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조선왕실의궤 반환 주역 혜문 스님(신동아)_2011.06.2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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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1-06-28 09:34 조회10,403회 댓글0건본문
경기도 남양주시 봉선사는 국립수목원에 이웃해 있다.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절 숲 속, 요사채에서 혜문 스님(38)을 만났다. ‘洗心(세심)’이라고 적힌 현판 아래로 발을 드리운 그의 방. 문지방을 넘어서려는데 흠칫, 숨이 멎는다. 시선이 닿은 곳에서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형형한 눈빛을 내뿜고 있다.
“북한에서 선물받은 그림이에요. 그쪽 화풍이 워낙 사실적이죠.”
놀라는 품을 느꼈는지 방 주인이 ‘하하’ 웃는다. 그가 등지고 앉은 벽면 가득, 커다란 호랑이 그림이 기자를 내려다보고 있다.
“저기 걸어놓은 건 호랑이 이빨입니다. 그 옆은 발톱이고요. 지금까지 실물을 보신 적은 없을 거예요.”
엄지손가락보다 굵은 짐승 송곳니, 날카로운 발톱. 이건 진짜다. 그 옆으로 작은 호랑이 조각상 한 개와 다기 한 벌이 있다. 몇 안 되는 소지품에서 사는 이의 성정이 묻어난다. 이분, 만만치 않을 게 분명하다. 그동안 들어온 소문처럼.
혜문 스님은 5월 말 우리나라로 돌아오는 조선왕실의궤 반환 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 사무처장으로 4년간 일본과 줄다리기를 한 끝에 일왕궁 궁내청이 갖고 있던 조선 책 150종 1205책을 돌려받기로 한 게 4월 말의 일이다. 2006년에는 일본 도쿄대에 소장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대로 찾아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일이다.
그러나 그를 문화재 환수 운동가라고만 부르기엔 좀 부족함이 있다. 산중 절집에 호랑이를 두고 사는 이 승려는 그동안 이외에도 꽤 많은 일을 해왔다. 지난해 초 그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보관 중인 조선 기생 생식기 표본 폐기 소송을 냈다. 망자에 대한 인권 침해라는 이유에서다. 몇 달 후에는 널리 알려진 슈베르트 가곡 ‘숭어’ 제목이 실은 ‘송어(Trout)’라며 교과서 정정 신청을 냈다. 또 몇 달 후부터는 명성황후가 생전에 사용하던 표범 양탄자가 6·25전쟁 이후 자취를 감췄다며 문화재청, 국가기록보존소 등에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결국 기생 생식기 표본은 폐기됐고, 교과서의 ‘숭어’는 올해부터 ‘송어’로 고쳐졌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은 표범 48마리의 가죽을 이어붙인 조선시대 대형 양탄자를 소장하고 있음을 고백했다. 그러니 이 승려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하고 싶은 일은 꼭 하고, 잘못됐다 싶은 건 꼭 문제 삼고, 궁금한 건 꼭 물어보는 사람?
파사현정 환지본처
제법 많은 봄비가 쏟아진 이날도 그는 서울의 한 재판정에 서고 돌아온 참이었다. 이번엔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 있는 나무가 문제다.
“현충사가 어딥니까. 이순신 장군 영정을 모신 곳이잖아요. 그런데 거기 일왕에 대한 충성을 상징하는 금송이 있는 겁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문화재위원회에 뽑아달라고 진정을 냈더니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심은 나무라 못 옮긴다는 거예요. 문제 있는 건 아는데 대통령 나무라 안 된다니…. 하는 수 없이 행정소송을 냈지요.”
가방에서 ‘현충사 금송존치결정취소’를 구하는 소송 준비 서면을 꺼내 보인다. 스님에 따르면 금송은 현충사 본전 왼쪽 30m 지점에 있다. 왜색 짙은 나무라 식재 후 이미 여러 차례 논란이 됐고, 노태우 정부 시절에는 ‘본청 밖으로 옮기라’는 지침이 내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 심은 나무를 어떻게 감히…’하는 ‘관습법’ 탓에 번번이 그 자리에 살아남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지만, 현충사 정원이 일본 교토 니노마루 정원과 판박이 아닙니까. 심지어 현충사 연못에는 일본 니가타 현에서 수입해온 비단잉어가 살고 있어요. 박정희 정부 시절 최고로 멋진 조경으로 꾸며놓는다고 한 게 그렇게 된 거죠. 문화재위원회에서도 거기 조경이 문제 많다는 걸 다 인정하는데 그나마 뽑기 쉬운 나무까지 그대로 두겠다니, 이거 코미디 아닙니까, 코미디.”
