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는 100가지 명상-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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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문수동자 (121.♡.203.118) 작성일08-11-01 20:32 조회6,818회 댓글0건본문
마음을 다스리는 100가지 명상
인드라 초한 / 이상영 옮김
Indra Chauhan : 델리 교외의 유복한 힌두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앞날을 예견하거나 질병을 치료하는 등 기적을 행해 소문이 퍼졌으며, 미국에서 유학한 후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귀국 후 종파나 교리를 고집하지 않고 종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인도 전국의 아슈람에서 많은 사람들을 인도하고 있다.
1장
사랑의 문
* 스스로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의 반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나머지 반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 됩니다.
말은
가장 좋은 약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의 말이 상대방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낸다.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혹은 용기를 주기도 합니다.
때로는 말 한 마디가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의 빛이 되기도 하고, 이와는 반대로 무심코 던진 말이 상대방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생각 없이 한 말이 당사자에게 용기를 준다면 다행이겠지만 실제로는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말로써 타인을 죽이기도 하니 참 죄 많은 동물이지요.
사람들은 늘 남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의식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말이 심장을 찌르는 칼날이 되기도 하지요. 당신도 남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나빴거나 괴로웠던 일을 여러 번 겪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말을 내뱉기 전에 '내 한 마디가 저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을까'라고 신중히 생각하며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현대는 그렇게 여유 있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가족, 이웃, 친척들 혹은 약한 사람들에게는 평소 상대를 존중하는 말을 쓰도록 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며, 말하는 사람의 됨됨이와 인간성을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착한 사람은 좋은 말을 쓰고 악한 사람은 본성을 속이려 해도 그 말로써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값이면 말로써 절망에 빠진 이에게 희망을 주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합니다.
사람은 말로써 힘을 얻고 성장하며, 따뜻한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은 늘 인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지혜를 가집니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은 어떤 의사의 주사나 약보다 훌륭하게 사람의 마음을 치유합니다.
사랑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
자녀가 열 명이라고 애정을 10분의 1씩 나눠 주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모든 자식에게 100% 이상의 애정을 주는 법입니다.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사람이 제일 불행할 때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가 없다고 느낄 때 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느냐?'
'얼마나 사랑받느냐?'
사랑은 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깊이 또한 측량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남녀간의 사랑이든 가족의 사랑이든 인류애이든, 사랑은 말이나 형식이나 동작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존재입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부모가 숨을 거두면 자식들은 슬퍼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비록 부모가 무의식상태에 있어도 자식들은 그저 숨쉬고만 있는 부모의 존재에 애정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굶주림, 질병, 전쟁, 살육이 아닙니다.
사람이 제일 불행할 때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느낄 때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또한 자신이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여길 때입니다.
이때 인간은 가장 큰 불행을 경험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귀중한 존재입니다.
우주의 사랑은 사람 사이의 애정 혹은 인간이 삼라만상에게 주는 애정과 그 뿌리가 같습니다. 애정은 상대에게 주고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목적을 띠고 창조됐습니다.
그것은
사랑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사랑한 만큼 사랑받고 싶다.'
보답을 기대한다면 그 사랑은 투자에 불과합니다.
참사랑은 한없이 주고 또 주는 것.
至高한 사랑은 자아희생입니다.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고 또 주는 것이다.
'사랑한 만큼 사랑 받고 싶다.'
이는 욕심쟁이입니다.
인간은 독점욕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은 만족을 모르는 이상한 동물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결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이 상대방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부담을 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사랑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커다란 착각이고, 실은 빼앗기만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투자가 아닙니다. 물론 정기적금도 아닙니다.
사랑은 '전부를 잃어도 괜찮다'랄 만큼 강합니다. 자신은 전부 잃어도 좋지만 상대를 희생시키지 않으며 또한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를 파멸시키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고 또 줍니다.
자식을 열심히 공부시켜서 대학에 보내는 일만이 과연 사랑일까요. 아이가 진심으로 바라는 일이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이 당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투자일 뿐입니다.
자기의 꿈이나 장래 계획을 희생시켜도 자녀의 희망이나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일이 사랑에 더 가깝겠지요.
사랑으로 시작했지만 언젠가 투자로 바뀔지 모르니 주의하십시오.
사랑의 적은 미움이 아닙니다.
사랑의 적은 무관심입니다.
이웃의 고뇌를 동정하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 무관심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과 미움은 종전의 양면과 같다.
