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은사] 조선 왕릉급 능묘… 관광코스 개발 필요(강원도민일보) 201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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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9-10 09:54 조회8,667회 댓글0건본문
조선 왕릉급 능묘… 관광코스 개발 필요 | ||||||||||||||||||||||||||||||||||||||||||
준경묘·영경묘 심포지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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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민일보와 삼척시는 삼척 준경묘·영경묘의 국가사적 승격을 계기로 준경묘·영경묘의 전통적 수호 활동 복원과 교육콘텐츠화를 위한 심포지엄을 11일 오후 1시30분 삼척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한다. 봉심관(관찰사·수령), 묘 수호관리 복식, 제물, 왕릉 체험 프로그램 등의 주제발표문을 간추려 싣는다.
■ 조선왕조 탯줄 대한제국 삼척 준경·영경묘 봉심 (봉심 재현 행사 제안) “조선왕조 뿌리 지켜온 도민 충심 전달해야”
조선왕조의 뿌리 충절의 고향 삼척에 작지만 아름다운 행사가 필요하다.
기획방향은 조선왕조 뿌리가 되는 묘소를 500년 이상 묵묵히 지켜온 강원도민들의 충심을 전달하고 삼척의 양묘를 왕릉만큼 중요하게 생각한 대한제국 고종의 마음을 읽는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황장목의 우수성을 알리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양무 장군의 170호·1000인 삼척이주 의미를 문화융합발전 방향으로 삼는다. 구체적 추진방향으로 ① 왕릉은 왕통백대 현신으로서 충효의 정점으로 고증에 맞춰 봉심에 정성을 다한다. ② 봉심 후 준경묘역의 진응수 샘물을 음복, 일체감을 조성한다. ③ 행사 의미를 시내에 전파해 시민들이 조선시대의 마음을 느끼도록 한다. ④ 관광객의 삼척 체류시간을 늘려 삼척의 관광산업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⑤ 묘목단지를 조성해 관광객이 황장목, 목백일홍 등의 구입을 용이하게 한다. 프로그램을 자세히 살펴보겠다. 고종대 강원도관찰사의 봉심행렬 재현행사를 준경묘 홍살문 200m 지점에서 시작한다. 시가행진을 할 경우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가 되며 봉심행사 맞이 등 규모를 키워갈 좋은 소재가 될 것이다. 봉심의식은 정자각-능각-비각-군사점고 순서로 진행하며 정자각과 비각을 열어 공개하고 청소하는 의식도 포함한다. 의장기의 도열로 분위기를 고조한다. 테마행사로 ‘삼척의 소나무가 한양을 지킨다’ ‘조선 탄생의 탯자리’를 마련한다. 장기계획행사로 준경묘-재실-영경묘-삼척항을 연결하는 관광코스 개발, 황장목 묘목 분양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황장목 분양행사는 일년에 한 번 분양일을 정해 삼척 황장목을 적극 홍보하고 생활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을 인식시킨다. 목백일홍, 오죽화분도 강원 특산품으로 활용할 수 있다. ■ 준경묘·영경묘 제향(祭享) “준경·영경묘 제향 홀기 왕릉과 흡사”
준경묘·영경묘는 조선왕조 최고의 선대묘로 고종 조인 1899년 4월 16일 국가적 차원에서 삼척 미로면 양묘를 ‘선대의 묘’로 인정하고 수축·정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릉 제향은 역대 제왕과 왕후에 대한 기신제향 의식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국가의식의 규정인 오례의(五禮儀) 중의 길례(吉禮)에 해당된다. 준경묘·영경묘 제향은 고종실록 권39권 고종36년(1899년) 7월 11일(양력)의 기록에 의하면 제사는 1년에 한번 한식에 거행하고, 제관은 삼척과 가까운 강릉이나 양양의 수령이 맡도록 했다. 준경묘·영경묘의 제향의 홀기(笏記:혼례나 제례 의식 순서를 적은 글)는 왕릉제향과 큰 차이가 없다. 