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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의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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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수동자 (121.♡.203.68) 작성일08-11-05 17:59 조회8,0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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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의 그물 설악산을 오른다고 치자. 외설악에서는 내설악이 보이지 않는다. 외설악이 보이는 지역에서는 내설악은 숨어있고, 내설악에서는 외설악이 숨는다. 그렇다고 외설악이 숨을 때 외설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설악이 숨을 때 내설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나타날 때나, 서로 숨을 때, 내설악은 외설악을, 외설악은 내설악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사실 내설악이 있으니 외설악이 있고, 외설악이 있느니 내설악이 있는 것. 내(內)가 있으니 외(外)가 있고 외(外)가 있으니 내(內)가 있다는 말을 뒤집으면, 내(內)가 없으면 외(外)도 없고 외(外)가 없으면 내(內)가 없는 쌍조(雙照)가 일어난다. 이 말은 외설악이 있음으로 내설악이 있고 내설악이 있음으로 외설악이 있음이고, 내설악이 없으면 외설악은 없고, 외설악이 없으면 내설악이 없다는 게 된다. “그렇다면 외설악은 내설악?” 크게 보면 외설악이라는 녀석은 내설악과 합쳐지고, 내설악 역시 당연히 외설악과 합쳐지니 이것이 내가 외가 되고, 외가 내가 되는 자리이며, 이 자리는 내외의 경계가 무너져 내설악이 외설악이 되고, 외설악이 내설악이 된다. 이쯤 되면 내설악을 내설악이라 말할 수 없고 외설악을 외설악이라는 말할 수 없는 쌍차(雙遮)의 경지를 말하게 된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우주의 모든 존재란 사실은 서로 걸림이 없고, 방해하지 않으면 원융무애하고, 네가 나를 포섭하고 내가 너를 포섭하여 사사(事事)가 무애(無碍)하면 일체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의 근거가 되는 탓이다. 바로 인드라망의 기본이다. 나라 파르밧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나라야나 파르밧이 숨는다. 나라야나 파르밧이 등장하면서 나라 파르밧은 슬며시 사라진다. 나라가 숨을 때 나라야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나라야나가 숨을 때 나라가 없어지지 않는다. 나라와 나라야나는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걸으면서 쌍조(雙照) 쌍차(雙遮)를 곰씹으면 정말 재미있다. 가르왈 모든 봉우리가 하나가 되고, 3억3천의 힌두제신 역시 경계가 없어지며 하나가 된다. 한암선사 노래하신다. 다리 밑에 하늘 있고 머리 위에 땅이 있네 / 본래 안팎이나 중간 모두 없는 것 / 절름발이가 걷고 소경이 봄이여 / 북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네. 제석천(帝釋天)의 그물, 인드라(Indra)의 그물, 흔히 인타라망(因陀羅網)이라 부르는 것의 정식명칭은 인드라잘라(Indrajaala)며, 이에 대한 내용은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8.8.5-8,12>)]에 있다. 인드라는 건축광이다. 이에 관한 신화의 이야기를 하자면 소년으로 분장한 비슈누까지 중요 등장인물로 배역을 맡으면서 며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지새워야 한다. 허공이 그물이라네, 드넓은 방위(方位)가 그물 막대기라네. 이것으로 인드라는 적군을 잡아 물리친다네.(5) 전사(戰士)들과 함께하는 위대한 인드라의 그물은 드넓네. 그것으로 모든 적들을 잡네, 하여 그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네.(6) 영웅인 인드라여! 수천명에 의해 존경 받으며 수백가지 능력을 지닌 그대의 그물은 드넓다네. 그것으로 몰아 잡아 군사를 부리어 인드라는 수백, 수천, 수십만, 수천만 적군을 잡아 죽이네.(7) 이 큰 세상은 위대한 인드라의 그물이네. 인드라의 그 그물로 나는 모든 적들을 어둠으로 감싼다네.(8) (중략) 싸아드흐야들은 그물의 한쪽 막대기를 들고 힘차게 가고, 루드라들은 한쪽을, 와쑤들은 한쪽을, 아아디뜨야들은 한쪽을 드네.(12) 한국 외국어대학 인도어과의 임근동 교수의 번역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서 인드라는 여러 곳에서 샤끄라(shakra. 힘을 가져오는 자)로 나오지만 임교수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그냥 모두 인드라로 옮겼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인드라잘라, 인드라망은 인드라가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무기로 상상불가의 어마어마한 크기다. 