사랑의 반대쪽에 위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코 미움이나 증오가 아닙니다.
사랑과 미움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사랑이 지나쳐 죽도록 증오한다'라는 말은 사랑과 미움이 뿌리가 같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반대에 위치하는 것은 무관심입니다.
자신과는 관계 없다고 단정하는 일, 이것이 무관심입니다.
무관심은 무시와는 다릅니다. 무시는 증오에 가까운 것으로 사랑의 변형이며, 무관심이라는 것은 의식이 거기에 없는 것 - 생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웃의 땀과 눈물, 고심, 고생, 고민, 분노 그러한 모든 일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 일, 이것이 무관심입니다.
지구상에는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전쟁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굶주림이나 자연재해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먼 나라의 서건, 혹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전쟁이나 기아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나라에 큰 지진이 발생했기 때문에 당신의 나라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고 도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일 수 있으며 타인의 불행이 언제 나에게 덮칠지도 모릅니다.
우리 각각은 살아 있는 한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를 보살피고 있기도 합니다.
사랑하면 사랑 받습니다. 주면 받습니다.
믿으면 믿음을 받게 됩니다.
미워하면 미움 받습니다.
빼앗으면 빼앗깁니다.
의심하면 의심 받습니다.
사랑하면 사랑 받게 되고 믿으면 신임 받게 된다.
세상의 모든 현상은 작용 - 반작용입니다.
밀면 안 밀리려는 힘이 생기고 당기면 안 끌려오려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리학뿐만 아니라 사물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선진국은 개발도상국인 인도나 동남아시아, 혹은 아프리카나 남미 등의 자원을 착취했습니다. 금, 은, 석유 등의 천연자원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사람들을 신대륙에 노예로 팔아먹는 등 인간자원도 착취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개발도상국의 빈민층이 이전의 식민종주국으로 이민하고 있습니다. 선진국 정부는 그들을 몰아내려 하지 영주권을 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은 저개발국가로부터의 대량 이민에 불안해 하면서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어떤 조치도 현재의 대량 이민추세를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현재의 이민문제는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착취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애초의 원인을 만든 것이 누구입니까?
빼앗으면 빼앗기는 법입니다. 미워하면 미움을 받게 되고 의심하면 의심 받게 되는 것이 인간사회의 원리입니다.
그 반대논리도 역시 진리입니다.
주면 받게 됩니다. 사랑하면 사랑 받게 되고 믿으면 신임 받게 됩니다.
스스로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은
이미 행복의 반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나머지 반은?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면 됩니다.
마음 깊이 있는 감정을 처음부터 부정할 필요는 없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남의 실패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말해 버리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표현을 한 후에 자신이 매우 비열했다고 여기고 자포자기하거나 낙담하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을 행동화하지 않으면 좋은데 사람이란 그렇게 논리적으로만 움직이는 동물은 아닙니다.
당신도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겠지요.
인간이란 본래 그런 존재라고 여겨집니다. 사람이 질투, 선망, 분노, 배신, 모략의 감정을 나타내는 것은 솔직한 것입니다.
마음 깊이 있는 것을 처음부터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 성인군자는 없으니까요.
문제는 그런 감정을 실제 표현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부러우면 마음껏 부러워하고 마음껏 남이 실패하기를 바라도 괜찮습니다. 자신이 그런 비열한 마음을 지녔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까지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소 주위 사람들도 당신과 비슷한 감정을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십시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질투심도 사라지고 남이 실패하는 것을 발지 않게 됩니다.
모든 존재는 아름답고 일어난 일들은 모두 좋습니다.
사랑은 때로 심한 착각에 근거하기도 합니다.
無知한 것만큼
슬픈 일은 없습니다.
無知蒙昧만큼 슬픈 일은 없다.
인도의 캘커타에는 인구 1천2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중 노상 생활자가 40만 명을 넘는다고 합니다만 정확한 숫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의사의 보살핌이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길거리에서 짐승처럼 죽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양실조에 걸려서 쥐나 개미를 먹기도 하고 온 몸에 난 상처에서는 고름이 나옵니다.
불행하게 버림을 당한 사람들을 보고 '그들은 내세에 환생하기 위하여 현세에서 카르마(숙명)를 벗어나려는 것이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힌두교는 카르마를 믿는 종교입니다. 인간은 죽으면 저 세상으로 가서 다시 돌아옵니다. 선행을 많이 한 사람은 훌륭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인간으로 환생하지 못하고 저급한 짐승이 된다는 인과응보를 가르칩니다.