제물과 제기 수는 약과(藥果) 4기, 황율(黃栗) 1기, 대조(大棗) 1기, 실백자(實柏子) 1기, 실비자(實榧子) 1기, 반(飯) 1기, 자박병(煮朴餠) 1기(참살로 만들어 기름에 굽는다), 상화병(霜化餠) 1기 (품질 좋은 밀가루로 둥글게 접어 만들어 찐다), 표고재 1기, 가토리채(加士里菜) 1기, 백증(白蒸) 1기, 길갱채(吉更菜) 1기, 전증(煎蒸) 1기, 잡탕(雜湯) 1기, 적(炙) 1기(豆泡 두부로 한다), 면 1기(녹두철에는 녹두 가루로 한다), 개장(芥醬) 1기, 청주(淸酒) 3작 (고유제는 1작으로 한다), 소랍촉(小蠟燭) 3정(정 무게는 2량으로 한다), 시접 1좌 등이다. 양 묘 제물과 제기 수는 동일하다. 제향 찬품과 찬탁 진설은 다음과 같다. 제물은 5열로 차리는데 남쪽 상이 된다. 제 1열은 약과 4기, 제2열은 각색 실과, 제3열은 좌측에 병(餠) 3기를 놓고 우측에 탕 3기를 차린다. 제4열에는 반(飯) 1기, 국수 1기, 시접 1좌, 적(炙) 1기를 진설하는데 서쪽이 상이 된다. 마지막 5열에는 술 3잔을 놓는데, 한 잔은 고유제용이다. ■ 준경묘·영경묘 수호활동과 제향(祭享) “양묘 재실, 향 보관·제기 간수 제사 준비 중심지”
준경묘 즉 노동(蘆洞)의 묘와 영경묘 즉 동산(東山)의 묘 수호활동은 조선 전기부터 국가 차원에서 관심을 가졌음이 삼척과 관련한 각종 읍지나 지리지들을 통해 확인된다. 조선 전기부터 양묘 수축과 봉심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양묘 수호군의 역할은 양묘 수호·금화(화재예방)·금벌이었다. 1899년 준경묘·영경묘 수축 이후 양묘에 수호군 15명씩을 두어 제·금화·벌초·식목 등의 일을 수행하게 했다. 왕실 차원에서 조선 전기 이후 화전 금지·나무 보호를 지속적으로 해 양묘 주변에 우리나라 고유 수종인 육송(강송, 적송)으로 이루어진 소나무 숲(수림)이 원시적 자연림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두 묘소는 능침이라 일컫고 마을도 능동이라 부르며, 목조 이안사와 부모가 살던 집터를 왕대라 일컬어 지역에서도 목조 부모 묘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천은사는 인근 양묘 수축 이후 조포사로 지정됐다. 조포사(造泡寺)란 표면적으로 두부(泡)를 만드는 절이란 뜻인데, 실제로는 왕릉의 능찰로써 왕릉 수호와 향사를 위한 준비를 해야하는 사찰을 이른다. 준경묘·영경묘의 재실은 왕릉의 수호 관리를 담당하던 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향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를 간수하며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이다. 현재 재실이 위치한 곳에 1899년 준경묘·영경묘를 수축하면서 재실을 지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이 지역 종인들이 비록 규모는 작지만 제사를 건립했다. 재실은 준경묘와 영경묘가 위치한 중간인 활기동에 지어졌고, 12칸 규모의 제실, 2칸 규모의 제기고가 있었으며 10칸 규모의 행각, 그리고 전사청 공간은 제물을 숙설하는 곳으로 행각 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조선시대 왕릉의 제향과 봉심 “왕, 왕릉 보호인 임명… 묘역 수리·관리 심혈”
왕릉을 보호 관리하며 제향을 준비하는 인원은 관원과 수호군으로 구분된다. 관원은 품계를 가진 관리로서 국왕에 의해 능관에 임명되어 파견된 자를 가리킨다. 반면 능군이라고도 불리는 수호군은 양인으로서 역으로 능을 수호하는 자들이다. 안장된 지 4대가 지나 천위(遷位)된 능의 수호군 수는 원칙적으로 30명이었다. 봉심은 정기적인 것과 비정기적인 것이 있는데 정기적인 봉심이란 매달 5일 단위라로 하는 봉심 또는 춘추로 하는 봉심 등이 있다. 반면 비정기적인 봉심이란 능소의 공간에 탈이 났을 때 이를 점검하고 수리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든지 국왕이 능행할 때에 봉심을 수행하는 것 등이다. 또 해당 능의 관원이나 능군의 담당자가 수행하는 것으로 수복과 능관의 일상 업무로 주어진 봉심과 능 외부 상급 기관에서 수행하는 정례적 봉심과 탈이 있을 때의 봉심, 그리고 국왕의 명령을 받은 관원이 행하는 봉심이 이뤄졌다. 제향의 절차를 보겠다. 먼저 제향의 준비는 향을 맞이함(延香之規), 축문에 헌관의 이름 쓰기(塡祝之規), 제물의 준비, 향축의 전달(傳香之規) 순으로 한다. 제향 홀기(笏記)에 따라 제사가 진행된다. 제향의 마무리는 제향에 올린 음식 준여를 궐에 보내기 위해 종이에 싸는 법식, 음복례, 삭망분향, 국왕의 능행과 친제 순으로 한다. ■ 조선왕릉·준경묘·영경묘 묘호 추증·수호관리 “영조대 이후 삼척 재관심… 태조 의식 맞춰 봉축”
