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④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상 (2월27일-불교신문) > 작은 절 이야기

검색하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소통Odae mountain Woljeongsa

마음의 달이 아름다운 절
작은 절 이야기

작은 절 이야기

[상원사] [이야기가 있는 조선시대 불상] ④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상 (2월27일-불교신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3-06 12:35 조회8,073회 댓글0건

본문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선재동자 같은 모습으로 표현

상원사 중창불사 회향 상징

세조 ‘불제자’로서 시주 동참

불심으로 질병치유 기원해

당나라 현장스님과 신라의 혜초스님처럼 인도로 향하던 순례승은 불교의 토착화와 함께 점차 줄어들었고,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불교 성지가 탄생했다. 인도의 불교성지가 석가여래의 일대기와 관련된 장소라면 중국과 우리나라의 불교성지는 주로 보살신앙과 관련된 곳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산악신앙과 불교가 결합되어 반야를 상징하는 법기보살이 머문다는 금강산과,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중국 오대산과 관련된 강원도 오대산이 불교성지로 유명하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원찰은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이 있는 사자암이었고, 세조의 원찰은 오대산 상원사였다. 상원사는 오대산 주봉인 비로봉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데, 중대의 석가여래 진신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을 참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현재까지 불자들이 오대산 적멸보궁을 많이 찾는 이유는 조선 왕실과의 인연이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태조와 세조가 친히 이곳을 방문했으니 그 영향은 감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세조는 1466년 상원사 중창 법회에 참석하기 위해 왕족을 비롯한 중요 대신들을 거느리고 1개월 이상 한양을 비워두고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 등을 둘러보고 양양 낙산사를 거쳐 오대산 상원사에 도착했다. 그 해 3월17일 오대산 상원사는 축제 분위기였다. 세조, 왕비, 세자, 효령대군 등을 비롯한 종친과 영의정 신숙주, 상당군 한명회 등 수많은 관료들이 중창을 축하하는 법회에 참석한 것이다. 1466년의 중창 완료 법회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문수전 문수동자상이다. 

문수보살은 선지식을 찾아 구도 여행에 나선 선재동자를 첫 번째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하는 분이다. 순례길에 나선 선재동자에게 “보살행을 아는 지혜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남쪽 승낙이라는 나라에 덕운스님이 있으니 그에게 가서 ‘보살은 어떻게 보살행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행을 닦으며, 어떻게 보현행을 빨리 성취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라”고 안내하고 있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은 구도자의 상징인 선재동자처럼 동자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세조의 등을 미는 문수동자를 표현한 벽화.

강압적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는 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문수보살의 안내로 출발했듯이 세조 역시 문수신앙처인 오대산을 찾았다. 그 앞에 동자 모습의 문수보살이 나타났다. 영험담 속의 문수보살은 어린 동자로, 때로는 나이든 스님으로 등장하고 있다. 세조와 문수동자와의 에피소드는 상원사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상원사 입구에는 세조가 몸을 씻을 때 벗었던 옷과 허리띠와 갓을 걸어두었던 관대(冠帶)걸이가 있고, 상원사 문수전에는 문수동자상이 모셔져 있으며, 세조의 등을 밀어주는 문수동자의 모습은 벽화로 그려져 있다.

세조는 몸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오대산 문수도량에 기도하러 상원사로 가던 중 계곡에서 혼자 목욕을 했다. 그때 숲속에서 놀고 있던 동자에게 자기 등을 밀어달라고 부탁했고 목욕을 마친 세조는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고 말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동자 역시 문수동자를 만났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세조는 그때 자기 몸의 종기가 나은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기뻐하였고, 장인에게 그 동자상을 조성하게 한 후 이같은 신앙 체험담이 널리 퍼지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해서 조성되었다고 전하는 상원사 문수동자상 복장에서 발견된 명주 저고리는, 종기로 시달렸던 세조가 입었던 옷으로 추정된다. 불심으로 질병을 치유하고자 기원한 세조의 간절한 심정이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상원사의 창건 시기는 신라 선덕왕 14년인 645년에 자장스님이 세웠다는 설과 성덕왕 4년인 705년에 보천과 효명이 건립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후 고려시대까지 그다지 알려진 바가 없고, 1377년 나옹스님의 제자가 선원을 중창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상원사는 조선 초 세조와 인연을 맺으면서 크게 중창되었다.

