문. 일본 각당 의원면담
2010년 8월 간 나오토 총리 ‘식민지배 사과와 의궤 등 도서반환’ 담화 발표
2010년 11월 한일정상 APEC 정상회의서 도선반화 등 서명
2010년 11월 일본 정부 한일도서협정 비준안 국회 제출
2011년 4월 일본 중의원 한일도서협정 비준안 표결 통과
2011년 5월 의궤환수위 ‘조선왕실의궤 환국 기념 연회’ 개최

서현욱 기자 mytrea70@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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