삼척의 목조 고비의 묘는 고종대에 와서 왕실의 능묘로 인정받게 된다. 대한제국 성립 1년 뒤인 고종 35년(1897) 양력 10월 24일 의정부찬정 이종건의 전주 건지산의 시조 이한의 묘역에 투장 금지와 삼척의 목조 고비의 묘 관리 대책에 대한 상소로 인해, 고종은 지역 수령으로 하여금 직접 봉심하고 적발해서 투장한 무덤을 하나하나 파버리도록 하고, 이전의 수교와 정식에 따라 수호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고종은 1899년 양력 1월 25일 재상 이중하로 하여금 삼척 양묘를 봉심하고 묘의 경계를 정하고 수호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이중하는 1899년 3월 13일(음력) 한양을 출발, 11일 만인 24일 삼척에 도착해 양묘에 대한 자료와 무덤 상태를 점검했다. 고종은 1899년 5월 24일(양력) 삼척의 무덤이 단순한 목조 부모의 묘인가라는 사실 관계를 따지기 보다는 이미 선조부터 나름대로 관리를 해왔다는 이유를 들어 삼척의 양묘가 목조의 고비 묘라고 확신하고, 전주의 건지산 이한 제단의 전례에 맞춰하고, 묘의 영역을 봉축하는 것은 태조의 4대조 북쪽 능칭 의식에 맞춰 시행토록 했다. 마침내 삼척의 양묘를 봉심하고 돌아온 이중하를 소견한 다음날 고종 36년(1899) 5월 25일(양력) 삼척의 ‘노동과 동산의 무덤’ 묘호를 각각 준경, 영경이라 했다. ■ 준경묘와 영경묘 봉심(奉審) 참여자 복식 “직위 따라 복식 달라… 왜란 후 사폭바지 도입”
저고리는 포에 비해서 짧은 상의류를 가리키며, 상의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옷이다. 바지는 조선 전기에는 남녀가 모두 밑 막힌 바지와 밑 트인 바지를 겹쳐 입는 것이 일반적인 바지 착장법이었고 임진왜란 후 중국 군인들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중국인의 바지 즉 지금의 사폭바지가 전해지게 됨에 따라 남자들이 사폭바지를 입는 문화로 변화됐다. 버선은 흰색 명주나 면포(무명) 등으로 만들어 신었다. 행전은 넓은 바지부리를 정리하여 활동을 간편하게 하기 위해 두르는 것이다. 강원도관찰사의 복식은 1895년 을미 의제개혁에 의한 대례복으로 사모, 탕건, 흑단령, 쌍·쌍호 흉배, 품대, 흑화(검은 장화)를 착용했다. 받침 옷으로는 주의(외투용 한복), 전복(조끼형 옷)을 착용하고, 호패를 지녔다. 종2품 당상관의 예에 따른다. 사모뿔에 무늬가 있는 오사모, 쌍백학 흉배를 착용했다. 종3품 당하관 삼척군수는 무늬가 없는 오사모, 망건, 대모관자, 무늬 없는 옷감으로 만든 흑단령, 단학(학 한 마리) 또는 단호(호랑이 한마리) 흉배, 소은대, 호패 등을 착용했다. 참봉 복식은 9품에 해당해 삼척군수와 유사하다. 지방관아와 묘의 행정실무를 담당하였던 육방의 이서와 서원은 1884년 갑신의제개혁 이후 보편적으로 착용되었던 주의에 흑립을 쓰고 행전에 미투리를 신었다. 수복(守僕)은 뒤가 뾰족하게 올라가면서 앞은 평평한 평정건(平頂巾) 등을 착용했다. 수호군은 상모 장식한 벙거지에 흑의(黑衣)와 전복에 허리끈을 매고 행전을 치고 미투리를 신었다. 유사(儒士)는 유건과 도포를 착용했다. ■ 준경묘·영경묘 관련 체험교육 프로그램 “지리적 위치·풍수지리 의미 관광자원 활용 충분”
교육 체험기간은 4시간, 1일, 1박 2일, 3∼4일, 주말 프로그램, 10주 내외 연속 강의 등으로 편성했다. 장소도 삼척시내 문화기관, 양묘의 재실, 준경묘·영경묘 능역에서 시행토록 했다.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중고생을 대상으로 왕릉 이해·산책·차 마시기로 꾸려진 ‘고요한 아침, 왕릉’, 초중고생 궁궐 왕릉 이론학습·현장탐방인 ‘찾아가는 왕릉학교’와 함께 왕릉에 대한 이해를 돕는 체험으로 ‘나는야, 왕릉지킴이 능참봉’ ‘나는 관찰사 능 봉심하러 왔다’가 마련됐다. 다문화가정 자녀를 위한 프로그램인 ‘다다르다. -여러나라 왕릉이야기 속에 핀 다문화 이해’는 조선왕릉 교육을 계기로 다문화가정 자녀들이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한편 외국인 부모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으로 다른 나라 왕릉 비교 이해교육, 깜짝 전시도 마련한다. ‘릉에서 본 선 ‘릉’ 선, 형, 색’ 프로그램과 ‘나의 삶… 나의 장례식…그리고 나의 비전’, ‘죽음을 준비하는 왕릉행차 - 죽음을 통하여 삶을 바라보다’, ‘생명의 숲과 함께하는 춤 명상’, ‘왕의 생애에서 나를 만나다’, ‘내가 죽어 살집 왕릉 만들기- 릉에서 수학을 알다’ , ‘유언장과 죽음체험 그리고… 나의 부고장’, ‘뉴 미디어로 보는 왕릉의 하루’, ‘장명등에 불을 밝혀라’ 도 특색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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