상원사 중창은 문수동자상이 조성되기 2년 전인 1464년부터 계획되었다. 세조가 중병을 얻자 그의 부인인 정희왕후는 신미스님이 추천한 상원사를 기도처로 정하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다음해인 1465년에 신미스님의 제자인 학열스님에 의해 본격적인 중창이 시작되었고, 이를 인연으로 세조가 건강을 회복하자 세조와 정희왕후는 상원사 중창에 더욱더 많은 지원을 하게 되었다. 

세조는 상원사 중창 시주를 권하는 권선문인 <어첩(御牒)>에서 자신을 ‘불제자’로 칭하고 있다. 억불숭유 정책를 폈던 조선에서 불제자라고 칭한 왕은 세조 뿐이다. 조카인 단종과 동생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죽이고 왕이 된 세조는 마음의 병과 육신의 병이 깊어지면서 불제자라고 칭할 정도로 절박한 심정으로 부처님의 힘에 의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원사 중창 권선문(어첩).

신미스님이 쓴 것으로 보이는 한문과 언해로 기록된 <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의 표지에 ‘어첩’이라는 한자 표지가 붙어있는 것은 후대에 잘못 제첩된 것으로 보인다. 이 권선문에는 250여 명에 달하는 당시의 왕비, 세자, 세자빈, 종친을 물론 내명부, 외명부의 여러 여인들과 품계 그리고 중앙과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퇴임한 수 많은 전현직 관료들이 시주자로 등장하고 있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의 복장은 1984년 7월19일에 조사되었는데, 문수동자상 발원문(1466년)과 중수기(1599년), 불경, 후령통, 후령통을 감싼 다라니가 찍힌 황초폭자, 수정 사리병과 사리, 명주 저고리 2점 등의 복장물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발원문과 중수기, 그리고 세조의 옷으로 추정되는 저고리 1점 등이 특히 주목된다. 

<문수동자상 조성발원문>에는 세조의 딸인 의숙공주(1442~1477)와 그의 남편 정인지의 아들인 정현조(1440~1504)가 지혜로운 아들을 얻기를 바라며,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불·문수보살·보현보살·미륵보살·관음보살·지장보살·16나한·제석천을 조성하여 ‘오대산 문수사’에 봉안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상원사가 문수사였는지에 대한 의견은 통일되어 있지 않지만, 대체로 동일 장소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1466년에 조성된 여러 상 가운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문수동자상 뿐이다. 

1453년에 혼인한 의숙공주에게 13년이 지나도록 자식이 없었던 것은 세조의 병 만큼이나 왕실의 근심거리였을 것이다. 문수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고자 했던 것은 고려말 공민왕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30대 중반까지 아들이 없었으나 연복사에서 문수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1691~1756)도 그의 어머니가 삼각산 문수사에서 기도하고 낳았기 때문에 이름을 ‘문수’로 지은 것이다. 

상원사 문수동자상은 1466년에 조성된 이후 1599년 5월과 1972년에 개금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경석(1595~1671)의 <상원사중수기>에는 1644년에 각해스님이 상원사 법당 등을 중수하고 7구의 불상을 개금한 사실과, 그가 상원사를 방문했을 때 중수기 현판과 문수상이 봉안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경석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민구(1589~1670)의 ‘상원사에서’라는 시에도 불상이 등장하고 있다. 

상원사 복장물(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후령통, 황초폭자, 조성기, 명주적삼).

“바위 언덕 절간에 해 질 녘이 되자/ 처마 끝 맑은 풍경 소리가 안개 속에 울리네/ 금불상 천년 후에도 망가지지 않았고/ 옥빛 탑은 만겁 전부터 오래도록 있었지/ 신령한 자취 핏빛은 등마석에 새롭고/ 잔물결 일렁이며 차가운 복룡천에 향기롭네/ 산 높아 오월에도 봄 아직 이르니/ 한 나무에 배꽃이 곱게 피었구나.” 

이민구가 말한 ‘천년 후에도 망가지지 않은 금불상’은 이경석이 보았다는 문수상으로 짐작되며, ‘만겁 전부터 있었던 옥빛 탑’은 현재 상원사 영산전 앞에 있는 석탑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상원사 문수동자상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없고, 쌍상투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이 이마 위를 덮고, 천진하면서도 통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은 신앙의 대상인 불보살상의 특징과는 달리 현실 속 어린아이 모습이다. 특히 편안하게 앉아 노출시킨 오른발에 발톱까지 표현한 것은 의숙공주 부부가 간절히 원했던 아들이자 세조의 등창을 낫게 해준 동자의 모습은 아닐까?

[불교신문3277호/2017년3월1일자] 

유근자 동국대 겸임교수   

 

 

기사원문보기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559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