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의인(義人)을 의인답게 대접하라 (10월4일-중부일보) > 작은 절 이야기

검색하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소통Odae mountain Woljeongsa

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절
작은 절 이야기

작은 절 이야기

[상원사] 의인(義人)을 의인답게 대접하라 (10월4일-중부일보)


페이지 정보

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6-10-28 10:35 조회6,729회 댓글0건

본문


우리 역사에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주인을 위험에서 구해준 가축들 얘기가 심심치 않게 전해지고 있다.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 가면 의견비와 의견동상이 있다. 장에 갔던 어떤 농부가 술이 취해 집으로 오다가 그만 개울가 잔디밭에서 누워 잠이 들었다. 때마침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잔디를 태우면서 주인을 덮치려 하자 주인을 따라 나왔던 개가 이 광경을 보고 냅다 개울로 뛰어들어 제 몸을 물에 적신 후에 불길이 일고 있는 잔디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수백 번씩이나 개울을 드나들면서 주인이 누워 자는 주변을 모두 적시자 불길이 잦아들었다. 개는 지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술에서 깨어난 주인은 더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면서 그 자리에 개를 묻어주고 자신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무덤가에 꽂아 기념해 놓았다. 몇 해가 지난 후 꽂아놓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 그래서 그 나무를 오수(獒樹) 즉 ‘개 나무’라 지은 것이 오수면 오수리라는 마을 이름으로 기념되어 오늘까지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의로운 가축 얘기로는 고양이도 있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고양이 석상에 얽힌 얘기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벌을 받아서였던가! 세조의 몸은 어느 한 구석도 성한 데가 없이 종기로 뒤덮였다. 기도라도 해서 종기를 치료해 볼까 하고 찾아간 곳이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 

어느 날 법당으로 기도하러 들어가는 순간 난데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옷자락을 붙든다. 쫓아도 달아나지 않고 한사코 붙들고 있는 것을 보고 세조가 괴이하게 여겨 명령을 한다. ‘법당 안을 뒤져 보라!’ 병사들이 뒤져본즉 과연 자객 한 명이 칼을 품고 불상이 놓여 있는 탁자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이때 세조는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보답으로 상원사에 전답을 내려주었다. 이 전답을 일컬어 묘답(猫沓) 묘전(猫田) 즉 ‘고양이 논’과 ‘고양이 밭’이라 한다. 상원사에서는 그 고양이를 기리기 위해 고양이 석상 한 쌍을 조각하여 기념비로 삼고 있다. 

의로운 가축 중에서 소를 빠뜨릴 수 없다. 

지금의 경북 구미에 사는 농부 한 사람이 암소를 데리고 밭을 갈고 있었다. 그때 별안간 호랑이가 나타나 소를 향해 덮쳤다. 농부가 이를 보고 호랑이를 쫓으려 하자 호랑이는 덮친 소를 내팽개치고 농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농부가 호랑이를 당하지 못하고 넘어지는 순간에 암소가 쏜살같이 뛰어들어 호랑이를 들이받았다. 호랑이는 피를 흘리면서 도망가다가 얼마 못가 죽었다. 농부도 호랑이에게 물린 상처가 깊어 죽게 되었다. 농부는 유언을 한다. “앞으로 소가 죽으면 내 무덤 곁에 장사 지내다오.”

농부가 죽자 소 또한 물과 여물을 일절 끊은 채 사흘 낮밤을 안절부절못하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의우총(義牛塚)과 함께 비(碑)까지 세워주었다. 1994년 선산군에서는 퇴락한 봉분에 가토(加土)를 해주고 의우도의 그림 8폭을 화강암에 새겨 묘지 뒤편에 전시하고 있다. 경북 민속자료 제106호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오수리라는 이름과 함께 의견의 동상을 세우고 임금을 살렸다고 하여 고양이 석상을 쌍으로 건립하고 의우의 설화를 의우총과 비석 그리고 그림으로 남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짐승도 그러한데 하물며 사람이랴 하는 심정으로 후세사람들에게 교훈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오래된 고전 맹자 첫머리에서도 나라에 이롭게 할 일이 무엇인가를 묻는 양혜왕에게 맹자는 인의(仁義)가 있는데 왜 하필이면 이(利)를 말하는가라고 되묻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논어에서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의(義)다. 바람직한 인간의 행동기준은 ‘의’에 있을 뿐임을 누누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견리사의(見利思義)하고 견위수명(見危授命)이라 하였다. 즉 ‘이’를 보거든 ‘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운 것을 보면 그 위태로움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 걸 각오를 하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남의 위태로움을 보고 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잃거나 상해(傷害) 입은 사람을 나라가 돌보기 위해 우리는 ‘의사상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라는 것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법만 있으면 무엇하나! 떼법만도 못한 법이 되어 보상이라야 쥐꼬리만큼 밖에 안 되는 것을! 의인이 살아야 의가 살아날 것이 아니겠는가!

김중위 전 환경부 장관


기사원문보기 http://www.joongboo.com/?mod=news&act=articleView&idxno=11091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