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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사] 동자상 부장(副葬) 풍속, 무덤 앞 동자석 세우는 전통으로(제민일보)2013.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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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8-17 09:19 조회8,8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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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상 부장(副葬) 풍속, 무덤 앞 동자석 세우는 전통으로
<위크앤팡> 제주미학기행
[김유정의 미학기행 멋과 미] 23. 한국 동자상(童子像)의 약사(略史) (1)
김유정
한국서 가장 오래된 동자상은 백제 무령왕릉서 출토된 '유리동자상'
문수동자상은 고려→조선전기 양식 특징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
 
   
 
  ▲ 무령왕릉 출토 유리동자상(2.8㎝, 백제,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삼국시대의 동자상
 
동자신앙은 일찍이 삼국시대 이래로 줄곧 이어 왔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동자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곳에 나오는데 동자상 또한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한국 동자상의 역사를 유물 조각상으로 살펴보면, 현존 한국의 가장 오래된 동자상은 백제 무령왕릉(武寧王陵, 재위 501~523)에서 유리구슬과 함께 출토된 <유리동자상(琉璃童子像)>이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1448년이 지난 1971년이며, 모두 4차례에 걸쳐서 발굴이 이루어졌다. 무령왕릉에서는 묘지석(墓誌石)을 비롯하여 왕과 왕비의 금제관식, 다량의 유리제 장식품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리동자상>은 2.8㎝의 작은 크기의 동자상이다.
 
몸에 걸치는 수호·장식용인 동자상이지만 작은 동자의 모습은 의외로 현존하는 제주도 동자석 모양과 매우 닮았다. 동자상의 둥근 얼굴에 머리는 민머리이며, 단정하게 서서 두 손은 배 위로 모아 배례(拜禮) 하는 모습이다. 이 <유리동자상>은 쌍으로 출토되었는데, 허리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있어 왕비가 생존 시 수호신 격으로 옷에 부착하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김춘실, 2003). 실투성(實透性) 유리에 안면의 이목구비(耳目口鼻) 뿐만 아니라 손, 바지, 양발 등을 간단한 선각(線刻)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의 표현기법과 인물의 인상은 한국적인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고 평가된다(권영필, 1997).
 
이 사례로 보아 우리 민족은 이미 오래전부터 동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무덤에 동자상을 아주 작게 조각하여 부장(副葬)하는 풍속은 조선시대에 와서 동자의 형상을 돌로 만들어 세우는 동자석의 전통으로 정착되었다(임영주, 1988).
 
   
 
  ▲ 감은사 석탑 사리구 주악동자상(피리, 통일신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통일신라시대의 동자상
 
통일신라(682년) 감은사석탑(感恩寺石塔)에서 발견된 사리구(舍利具)에도 동자상이 있다. 이 동자상은 조각으로 나타난 우리나라 불교 동자상 중 이른 예 가운데 대표적인 동자상이다. 두 동자상이 새겨진 사리구 일체는 보물 제366호로 지정돼 있다. 이 두 동자상의 모습은 음악을 연주하고 있는 동자(奏樂童), 춤추고 있는 동자(舞童)의 모습이다(임진광, 2003).
 
이 사리구는 누각 형태인데 중앙에는 배가 볼록한 수정사리병을 앉혀놓았고, 둘레는 섬세하게 대나무 모양의 난간을 설치하여 그 모서리에 곡두비파, 제금, 장고, 대금을 부는 천인상(天人像)을 만들어 앉혔다, 다시 그 사이에 옥으로 조각한 주악동자상(奏樂童子像)과 녹색 옥으로 만든 알몸으로 춤추는 동자상(舞樂童子像)을 세웠다. 이 동자상들은 중앙아시아풍이 짙게 배어나기 때문에 당나라를 통해 통일신라로 바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姜舜馨,1994).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월출산마애여래좌상>에는 결가부좌한 무릎 옆으로 합장을 하고 있는 작은 동자상이 부조돼 있다. 마애여래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고, 그 아래 동자상은 관음보살을 방문한 선재동자와 같은 모습으로 조각돼 있다(김춘실, 2003).
 
   
 
  ▲ 철조동자상(고려,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고려시대의 동자상
 
북한 평양에 있는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된 <금동관음보살좌상>과 함께 있는 동자상은 고려시대 <선재동자>의 모습처럼 조각돼 있다. <선재동자>는 중국의 동자처럼 머리는 세 군데로 결발(結髮)을 지었고, 허리를 굽혀 합장을 한 채 관음보살의 설법을 듣고 있는 모습으로 허리에 감은 요포(腰布)가 선재동자의 특징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조성된 <경천사10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은 3단으로 된 기단부 사면(四面)이 돌출된 매우 특이한 형태이며, 사자, 용, 서유기 장면 등이 조각돼 있다. 탑신에는 영산회(靈山會), 원통회(圓通會) 등 불회상(佛會相) 외에도 부처·보살이 새겨져 있다. 원통회의 관음보살상 밑에 무릎 꿇은 자세의 선재동자가 부조되었다(김춘실, 2003).
 