‘하하하’ 웃는 소리가 문지방을 넘는다. 목소리가 크다. 말하는 속도도 빠르다. ‘스님’ 하면 떠오르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아무래도 딴판이다. 수시로 ‘하하’ 소리를 내어 웃는 것도 그렇다. “딴 건 몰라도 나무만큼은 본청 밖으로 옮겨야죠.” 힘주어 말하는데, 얼굴과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하다. 그가 ‘타고난 싸움꾼’으로 불리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뭐든 잘못을 발견하면 고치려고 나서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지적을 상대방이 정당한 이유 없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
“지금은 그냥 두겠다는데, 옮기나 안 옮기나 끝까지 해보죠. 인생 길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러니 이 승려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냥 중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불교가 그런 겁니다.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됨을 깨뜨리고 바른 길을 보여주는 거요. 금강경에 환지본처(還至本處)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파사현정을 해야만 환지본처가 가능합니다.”
‘하하하’ 다시 웃는다. 말하자면 그의 모든 행동은 이른바 ‘중노릇’이다. 1998년 출가한 그가 사회적으로 ‘파사현정’을 시작한 건 2005년부터다. 봉선사 총무과장으로 있던 시절, 말사인 내원암에 토지 반환 청구 소송이 들어왔다. 고소인은 친일파 이해창의 후손. 일제강점기에 암자 일대 땅을 소유했는데 6·25전쟁으로 등기부가 소실돼 국가가 소유권을 가져갔으니 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알아보니 그 땅은 일제 총독부가 친일의 대가로 무상 임대한 터였다. 규모가 15만8700m²(약 4만8000평)에 달했다. 순순히 돌려주기엔 마뜩지 않았다. 그때부터 ‘파사(破邪)’를 시작했다. 친일파의 재산권 행사가 타당한지 언론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재판부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냈다. ‘현정(顯正)’도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환수특별법’ 제정 운동을 펼친 것. 세간의 관심이 뜨거워졌고, 그해 12월 관련법이 만들어졌다. 이듬해 법원도 판결을 통해 내원암의 손을 들어줬다.
우연, 인연, 운명
불시에 벌어진 소유권 분쟁을 친일 재산 환수 문제로 확대시켜 사회 변화까지 이끌어내다니, 애초부터 수행에 관심을 둔 승려는 아니었던 것 아니냐고 질문을 던졌다.
“산문(山門) 들어오면서 ‘나는 이런 일을 해야지’ 마음먹는 승려가 누가 있겠어요. 저도 출가하고 한동안은 공부만 했습니다. 그러다 2002년 부산 한 선방에서 갑자기 고막이 터져버렸지요. 절집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인데, 뇌 활동이 극도로 활발해지면 에너지가 폭발해 사고가 나는 겁니다. 일종의 종교 체험 같은 거예요. 그날 이후 한동안 광인처럼 살았어요.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죠.”
방 밖 출입조차 않고 책에만 매달리는 그를 보고 노승들은 ‘식광(識狂)났다’며 걱정했다. 실제로 그는 점점 광인이 됐다. 혜문 스님은 “봉선사가 내 출가본찰인데 다른 스님들이 함께 못 지내겠다고 해서 규모가 작은 양주 회암사로 쫓겨나다시피 옮겨갔을 정도”라고 털어놨다.
▼ 뭐가 어땠길래 ‘광인 같다’는 말씀을 들으신 거예요?
“광인 같은 정도가 아니라 진짜 광인이었어요. 절 안에서 이런저런 소동도 좀 벌이고….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긴 뭣한데, 광인이 원래 세상하고 정상적인 소통을 못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렇게 완전히 제 세계에 빠져 사니까 다른 스님들이 좀 저를 겁낸 거죠. 곁에 두고 보기에 불안했나 봐요.”
▼ 회암사에서 수행하며 다시 본모습을 찾으신 거예요?
“아니요. 저 지금도 제정신 아니에요.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일왕 소유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하고, 도쿄대 가서 조선왕조실록 내놓으라고 그러겠어요? 저말고는 그런 사람 한 명도 없었잖아요. 지금도 가끔 노스님들이 저 보면 ‘저놈은 아직 제정신 안 났다’고 하십니다.”
