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_세계일보] 조선왕조실록 보존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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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8-03-13 09:11 조회11,948회 댓글0건본문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⑧ 조선왕조실록 보존의 지혜
사고에 분산보관… 사고 철저 대비… 사고 빛났다
- 지난 2월 발생한 숭례문 화재로 온 국민이 슬퍼했다. 임진왜란과 6·25전쟁과 같은 국난에도 꿋꿋하게 지켜왔던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일순간에 무너졌다. 그날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이들의 슬픔과 분노는 컸다. 우리 시대에 최고의 문화재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오랜 기간 커다란 충격으로 자리할 것이다.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역시 커다란 위기를 겪은 적이 있다. 다행히 위기의 순간에서도 실록을 보존하고자 했던 당대인들의 헌신적 노력 덕분에 현재까지 안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우리 후손들이 실록을 온전히 전수받고 이를 통하여 조선시대 삶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조상의 지혜와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역사 속에서 실록을 지켜온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본다.
역대 왕의 행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조선왕조실록은 1대 태조에서 25대 철종에 이르는 472년(1392∼1863)간의 기록을 편년체로 서술한 조선왕조의 공식 국가기록이다. 정족산본 완질은 1707권 1188책에 이르는 방대한 기록으로 조선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법률, 사상, 생활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다.
◇2006년 서울대 규장각에서 열린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인수인도식이 끝난 뒤 정운찬 전 총장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사고본을 둘러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조선시대 25대 472년(1392∼1863)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방대한 역사서이다. 조선시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 기록된 공식 국가기록이기도 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사후에 편찬되었다. 왕이 사망하면 임시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실록 편찬을 공정하게 집행하였다. 실록청에서는 사관이 작성한 사초(史草)와 시정기(時政記) 등을 광범위하게 수집해 실록 편찬에 착수하였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책은 편찬이 완료되면 국왕에게 바쳐졌지만 실록만은 예외였다. 실록 편찬이 완료되면 총재관이 보고한 후 사고에 바로 보관하였다. 왕의 열람을 허용하면, 실록 편찬의 임무를 담당하는 사관의 독립성이 보장을 받지 못하고 사실이 왜곡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실록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을 사관이라 칭하였다. 좁은 의미의 사관은 예문관 전임 관원인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으로 이들을 ‘한림(翰林)’이라 하였다. 한림 8원은 춘추관 기사관으로 사관이 되어 입시, 숙직, 사초·시정기 작성, 실록 편찬 및 보관을 위한 포쇄(병충해나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바람에 말리는 일로, 대개 3년에 한 번씩 함)의 임무를 맡았다.
사초는 사관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고 보고 들은 내용과 자신이 판단한 논평까지를 그대로 기록한 것으로서 역사적 사실과 함께 당대 사관들의 역사인식까지 담겨져 있다. 또한 사초는 사관 이외에는 왕조차도 마음대로 볼 수 없게 해 사관의 신분을 보장했고 자료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만전을 기했다.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 사고.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국권 상실 후 일본으로 반출돼 도쿄대학에서 보관되다가 1923년 간토대지진 때 소실되고, 일부가 반환돼 서울대학 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초는 사관들이 일차로 작성한 초초와 이를 다시 교정하고 정리한 중초, 실록에 최종적으로 수록하는 정초의 세 단계 작업을 거쳐 완성하였다. 초초와 중초의 사초는 물에 씻어 그 내용을 모두 없앴으며, 물에 씻은 종이는 재활용했다.
시정기는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서 시행한 업무들을 문서로 보고받아 춘추관에서 중요사항을 기록으로 남긴 것으로 관상감일기와 춘추관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시정기는 해마다 책으로 편집해 국왕에게 보고했으며, 보관된 시정기는 실록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실록의 내용이 풍부한 것은 시정기를 폭넓게 참고한 덕분이다.
실록은 고려시대부터 만들어졌다. 그러나 고려실록은 거란족과 몽고족의 침입 과정에서 완전히 소실돼 현재 그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이 건국된 후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 실록 편찬에 착수했다. 그리고 고려의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한 부가 아닌 여러 부를 만들어 보관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실록을 보관하는 곳을 사고(史庫)라고 하였는데 ‘역사물을 보관하는 서고’란 뜻이다. 실록을 한 군데에만 보관했다가 화를 당하면 실록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이 반영된 것이었다.
