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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포럼]왕실의궤 오대산으로 와야 하는 이유(강원일보)_2011.12.0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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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12-07 08:50 조회7,89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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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어느 겨울 나는 우연히 서울의 한 박물관에서 옛 그림 몇 점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1788년 정조의 명을 받은 단원 김홍도가 그린 금강사군첩이었다. 한동안 나는 충격으로 인해 그 그림들 앞에서 떠나질 못했다. 그때 내가 본 그림은 평창의 청심대, 오대산 월정사와 전나무 숲, 상원사, 대관령, 그리고 바로 오대산 사고였다. 그 그림들은 너무나 생생했다. 그 그림만 가지고도 옛 사찰의 정확한 위치를 복원할 수 있었기에.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오대산 사고는 전나무들의 호위를 받으며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강원일보의 기사를 보니 오대산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궤는 1922년에 주문진항을 통해 일본으로 약탈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대산에서 나와 대관령을 넘었다는 얘기다. 자료를 뒤져보니 1512년 강원도관찰사 고형산이 대관령을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넓혔다고 한다. 고형산은 세월이 흘러 병자호란 이후 대관령 길을 넓혀 주문진에 상륙한 오랑캐가 한양으로 쉬이 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부관참시를 당했다. 그 길을 일제가 1917년 신작로로 넓혔다. 지금도 대관령 옛길 중턱의 바위에 준공 기록이 남아 있다. 아마 산림자원 수탈이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일제는 오대산에서 왕실의궤를 싣고 나와 지금의 월정거리에서 좌회전을 한 뒤 차항, 횡계 대관령을 넘었다는 얘기다. 그 길옆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나로서는 아득하고 아련하지 않을 수 없다.


이효석의 소설에 영서 삼부작이 있는데 `메밀꽃 필 무렵' `산협' `개살구'가 그것이다. 1937년 진부를 배경으로 한 `개살구'에는 그 신작로 얘기가 나온다. 산촌 사람들에게 있어 대관령을 넘어와 신작로를 달리는 트럭은 마치 멧돼지가 씩씩거리며 달려오는 것 같았다고 이효석은 소설에서 밝혔다. 진부의 한 처녀는 오대산으로 나무를 운반하러 온 사내를 흠모해 월정거리까지 걸어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얘기도 있다. 돈 많은 사내는 그 길을 이용해 강릉에서 첩을 데려와 살다가 온 동네에 망신을 떨기도 했다.


그런데… 일제는 300여 년을 오대산 사고에 고이 보관돼 있던 왕실의궤를 그 길을 이용해 훔쳐갔다는 얘기인 것이다.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부끄러움만은 감출 길이 없었다. 다행히 집 떠난 지 89년 만에 조선왕실의궤 오대산본이 6일 돌아왔다. 배를 이용해 주문진항에 도착하고 대관령을 넘어 오대산으로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나름 생각했는데 떠났던 길이 아닌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온다고 한다.


어쨌든 나라가 하지 못한 일을 민간단체에서 오랫동안 애를 써서 이룩한 성과이기에 더 박수를 보내야만 하는 일이다. 그것은 분명 엄청난 인내와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대산 아래에서 태어나 글을 쓰며 사는 소설가로서 거듭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겨울이 가고 따스한 봄이 오면 오대산 사고를 찾아가 아흔 세월 동안 먼 길을 돌아온 그 책들을 한 장 한 장 펼쳐보고 싶다.


그러려면 실록과 왕실의궤는 단원의 그림 속 오대산 사고로 돌아와야만 한다.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야말로 오랫동안 끊어졌던 길을 연결하기 위한 이 모든 노력의 마침표가 되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탑이 있었던 자리에 탑을 올려놓는 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소박함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을 맞아들이기 위해 우리는 기꺼이 함박눈 내리는 길로 나가 다시 종이비행기를 날릴 것이다.


김도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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