그가 봉선사로 돌아온 건 2004년 은사인 철안 스님이 주지로 취임하면서다. 봉선사는 조계종의 교구 본사(本寺)로 경기 북부지역에 있는 조계종 사찰들을 관할한다. 80여 개 말사(末寺) 가운데 문화재를 보유한 전통 사찰이 27개. 철안 스님은 그에게 이 전통 사찰들의 토지와 문화재 현황을 조사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가 처음 일제강점기와 불교 문화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꽤 오랜만에 이뤄진 전수조사였는데 과거 기록과 실제 소장 상황이 많이 달랐어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면서 우리 문화재 가운데 상당수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숙종이 봉선사에 맡겨 관리하던 당대의 세계지도 곤여만국전도는 일본 쪽으로 반출된 흔적이 남아 있더군요. 문화재의 행방을 좇으려면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우연이다. 그런데 이후 그에게 인연의 고리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해 봄 혜문 스님이 교토 어학연수 길에 오르면서부터다.
문화재 제자리 찾기
“오늘 오신다고 해서 이거 꺼내놓았어요. 이게 제 운명을 바꾼 책이에요.”
혜문 스님이 책상 위에서 책을 한 권 집어 든다. 일본어를 막 배우던 시기, 교토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쓰에마쓰(末松保和)의 ‘청구사초(靑丘史草)’다. 이 중 ‘이조실록고략청(李朝實錄考略靑)’ 단원에 조선시대 오대산 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현재는 도쿄대에 소장돼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기자는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까막눈이지만, 한자로 쓰여진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도쿄대’ 등의 단어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혜문 스님도 그랬다. 막 봉선사와 말사들의 문화재 현황을 점검하고 왔던 터라 실록이 어떤 경로로 도쿄대까지 넘어온 걸까 궁금증이 일었다. 일본에 있는 김에 현지 조사를 시작했다.
조선 왕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후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 기록을 지키고자 전국 4곳(묘향산, 정족산, 오대산, 태백산)에 사고를 마련했다. 특히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 승려들이 수호 책임을 맡은 곳이었다. 당시 정부가 사고 관리를 맡기며 월정사 측에 토지와 급료를 지급한 기록, 임명장을 수여한 기록 등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이 되면서 이 사고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는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제 침략자들이 조선 연구를 이유로 각종 고서를 약탈, 반출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땅 승려들이 이를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월정사 사적기는 “1914년 사고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제국대학으로 직행시켰다. 간평리의 다섯 동민이 동원되었는데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를 끝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사를 계속했다. 반출된 실록 788권 대부분이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소실된 사실이 밝혀졌다. 학자들이 대출해갔던 74권만 화를 피했고, 이 중 27권은 반출 9년 뒤 경성제대로 돌아왔다.
“우리의 국보가 아무 이유 없이 외국 땅에 실려 갔다가 사라져버린 것 아닙니까. 게다가 그게 우리 불교가 지켜야 했던 유물들이었고요. 남은 것이라도 어떻게든 찾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6개월 일정의 연수가 끝난 뒤엔 한국에 돌아와 학자와 문화 정책 담당자들을 찾아다니며 환수 방법이 없을지 의견을 구했다. 이 과정에서 일왕궁 궁내청에 역시 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실의궤가 소장돼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조선왕실의궤는 1922년 조선총독부가 반출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어떤 경로로 일본 왕실 내 도서관까지 흘러갔는지조차 알 수 없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팠다. 문화재를 있어야 할 곳, 제자리에 두고 싶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 내 문화재에 대한 반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것이다.
著者 乞正
“그런데 이것 좀 보세요. 여기 재미있는 글씨가 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이어가던 혜문 스님이 다시 ‘청구사초’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표지 바로 뒷장을 열어 기자 앞에 내민다. 단정한 필체로 ‘著者 乞正(저자 걸정)’ 네 글자가 적혀 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저자가 공손히 바로잡음을 구한다? 네 자의 의미는 대략 그렇게 풀이됐다.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네. 이 책이 저자가 지인에게 선물한 초판본인 것 같아요”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말하자면 이렇다. 저자는 이 책을 펴낸 뒤 지인에게 선물하며 맞춤법 같은 오류가 있으면 바로잡아달라는 뜻으로 ‘저자 걸정’ 네 글자를 적어 넣었다. 그런데 그 책이 교토 고서점에 흘러들어가 우연히 일본 내 우리 문화재 현황을 궁금해하던 한 승려의 손에 들어갔다. 승려는 책 앞장 ‘저자 걸정’을 본 순간 생각한다.