이 탑은 층수가 3층, 5층, 7층 등과 같이 홀수로 조성된 것이 아니라, 10층으로 세워진 것은 경천사가 화엄종 계통의 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화엄경(華嚴經)』에서는 십(十)을 '화엄의 완성', '완전한 수'로 보기 때문에 화엄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10층탑을 만든 것이다. 이 <경천사10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은 건축사와 미술사, 특히 한국 조각사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진성환 외, 2005).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철조동자상>은 머리, 몸에 두른 천의(天衣), 합장한 손의 형태로 보아 선재동자상으로 추정된다. 고려불화 가운데 <수월관음도>에 선재동자의 도상이 하나의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철조동자상>이 독립적으로 조각된 것은 매우 특이한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 명부동자상(冥府童子像)은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데, 조선시대에 와서 <지장시왕도>, 명부전의 동자상으로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김춘실, 2003).
 
   
 
  ▲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조선전기, 강원도 평창군 상원사 소장)  
 
조선시대의 불교 동자상
 
조선시대 불교의 동자상은 명부전(冥府殿)의 동자상이 대표적이다. 조선 전기의 동자상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상원사목조문수동자좌상(上院寺木彫文殊童子坐像)>의 편년이 분명하다. 이 동자상의 제작연대는 세조 12년(1466)으로 자세는 반가부좌를 하고 있다.
 
이 문수동자상은 보살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동자의 모습이 아니라 국내에서 유일하게 동자 자신이 독립적인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동자상의 높이는 93㎝. 1984년에 국보 제221호로 지정되었다.
 
의상은 오른쪽 어깨로 쏠린 형상(右肩偏袒)에 영락(瓔珞)을 늘어뜨리고 있는 보살형 복장인데, 보살상과 다른 것은 보관(寶冠) 대신 머리를 양쪽으로 묶은 쌍계( ) 형태에 동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수동자상의 수인(手印)은 아미타여래를 상징하는 하품하생인(下品下生印)을 하고 있고, 다른 보살상과 달리 광배(光背)나 대좌(臺座)도 마련하지 않았다. 목조(木彫)라는 재료의 특성상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이 문수동자상의 소재지인 강원도 평창군의 오대산(五臺山)은 신라의 고승(高僧) 자장율사(慈裝律師)가 중국의 오대산문수신앙을 받아들인 이래 문수신앙의 도량(道場)으로 유명하다.
 
이 같은 전통적인 문수신앙이 조선의 임금인 세조의 문수신앙을 낳게 하였고, 세조가 직접 문수신앙을 체험함으로써 이 문수동자상을 제작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즉, 문수동자상은 문수보살의 인격화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문수동자상은 고려불상의 양식에서 조선전기 양식으로 전개되는 양식적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조선 전기의 귀중한 자료다(韓國文化財保護協會, 1993).
 
상원사문수동자상이 조성된 배경은 설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온몸에 종기가 나 고생하던 세조가 어떤 약으로도 치료가 안되자 오대산 문수도량을 찾아가 정성껏 기도를 하고,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로 목욕을 하는데 한 동자가 지나가자 세조는 그 동자에게 등을 좀 씻어달라고 부탁했다. 동자는 기꺼이 응해 주어 세조의 등을 씻어주었다. 목욕을 마친 세조는 그 동자에게 "너 혹시라도 이 계곡에서 임금님의 등을 씻어 주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라" 라고 했더니, 그 동자가 말하기를,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임금님께서도 혹시라도 문수동자를 만났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라고 한 뒤에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세조는 그 소리를 듣고 몹시도 이상했다. 몸을 살펴보니 온 몸의 종기는 말끔하게 나아있었고 그 동자는 찾을 수가 없었다. 세조는 돌아와 화공을 불러 자신이 만난 동자를 그리도록 해서 만들어 모신 것이 상원사 문수동자상이라고 전해지고 있다(文化財管理局, 1991).
 
이외에도 상원사에는 다른 3구의 동자상이 있는데 이 상원사 목조동자상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동자상들이다.『화엄경(華嚴經)』에는 보장엄동자(普莊嚴童子)·도솔천동자·선재동자가 등장하는데 그 동자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두 동자는 총각머리를 하고, 선재동자는 삭발한 모습인 것으로만 추정하고 있다(임영주, 1988).
 
상원사 3구의 동자상은 50여㎝ 크기의 입상(立像)이다. 1구는 암벽 위에 서 있는 선재동자상인데 삭발한 머리에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 합장하고 맨발로 서 있다. 동자상 2구는 쌍계( ) 머리에 연꽃봉오리를 들고 허리에는 꽃 모양의 장식을 하고 있다. 다른 1구도 마찬가지로 연꽃봉오리를 들고 있고 가슴과 허리에는 연판문(蓮瓣文)의 장식을 둘렀다. 동자상 3구 모두 신체는 백색이고 몸에는 적·청·황·녹의 화려한 색의 의상을 하고 있고 양팔을 휘감은 띠를 감고 있고 맨발로 서 있다. 모두 조각 솜씨가 빼어나다(文化財管理局, 1991). 미술평론가(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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