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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27> 문화재 약탈의 기억을 찾아서 - 오대산 사고(한국일보)_2010.08.0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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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0-08-04 09:21 조회10,4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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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강제병합 100년] <27> 문화재 약탈의 기억을 찾아서 - 오대산 사고
일제, 의궤·실록 등 불법 반출… '조선왕실史'를 빼앗았다
구한말부터 조선 고서 약탈… 강제병합 후엔 가속도 붙어
오대산 사고·선원보각선… 실록 788권·의궤 등 빼돌려
"국가 소유 명백한 자료는 반환 요구할 명분 분명"

오대산=김혜경기자 thanks@hk.co.kr
115년 전 일본 공사가 이끄는 낭인 무리에게 살해당한 명성황후. 2년 2개월에 걸친 그의 슬픈 국상(國喪) 기록은 지금 엉뚱하게도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고 있다. 1922년 조선총독부가 '조선왕실의궤(朝鮮王室儀軌)' 오대산 사고본을 일본으로 불법 반출했기 때문이다. '조선 기록문화의 꽃'으로 불리는 의궤는 왕실의 주요 의식과 행사 과정 등을 그림과 함께 기록한 문서로, 유네스코가 200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했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난달 29일 오대산 사고지(五臺山 史庫址ㆍ사적 제37호)를 찾았다. 몰락한 조선 왕실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앗아간 약탈의 현장이다. 사고와 사고 뒤편의 선원보각(璿源寶閣)은 한국전쟁 중 불타 없어지는 바람에 그 터만 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두 채의 건물은 1992년 복원됐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사고는 휴가철을 맞아 붐비는 월정사 경내와는 대조적으로 인적이 거의 없었다. 사고를 관리하기 위해 지어진 암자인 영감사의 스님이 사고 옆으로 난 길을 이따금 지날 뿐이었다.

1909년까지 이곳은 철종까지의 실록 761권, 의궤 380권, 기타 서책 2,469권 등 모두 3,610권의 서책을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100여년이 지난 지금, 텅 빈 두 건물에는 사람 대신 쥐만 드나들고 있었다. 사고 2층은 들쥐 배설물 때문에 악취가 풍겼고 창문 하나는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선원보각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고 2층은 왕의 옥체와 동등하게 여기던 실록을 보관했던 곳인데…." 동행한 계명문화대 배현숙 교수(서지학 전공)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고 1층은 의궤와 관인본 등을, 선원보각 2층은 왕실 족보를 봉안한 곳이었다. 문화재청에 의해 올해부터 오대산 사고지 특별관리인으로 임명된 장영철(55)씨는 "쥐들의 집이 된 지 오래라 치워도 금방 더러워진다"며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도 않지만 역사적 현장이라고 방문한 이들도 방치에 가까운 모습에 크게 실망한다"고 말했다. 창문은 낡은 부속 때문에 떨어져나갈까 봐서 일부러 떼놓은 것이라고 했다. 장씨 외에도 월정사와 영감사가 건물 주변 제초작업 등 관리를 돕고 있지만 월정사 관계자는 "실록을 보관하거나 전시의 기능이 있다면 모를까…"라며 말을 아꼈다. 장씨는 "사고에 실록이나 의궤의 복본이라도 전시해 과거를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선 왕실의 사고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의 기록을 지키고자 전국 4곳(묘향산,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에 마련됐다. 특히 오대산 사고 자리는 물, 불, 바람의 재화를 막을 수 있는 최적의 길지(吉地)로 꼽혔다. 참봉 2명과 군인 60명, 승려 20명이 교대로 경비를 섰다고 하니 그 위상을 가늠할 만하다.

그러나 구한말부터 조선의 사고는 쇠락의 길에 들었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제 침략자들이 조선의 고서를 약탈, 반출하기 시작하면서였다. 당시 일본에서 일었던 조선에 대한 연구 붐도 이를 부추겼다. 강제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산하 이왕직(李王職)이 규장각을 비롯한 각처의 장서들을 관리하면서 각종 기록과 서적의 반출에 더욱 가속도가 붙었다. 일례로 현재 일본 교토대 부속도서관이 소장한 '가와이(河合)문고'는 1908년 정족산 사고를 약탈한 가와이란 인물이 빼돌린 조선 고서들로 채워졌을 정도다.

오대산 사고도 비극을 피해갈 순 없었다. 1913년 일본 학습원대학의 만주사 전공 교수로 있던 시라토리 구라기치(白鳥庫吉)는 조선왕조실록을 연구 자료로 요청했다. 이듬해 3월 3일 총독부 직원과 평창군 서무주임 오케구치(桶口), 그의 조선인 앞잡이 조병선이 이곳에 들이닥쳤다. 월정사 사적기는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고 그 수난을 기록하고 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반출된 실록 788권의 대부분이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것. 학자들이 빌려간 74권만이 남아 고작 27권이 9년 후 경성제대로 돌아왔을 뿐이다. 게다가 조선왕실의궤는 1922년 조선총독부가 반출했다는 내용만 전할 뿐 일본 황실 내 도서관으로 흘러간 경위조차 베일에 싸여 있다.

이후 오대산 사고의 상황은 갈수록 나빠졌다. 1934년 이곳을 찾았던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은 "사람 없는 곳에 담벽은 흩어지고 기와도 떨어진 소름 끼치는 건물"이라고 한탄했다. 한국전쟁 때는 국군이 인민군의 은신처로 사용될 것을 우려해 불을 질렀다고 전해진다. 배 교수는 "복원 후에도 고시생들이 취사도구까지 가져다 놓고 기거하고 있었다"면서 "지금은 양호한 편"이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오대산 사고는 2004년 민간단체인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가 조직되면서 다시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단체는 2006년 도쿄대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권을 서울대에 기증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당시 환수 운동을 주도했던 혜문 스님은 2006년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를 재조직해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는 지난달 23일 일본 총리실에 의궤 반환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환수위가 반환을 요구하는 의궤는 오대산, 태백산 사고 등에 보관되던 72종. 2002년에야 존재가 확인된 것들이다. 그 중에는 명성황후 국상 기록인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와 고종 13년 옥새를 새로 제조하는 과정을 담은 '보인소 의궤' 등도 있다. 혜문 스님은 "일본 국왕의 거처에 있는 조선 왕실의 기록문서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른 어떤 문화재의 반환보다 정치적 의미가 크다"고 강조했다.

현재 일본에 있는 한국 문화재는 파악된 것만 6만1,409점에 이른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해외 소재 우리 문화재는 10만7,857점(2010년 1월 기준). 절반 이상을 일본이 빼앗아간 셈이다. 물론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이 정도다. 일제강점기에 전국적으로 자행됐던 매수 및 도굴과 약탈, 광복 후에도 밀항 등을 통한 집요한 문화재 빼돌리기를 감안하면 재일 한국 문화재의 실제 규모는 가늠조차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물론 일본에 문화재 약탈의 책임을 물을 기회는 있었다. 우리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을 체결하면서 일부 문화재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반환 규모는 1,432점, 그것도 '기증' 형태였다. 이후 문화재 청구권은 사실상 소멸됐다. 배 교수는 "실록이나 의궤처럼 국가 소유가 명백한 자료는 다른 것에 비해 반환을 요구할 명분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최근 일본 정부는 궁내청이 소장한 조선왕실의궤와 제실(帝室) 도서 등 일부 문화재의 반환을 비공식적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에는 '사과의 의미가 담긴 반환'의 형태로 우리 문화재를 되찾기를 기대하면서, 을씨년스러운 오대산 사고지로부터 발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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