“이건 이 책에 적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으라는, 나를 향한 메시지가 아닐까. 우리나라 국보로 소중히 간직됐어야 할 조선왕조실록이 일제 총독부에 의해 도쿄대에 옮겨져 여전히 제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 역사의 과오를 바로잡으라고 하기 위해, 내가 지금 일본에 와 있고 이 책을 만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우연은 인연이 되고, 다시 운명이 됐다. 혜문 스님은 2004년 여름, 이 책을 만난 날을 ‘내 인생이 바뀐 날’이라고 회고한다. 그가 “절대 못 찾아온다”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무릅쓰고 조선왕조실록반환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해 일본으로 반출된 우리 문화재가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혜문 스님이 2007년 일본 국회의원에게 부탁해 문부대신에게 대정부질의를 부탁했을 때 나온 답변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 약 30만점 될 것으로 본다”였다.
“그런데 한일협정으로 우리나라에 돌아온 문화재는 1432점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끝내는 게 말이 되나 싶었어요. 마침 그동안 일부만 공개됐던 한일협정 내용이 2004년 완전 공개됐습니다. 우리가 돌려받은 문화재가 도대체 뭔지 세부 항목을 살펴봤지요.”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만큼 깜짝 놀랐다. 짚신, 막도장, 우체부 모자 같은 것들이 문화재 항목에 버젓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서울 종로 조계사 앞 서울우정박물관에서 전시까지 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일본에 두고, 짚신을 받아온 협정을 그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문화재를 찾아와야 한다는 결의가 굳어졌다. 그러던 차에 예의 친일파 토지 소송까지 제기됐다. 이어지는 인연을 보며 그는 “이 일을 하기 위해 내가 산문에 들어선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내원암 소송을 마무리한 뒤 그는 본격적으로 조선왕조실록 환수 운동에 뛰어들었다.
갖고 있을 자격
“한일협정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일체의 소유권 및 청구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문화재 전문가들의 논리를 깨기 위해 당시 오대산 사고 관리책임자였던 월정사 주지스님을 찾아갔다. 승려의 문화재 점유와 관리권한을 기초로 문제를 제기하자고 설득했다. 월정사, 봉선사 주지 등 불교계가 그의 의견대로 도쿄대를 압박하기로 뜻을 모았다. 친일파재산환수특별법 제정 당시 힘을 모았던 구리지역 시민 모임 ‘문화재 제자리 찾기’를 기초로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환수위)도 조직했다. 혜문 스님은 2006년 3월 환수위 회원들과 도쿄대 관계자를 처음 찾아간 날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고 했다.
“바들바들 떨더라고요. ‘올 것이 왔구나’ 이런 분위기예요. 그쪽 반응을 보고 ‘아, 이거 크게 고생하지 않고 돌려받을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도쿄대가 대학이잖아요. 그래도 학자적인 양심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협상은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첫 만남 자리에서 도쿄대가 오대산 사고본을 약탈해간 경위, 그것이 왜 불법인지에 대한 증거 등을 제시했고, 5월30일까지 반환 입장을 내놓지 않으면 월정사를 원고로 도쿄지방재판소에 동산 인도 청구의 소를 제기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는 제출할 소장의 내용까지 전달했다. 도쿄대는 결국 5월30일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대로 인도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왔느냐고 많이 물어봤어요. 1965년 협정 이후 문화재 환수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무슨 수를 썼냐는 거지요. 저는 ‘가서 달라고 하니 줍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저는 조약 내용 그런 거 잘 몰라요. 하지만 ‘당신들이 그거 왜 갖고 있습니까? 우리나라 왕실 일기장이 왜 도쿄대에 와 있습니까?’ 물을 수는 있잖아요. 그렇게 물으니 얼굴이 벌게지더라고요.”
혜문 스님은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 얘기를 꺼냈다. 임금님이 벌거벗은 걸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어린이가 눈에 보이는 대로 진실을 말했을 때, 당당하던 임금은 얼굴을 붉히고 사람들은 비로소 크게 웃을 수 있게 되지 않는가.
“그들이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이걸 가질 자격이 있나. 거기에 법, 외교협정 그런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아 이거 우리 거 아니네. 그래 돌려줄게’ 이건 양심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딱 세 번 만나고 조선왕조실록 찾아온 거지요.”
“중이 염불이나 하지”
실록 환수 뒤엔 바로 일왕궁에 있는 조선왕실의궤 환수 운동에 뛰어들었다. 민간 대 민간 관계가 아닌, 일본 왕실 소유 문화재를 찾아오는 일이라 간단치는 않았다.
