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의 비유 (법보신문) 2012.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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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04-04 15:43 조회8,235회 댓글0건본문
이 비유는 제11 견보탑품의 운문에 나오는 비유이다.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제불 각기 보배 나무 아래 오시니 마치 청정한 연못 연꽃으로 장엄하는 것과 같으며, 그 보배 나무 아래 무수한 사자좌에 부처님 그 위에 앉으시니 광명으로 장엄하여 마치 어두운 밤중에 큰 횃불 태우는 것과 같으며, 몸에는 아름다운 향기 풍겨 시방세계 가득 채워 중생들 그 향기 맡고 기쁨 이기지 못하니 마치 큰 바람이 작은 나뭇가지를 휩쓰는 것과 같으며, 이 방편으로 법 오래 머물게 하느니라.
이 비유의 의미는 부처님께서 공덕의 향기로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것이 마치 큰 바람이 작은 나뭇가지를 휩쓰는 것과 같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혼란스러운 우리사회에 누가 공덕의 큰 향기바람으로, 지치고 힘든 시민들에게 위안과 감동을 주는 것일까? 내 머리 속에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작년 11월에 고인이 된 박병선 박사와 현재 문화재 제자리 찾기 사무총장인 봉선사 혜문 스님이다.
고 박병선 박사는 우연히 일하게 된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지하에서 먼지 속에 덮인 ‘외규장각의궤’를 발견하고 그 이후 프랑스 국립도서관 곳곳을 구석구석 뒤져 흩어져 있던 297권을 모두 찾아 정식으로 문화재 반환을 요청한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는 어려워 지인들과 시민단체, 정부에 도움을 청하게 된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침입하여 약탈해간 문화재가 박병선 박사 덕분에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리고 오랜 노력 끝에 결국 약탈된 지 145년만에 반환이 아닌 임대 형식으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또 1972년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동양학 대회’에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한국 것임을 밝힌다. 결국 그 일로 인해서 도서관측에서는 기밀공개의 책임을 물어 해고한다. 그 이후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우리 문화재의 고국 반환을 위해 평생을 바친다.
혜문 스님은 봉선사에서 보유하다 1950년대 분실된 ‘곤여만국전도’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2004년 일본을 방문하게 되고 1913년 월정사에서 약탈해 가져간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일부가 동경대 도서관 귀중서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혜문 스님은 환수위원회를 구성하여 2006년에 47책이 반환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또 1922년 조선총독부가 약탈해 일본으로 가져간 ‘조선왕실의궤 환수의원회’를 구성, 2006년부터 5년 넘게 일본을 40여 차례 이상 방문하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끈질기게 반환 운동을 전개한다. 결국 지난해 12월6일 일본 궁내청이 소장하던 ‘조선왕실의궤’ 등 우리 도서 150종 1205책을 90여년 만에 반환받게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고려는 개국 직후부터 사관을 두고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고 고종대인 1227년부터 ‘명종실록’ 한 부를 수도인 개경과 함께 해인사에 보관해 왔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으로 사대사고 가운데 전주사고본만 남는데, 인조 이후의 실록은 4부를 작성하여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했다. 네 군데 사고의 실록은 조선시대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다. 인조 때에는 ‘실록’을 비밀리에 간직하던 경상도 봉화의 각화사, 전라도 무주 적상산성의 안국사, 강릉의 월정사, 강화도의 전등사 등 네 절의 주지에게 실록수호총섭(實錄守護摠攝)이라는 관직을 주고, 위전(位田)으로 경제적 지원을 하도록 예조(禮曹)에 명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보호하도록 한다. 조선 후기 4대 사찰 사고들의 건축양식을 보면,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2층 누각식의 기와집 건물 두 동을 세웠는데, 하나는 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또 하나는 선원각(璿源閣)이었다. 사각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선원각에는 ‘왕실의궤’가 보관되었다. 적상산 사고에는 승군이 20명 내외, 정족산 사고에는 50명, 오대산 사고에는 20명이 배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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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 스님 법화경 연구원장 freewheel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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