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17세기 중반 불상이 계속 발견되는 조각승 (11월25일-현대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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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3-06 11:01 조회7,406회 댓글0건본문
▲ 1661년 제작 강진 무위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좌상.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
▲ 1661년 제작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
▲ 1666년 제작 군산 불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사진제공=문화재청 |
조각승 인균 계보 속한 스님
1660년대 수화승으로 활동
무위사와 상원사 불상 조성
전국서 활동한 것으로 추정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많은 조각승 가운데 몇 명의 스님이 수화승(首畵僧)으로서 제작한 불상이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이 가운데 대부분은 조성발원문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불상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나 대의 처리 등 양식사적 검토를 통하여 작가를 추정하였지만, 근래의 불상 조사가 진행되면서 복장으로 봉안하였던 조성발원문 등이 발견되어 스님의 활동이나 계보 등이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대표적인 조각승이 회감 스님이다. 스님은 5년 전만 해도 2점밖에 기년명 불상이 조사되지 않았지만, 계속적인 학술조사가 이어지면서 기년명 불상 1점과 관련 기록 2건이 추가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조화승으로 활동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회감 스님은 인균(印均) 스님의 계보를 잇는 작가로, 1640년부터 1650년대까지 많은 불상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까지 조각승 회감 스님이 태어난 때와 승장(僧匠)이 된 배경에 대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회감 스님과 관련된 문헌자료를 통해 활동 시기와 계보를 밝히는 것이 가능하다. 스님이 수화승으로 활동하기 이전 불상 제작에 참여한 가장 빠른 작품은 1633년에 수화승 인균 스님과 조성한 전북 김제 귀신사 영산전 목조삼존불좌상과 나한상이다. 이 때 회감 스님은 12명 가운데 5번째 언급되어 1630년대부터 조각승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귀신사 응진전 불상을 수화승으로 조성한 인균 스님은 17세기 전·중반에 활동한 조각승 가운데 대표적인 작가이다. 인균 스님은 1615년부터 1655년까지 활동했기에 회감 스님과 활동 시점이 30여 년 정도 차이가 나서 사제지간으로 보인다. 이후 회감 스님은 수화승으로 1661년 5월에 강원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을, 6월에 전남 강진 무위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두 지역의 불상 제작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스님은 1666년에는 수화승으로 전북 군산 불주사(舊 불지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의현 스님과 함께 제작하였다. 이후 회감 스님은 1678년에 응혜 스님이 지리산 소은난야(小隱蘭若)에 목조대세지보살좌상(광양 무등암 봉안)을 만들 때, 대공덕주(大功德主)로 참여하였다. 광양 무등암 목조대세지보살좌상은 원래 아미타삼존불좌상으로 조성된 불상이지만,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삼존불이 봉안되었던 소은난야(小隱蘭若)는 조선후기 문헌에 언급된 기록이 전무하여 구체적인 위치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 밝혀진 발원문 등을 중심으로 회감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1610년을 전후하여 태어나서 1633년에 인균 스님 밑에서 보조화승(補助畵僧)으로 불상 제작의 수련기를 거친 후, 1661년에 평창 상원사와 강진 무위사 불상, 1666년에 군산 불주사 불상을 제작하였다. 스님은 앞선 기록으로 살펴볼 때 1660년대가 조각승으로서 최고의 절정기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78년에 불상 제작의 공덕주로 참여하여 70여 년 동안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님이 불상을 제작한 지역은 전북 김제와 군산, 전남 강진, 강원 평창 등으로 전국을 무대로 활동한 조각승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까지 밝혀진 회감 스님의 조각승 계보는 인균(印均, -1615-1655-)→ 회감( -1633-1678-)→ 상림(尙林, 尙琳, -1649-1661-), 신언(神彦, -1661-), 의현(儀玄, 依玄, -1661-1666-)으로 이어진다.
회감 스님의 후배로 추정되는 상림(尙林, 尙琳) 스님은 1649년에 사인 스님과 순창 만일사 불상(포천 동화사 봉안)을 제작한 후, 같은 해 수화승 무염 스님과 대둔사 묘련암 목조보살좌상을 조성(남양주 불암사 봉안)하고, 1661년에 회감(懷鑑) 스님과 전남 강진 무위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 조성에 부화승으로 참여하였다.
▲ 강진 무위사 명부전 불상 발견 조성발원문 세부 사진제공=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 |
회감 스님이 만든 대표적인 불상은 전라남도 강진군 월하리 월출산 밑에 위치한 무위사(無爲寺)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다. 이 사찰은 1739년에 작성된 <전라좌도월출산무위사사적기(全羅左道月出山無爲寺寺蹟記)>에 의하면 617년에 원효대사가 관음사(觀音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이라고 적혀 있지만, 617년은 원효가 태어난 연도라서 전적으로 믿기 어렵다. 그러나 946년에 세워진 선각대사편광탑비에 선각국사 형미(逈微, 864-917) 스님이 905년에 무위갑사(無爲岬寺)에서 거주한 기록이 남아있어 최소한 10세기 전반에 운영된 것을 알 수 있다. 무위사에는 삼층석탑,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목조지장보살상 등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남아있다.
명부전 내 수미단에 봉안된 목조지장보살좌상은 높이가 129센티미터로, 조선후기 제작된 중형불상이다. 지장보살은 약간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정한 자세로, 머리는 민머리의 성문비구형(聲聞比丘形)이고, 타원형의 얼굴에 반쯤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콧날이 뾰족하며, 입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따로 제작된 오른손과 왼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댄 수인(手印)을 취하고 있다.