허공에서 온갖 방향, 온갖 차원으로 펼쳐져 온 세상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뒤덮는 그물로 안에 한 번 갇히면 도저히 빠져 나올 길이 없는 무기다. 사방 네 군데에 손잡이 막대기가 있어서 각각의 용사들이 네 군데의 손잡이 막대기를 잡고 펼치어 적군을 사로잡는 그물 무기다. 이 그물을 펼치는 방법은 열두번 째의 만뜨라를 통해 짐작이 가능하지만, 사용법은 물론 전개되는 순서를 알 수 없다. 이 문장들을 보면 우주에 대한 구조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속한 우주는 몇 차원입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3차원이니 4차원이니 이야기하면 완벽 구세대다. 최근 학설,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에 의한다면 10내지 11차원이라고 한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11차원의 M이론’이다. 인드라망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모르지만 [아타르바 베다]에 어떤 단서가 숨어 있는 듯하다. 가로, 세로, 높이, 시간에 관한 차원을 구성하는 네 명의 용사로 하여금, 혹은 중력, 전기자력, 약력, 강력, 우주의 4가지 힘에 의한 전개. 어느 누구도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이 [아타르바 베다]의 만뜨라를 앞에 놓고 깊은 명상에 들어가면 설명할 수는 없어도 우주 본질을 엿볼 수 있겠다. 이 제망찰해(帝網刹海)의 망과 망의 코가 만나는 곳에는 수정이 걸려있다. 시방무수억찰토(十方無數億刹土)에 무수한 수정이 있어 상대를 서로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 투영하며 존재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가로 세로가 만나고 상하, 좌우가 만나는 곳에 맑은 수정이 있고, 나 하나를 수정 하나로 간주하면 된다. 이 유정무정의 수정 하나, 하나는 각기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으며 우주의 끝까지 빈틈없이 확장되어 있다. 하나가 흔들리거나 빛이 변하면 모두가 영향을 받는 철저한 상대성과 관계성의 상호작용이다. 수정 하나는 절대적이지만 다른 존재들과 서로 상즉상입하고 원융무애한다. 우리가 보는 개개의 존재가 서로 차별적이고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두는 꽉 짜여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此起故彼起],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此滅故彼滅]. 세상을 밝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 집에 촛불을 하나 켠다. 세상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 집 앞을 쓴다. 세상 모두가 고요하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우선 침묵한다. 일체가 일(一)에 포섭되고 일이 곧 일체가 되는 법계의 진상[一卽一切多卽一]이다. 현재의 모습은 이런 것들이 뒤얽히면서 나타난 것이며 중중무진법계연기의 표현이다. 이 개념에 의하면 ‘북경의 나비 날개짓이 뉴욕의 태풍을 부른다.’는 이야기는 전혀 새로운 학설도 아니다. 내 탁한 빛은 수정에 투과되어 옆으로, 옆으로 파동을 전한다. 그 많은 구루지들이 사부대중을 위해 설산에 앉아 만뜨라를 외우는 이유는 중언부언이다. 인드라망이 시작도 끝도 없이 전개되어 있는 세상.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제는 묻는다. “우주를 보기 위해 나를 들여다본다는 이야기는 맞는가, 틀리는가?” “그렇다면 어디가 중심인가?”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가?” “세계의 중심기둥은 어디에 세울까?” “무엇이 사천왕인가?” “나를 변하게 하는 것은 나인가 혹은 너인가?” “나는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혹은 너희가 나인가?” 산을 걸으면서 느끼는 점은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걷는 자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인드라 구슬의 중심점이 되는 셈이다. 아름다운 풀들과 거침없이 흘러가는 강물, 사면을 장식하는 야생화, 갑자기 다가오는 사슴 떼들. 그리하여 너희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산을 걸으면서 내 주옥 수정을 들여다본다. 무엇이 보일까? 내 수정구슬 안에 눈동자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히말라야다. 차가운 회색바위와 골을 덮고 있는 하얀 빙하들과 그 사이에 불쑥 솟아오른 백색봉우리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어쩌면 맑음을 해하는 한갓 벽(癖)이 아닌가." 탄식도 잠시 다시 깊은 풍경 안으로 녹아든다. http://www.himal.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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