“궁내청이 이른바 천황궁 안에 있잖아요. 일본 사람들한테 천황은 신이거든요. 그 안에 있는 걸 찾아오겠다고 하니까, 그것도 일개 승려들이 그러고 다니니까 어차피 안 될 일인데 중이 이름 알리려고 쇼 한다는 사람이 많았죠. 의궤가 일본에 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건 2001년이에요. 하지만 그때 학자들이 ‘총독부의 합법적인 기증으로 갔기 때문에 반환 요구는 할 수 없다’고 해서 계속 방치돼 있었던 거죠. 조선을 불법적으로 지배한 총독부가 합법적으로 우리 문화재를 어딘가에 기증하는 게 말이 되나요. 법률이나 외교 아닌 양심을 갖고 생각해야 할 문제 아닙니까. 의궤도 월정사가 관리권한을 갖고 있었으니 또 한번 스님들이 나서게 된 겁니다.”
또 하나, 그가 농담처럼 덧붙인 설명은 “일본 우익이 스님은 못 죽인다더라”였다.
“일본에선 왕궁 쪽에 손가락질만 잘못 해도 피살당하는 경우가 있대요. 그런데 우리는 왕실이 가진 물건을 내놓으라 할 거잖아요. 변호사를 선임하고도 전면에 못 내세웠어요. 혹시라도 피해가 갈까봐 다 제가 움직였지요. 그나마 다행인 게, 예전에 오다 노부나가가 승려들을 불태워 죽이고 자신도 불타서 죽은 뒤로 우익들 사이에서 승려는 죽이지 않는 전통이 생겼다더라고요. 하하하.”
그는 실록을 찾아올 때처럼 일본 곳곳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양심’과 ‘자격’을 이야기했다. 이 운동을 진행한 지난 4년 동안 일본을 찾은 횟수가 40회가 넘는다. 그 과정에서 일본 국회의원과 시민단체들이 혜문 스님의 뜻에 동참했고, 지난해 8월10일 간 나오토 일본 총리는 한일 강제병합 100년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가 초래한 다대한 손해와 아픔에 대해 …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며 “일본의 통치기간 조선총독부를 경유해 반출돼 일본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조선왕실의궤 등 한반도에서 유래한 귀중한 도서를 한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가까운 시일에 인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의궤가 5월 말 한국에 돌아온다.
일본 최고 두뇌 집단 도쿄대를 상대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오고, 일본 권력 중심 일왕궁에서 조선왕실의궤를 들고 왔으니 더 이상 거칠 것이 없다. 혜문 스님은 실록이 돌아오자마자 의궤 환수 절차를 시작한 것처럼, 이번에도 바로 다음 문화재 환수 운동을 시작할 생각이라고 했다. 목표물은 도쿄 시내 오구라 호텔에 있는 고려시대 문화재 ‘평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이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석조 문화재로 꼽히는 이 탑은 일제강점기 남선합동전기회사 사장을 지낸 오구라 다케노스케가 일본으로 반출한 1000여 점의 문화재 가운데 하나로 국보급 유물이다. 이 탑의 환수를 위해 북한쪽 불교문화재 관리권을 갖고 있는 조선불교도연맹으로부터 위임장도 받아두었다. 일체의 법률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이로써 문화재 환수 운동은 남한과 일본 사이의 문제에서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문제로 확대됐다.
“5월 중순 도쿄에서 조선왕실의궤 환수 기념 파티를 엽니다. 일본에서 우리를 도와준 분들을 초청해 여는 행사인데 장소를 오구라 호텔로 정했어요. 일본 국회의원들까지 다 모인 그 자리에서 호텔 매니저에게 위임장을 전달할 겁니다. 어차피 주실 거, 복잡하게 고민하지 말고 빨리 주세요 해야죠. 하하하.”
또 다른 싸움을 앞둔 그는 즐거워보였다.
▼ 스님이 너무 싸운다는 생각 안 드세요?
“원래 승려라는 게 마음속에 칼을 갖고 사는 직업 아닙니까. 절 앞에 있는 건물을 심검당이라고 불러요. 칼을 찾는 곳이라는 뜻이죠. 저는 그 서슬 퍼런 칼날로 세상의 잘못된 단면을 잘라갈 겁니다. 임금님한테 당신 벌거벗었다고 말하고, 파사현정 환지본처를 실천할 거예요. 저는 제가 싸움꾼인 게 자랑스럽습니다.”
절집에서 그를 만나고 며칠 후, 서울 조계사 앞에서 스님을 다시 만났다. 오구라 호텔 파티 준비로 서울에 나온 그는 일본 아사히신문 기자를 만나 ‘평양 율리사지 팔각오층석탑’ 반환 문제에 대해 인터뷰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흘 뒤, 그 기사가 아사히신문에 보도됐다. ‘양심’과 ‘자격’을 얘기하는 그의 싸움은 이렇게 다시 시작됐다.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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