카스트 사회는 인과응보의 윤회사상을 기반으로 유지돼 왔습니다.
이승에서 가난하고 괴로워도 좋은 일을 하면 내세에서는 행복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같은 인과응보의 윤회사상은 이 세상에 대한 포기와 복종을 가르칩니다. 노상 생활자는 거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자신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장차 거지로 살아가는데 유리하도록' 아기의 다리나 팔을 모두 잘라 버리는 자도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주위 사람들이나 관광객들의 동정을 불러 일으키려고 일부러 더 비참한 모양으로 자신의 자녀를 불구로 만듭니다. 그들에게는 사활의 문제이니까요.
이것을 부모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무지몽매만큼 슬픈 일은 없습니다.
가족이 건강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하다고 감사해야 합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아프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가족들이
사랑으로 뭉치게 되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가정이 사랑으로 충만해 있는 것만큼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 일은 없다.
가족이 건강하다는 것, 그 이상의 행복은 없겠지요. 그 이상의 것을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안이나 고민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일이나 사업, 혹은 출세 등 세속적인 것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불치병을 앓는 가족이 있을 경우 자신의 생활은 크게 제약 받게 됩니다.
항상 가족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출장이나 여행을 결정해야 하고 때로는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도 됩니다.
가족 중에 건강치 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장애가 되는 것이지요. 가족 모두 건강하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의 절반은 얻은 것입니다.
가족들이 건강하여 걱정 없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으므로 감사해야 합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가족 중 한 사람이 아프다면........ 그 덕분에 오히려 그 가정은 아픈 사람을 중심으로 단단히 결속할 수 있습니다.
그 가정은 식구들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사랑으로 충만해 있는 것만큼 정신적인 안정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몸이 약한 사람이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사랑의 가정을 이룰 수 있게 된 점에 감사해야 합니다.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짐으로써 가정을 어둡게 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 싫은 이유는
그를 잘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사고방식이나 인간성,
더 나아가 가족 관계까지 알게 되면
이 세상에 미워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되면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
인간은 스스로 좋고 싫음의 감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감정은 일정하거나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조건이 달라지면 완전히 바뀌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으 부탁이나 지시, 명령 따위는 절대 듣고 싶지 않습니다. 이유는 그 사람이 싫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싫어하게 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사람이 자기 실수를 당신의 책임으로 떠넘긴다거나 지시가 수시로 바뀌고, 혹은 언제나 이런저런 일로 까다롭게 구는 등등 여려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진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 괴로움이나 고민을 안고 살게 마련입니다. 수완 있는 사업가나 경영자들도 사실은 돈 무제로 고생하고 있거나 집안 식구 중에 환자가 있는 등 여러 가지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근할 때 열이 높아지고 아프기 시작한 아이 때문에 고민이 돼서 기분이 나쁘고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정을 알면 싫은 사람이나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싫거나 상대하기 어려운 까닭은 마음속에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기 때문이며, 이 마음의 벽을 허물게 되면 백년간 싸워온 원수 사이라도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런 것이지요.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도 정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자연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아름다운을 창조하신 신의 위대함에
감동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한 누구든지 인생은 열린다.
낯선 이국의 도시에 비행기에서 내리면 긴장하게 마련이지만, 자연이 살아 숨쉬는 시골은 아직 넉넉합니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곳을 가더라도 자연은 살아 있습니다. 목이 마르면 과일을 나눠 받을 수 있고 천연 벌꿀도 듬뿍 받을 수 있습니다.
히마라야에서 쵸애란마를 보았을 때 신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의 이구아스 폭포, 미국의 요세미트 공원 등 일상을 넘어선 대자연의 품에 안기면 우주 속에 살아 있는 자아를 확실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서 그 자연의 은혜를 듬뿍 받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한 누구에게나 인생은 열립니다.
대자연의 법칙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한다. 이것이 대자연의 법칙을 따른 삶입니다.
세계의 최고봉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인간의 교만이나 오만은 있을 수 없으며 대자연 속에 안긴 작은 존재로서의 인간만을 볼 수 있습니다.
대자연 속에서 한 인간은 미력한 존재일 뿐이지만 이제 인류는 지구의 생명까지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숭고한 대자연을 조절하기에는인간의 지혜는 너무나 천박한 것 같습니다.
대자연의 창조주에게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이 아름다움을 창조하신 그분의 위대함을 찬양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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