대의 안쪽에 편삼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에 대의자락이 가슴 위에서 짧게 한 번 접힌 후, 옷자락은 팔꿈치와 복부(腹部)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편삼과 자연스럽게 접혀 있다. 특히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은 배 부분에서 수직으로 내려와 좌우로 대칭이 되는 옷자락이 늘어져 있고, 옆으로 가늘게 몇 가닥의 주름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이전에 제작된 기년명(紀年銘) 불상에서 볼 수 없는 회감(懷鑑) 스님이 제작한 불상의 하반신 표현이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가슴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대각선 방향으로 완만하게 접혀 있다. 불상의 측면은 어깨선을 따라 두 가닥의 옷주름이 수직으로 내려오다가 앞자락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한 가닥의 옷주름이 늘어져 접혀 있다.
목조지장보살좌상의 좌우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나머지 좌우 벽면을 따라 시왕상을 배치하였다. 시왕상은 홀수 번호를 향우측(向右側)에, 짝수 번호를 향좌측(向左側)에 놓고, 그 뒤로 귀왕과 판관을 배치하였으며, 입구에 인왕상을 세워 놓았다. 도명존자는 지장보살과 동일한 수인(手印)을 하고,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는 지장보살과 같다. 이와 달리 무독귀왕은 역삼각형의 얼굴에 날카로운 인상을 하고 있다.
시왕상은 모두 의자에 앉은 자세로 염라대왕을 제외하고 높은 관을 쓰고, 융복과 곤룡포를 입고 있으며, 허리에 묶은 광다회가 길게 늘어져 있다. 책이나 경전을 펼쳐든 2구의 시왕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왕은 긴 홀을 들고 있다. 그런데 열 번째 시왕상은 다른 시왕상과 달리 이마에 잔주름이 표현되고 입은 복식에 많은 차이가 있어 다른 시왕상과 시기와 작가가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론은 발원문의 내용 중에 열 번째 시왕을 제작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북 군산 불주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개금불사 시 내부에서 가로 62.5cm 세로 88cm 내외의 한지 1매에 기록된 발원문이 조사되었다. 발원문에 “강희오년 병오 중춘(康熙五年歲次丙午仲春)… 화원(畵員) 회감(懷鑑) 부(副) 의현(義玄)…”이라고 적혀 있다. 목조여래좌상은 높이가 88cm로, 앞서 살핀 강진 무위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머리 부분을 제외하고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머리는 뾰족한 나발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가 표현되었고, 육계 밑에는 머리 정상부에 반원형의 중앙계주와 정수리 부위에 원통형의 정상계주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 반쯤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갔고, 코는 콧날이 뾰족하며, 입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있다. 따로 제작된 오른손과 왼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어 아미타수인(阿彌陀手印)을 취하고 있다.
바깥쪽에 걸친 대의는 1661년 강진 무위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같이 오른쪽 어깨에 대의자락이 가슴 위에서 짧게 한 번 접힌 후, 옷자락은 팔꿈치와 복부(腹部)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왼쪽 어깨를 완전히 덮고 내려와 복부에서 편삼과 자연스럽게 접혀 있다. 하반신을 덮은 옷자락은 복부에서 한 가닥의 주름이 길게 늘어지며 펼쳐져 끝부분이 둥글게 마무리되고, 좌우로 몇 가닥의 주름이 펼쳐져 있다. 왼쪽 무릎에 늘어진 소매 자락은 둥글고 짧게 늘어져 있다.
17세기 중반에 활동한 회감 스님이 제작한 불상은 1661년에 강진 무위사 목조지장보살좌상과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보살좌상, 1666년에 군산 불주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다. 이 시기에 제작된 1651년 무염(無染) 스님의 속초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667년 운혜(雲惠, 雲慧) 스님의 화순 쌍봉사 목조지장보살좌상, 1684년 색난(色難, 色蘭) 스님의 강진 옥련사 목조석가여래좌상(강진 정수사 제작)과 비교하면 쉽게 회감 스님의 불상 양식을 밝힐 수 있다.
우선 얼굴형에서 회감 스님이 제작한 불상은 턱선을 둥글게 처리하여 타원형이고, 양미간이 좁으며, 이목구비(耳目口鼻)가 오밀조밀하여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과 비교해보면, 가늘고 긴 신체에 비하여 짧고 다부진 신체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불상의 크기가 대형에서 중형으로 바뀌는 것은 봉안하는 전각이 주요 전각에서 부속 전각으로 바뀌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편 회감 스님이 제작한 불상의 대의 자락은 중심에서 두 가닥의 옷자락이 내려와 끝단이 완만한 곡선으로 처리되어 특이한데, 이러한 대의처리는 현재 밝혀진 조각승들의 불상 표현에서 볼 수 없다. 회감 스님이 인균 스님과 같이 제작한 불상과 수화승 회감으로 제작한 불상을 비교해 보면,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 자락이나 하반신의 처리 및 승각기 표현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회감 스님과 그 계보에 속하는 조각승이 제작한 불상 양식을 바탕으로 전국 사찰에 봉안된 무기년명(無紀年銘) 불상은 경남 진주 성전암 목조여래좌상(1644년), 경남 통영 안정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 등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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