편찬이 완료된 실록은 춘추관에서 성대한 봉안 의식을 치른 후에 궁중에 있는 춘추관 사고 이외에 지방의 사고에 1부씩 보관하였다. 지방의 중심지에 사고를 설치한 것은 관리하기에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지방의 중심지에 사고를 설치하다 보니 문제도 생겼다. 사고의 화재와 도난 등으로 실록이 사라질 위험성이 계속 제기됐다. 실제 중종 때에는 성주사고에서 일하는 사람이 비둘기를 잡으려다가 성주 사고가 불에 타 실록이 없어진 일도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사고에 보관돼 있던 실록을 베껴서 다시 완성본 실록을 채워 놓았기에 큰 탈은 없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한 곳에 소재한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서울의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가 왜적의 침입으로 사라졌다. 실록이 모두 사라질 뻔한 아찔한 위기의 순간 전주 사고의 실록만이 남았다. 치열한 전쟁 통에 전주 사고 역시 영원한 안전 지역일 수는 없었다. 국가에서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못하던 시절 참봉 오희길과 유생 손홍록, 안의가 발벗고 나섰다.
위기를 감지한 이들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내장산으로 옮긴 실록을 관리하기 위해 안의와 손홍록은 교대로 불침번까지 섰다. 이후에도 실록은 전쟁의 와중에 해주와 묘향산 등을 거쳤고 마침내 강화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전체가 완전히 사라질 뻔한 위기의 시기에 안의나 손홍록과 같은 평범한 백성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 실록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전북 무주군 적상산에 있던 적상산본 실록은 6·25전쟁으로 행방이 묘연했는데, 현재 북한에서 보관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1592년의 임진왜란은 조선왕조실록의 보관 체계에 큰 변화를 주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주사고본의 실록을 제외한 모든 사고의 실록이 소실됐다. 이 결과 사고를 험준한 산지에 설치해 실록을 보다 안전하게 보관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전란을 겪으면서 산간 지역이 실록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실록을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함으로써 실록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막기는 했다. 하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했던 것이다.
광해군 시대 이후 조선의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 사고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 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 사고가 그것이다. 모든 사고를 지역별로 안배한 후에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또한 산간 사고 옆에는 수호 사찰을 두어 만일의 사태에 승려들이 실록을 지키게 하였다. 정족산의 전등사, 적상산의 안국사, 태백산의 각화사, 오대산의 월정사가 수호사찰의 기능을 하였다.
그 후 묘향산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해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의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효종 때 화재가 나면서 1660년에 인근의 정족산사고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조선 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일제 점령 시기 실록은 또다시 수난을 맞는다. 일제는 조선 최고의 문화재인 실록을 접수하여 조선총독부의 관할하에 두었다. 이후 정족산,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적상산사고 실록은 조선 왕실의 자료 보관소인 창경궁 장서각에 보관하였고, 오대산사고본 실록은 주문진항을 통해 일본의 도쿄제국대학으로 가져갔다. 일제는 영원한 식민지를 꿈꾸면서 조선의 역사까지 자신들의 역사로 만들려고 했으리라.
광복 이후 정족산과 태백산 사고의 실록은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로 이어졌다. 이후 선조의 분산 보관의 정신을 이어 태백산사고 실록은 국가기록원(부산센터)에 보관되었다. 적상산본 실록은 6·25전쟁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현재 북한에서 보관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오대산본은 일본 도쿄제대에 보관되다가 1923년 간토대지진의 여파로 788책 중 74책을 제외한 모든 책이 소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 10월 1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우리가 현재까지도 실록의 완전한 실물을 접할 수 있는 것은 전란이라는 위기의 시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백성들의 노력과 조선후기 산간지역에 사고를 설치한 선조의 지혜 덕분이었다.
실록은 정치사의 기록뿐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장금과 공길을 비롯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태종 때 들어온 코끼리, 현종 때 궁궐에 귀신이 출현한 이야기, 정조가 안경을 쓴 사실 등 생활사 관련 내용도 풍부하다. 이러한 문화의 보고(寶庫)가 사라질 뻔한 위기에서 조상은 끝내 실록을 지켜왔다.
선조의 피와 땀으로 지킨 실록과 같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무는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숭례문 화재라는 대참사를 반성의 계기로 삼아 체계적인 문화재 보존 노력을 적극 전개해야 할 시점이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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