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 11. 평창 상원사 범종(법보신문) 2014.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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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6-12 16:49 조회8,593회 댓글0건본문
11. 평창 상원사 범종 | ||||||||||||||||||||||||
최고<最高>의 주조기술과 미학으로 빚어낸 한국 최고<最古> 범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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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의 다양한 장르 가운데서 가장 흔히 보는 것 중 하나가 범종(梵鍾)일 것이다. 어느 절이든 대개 마당에 커다란 범종이 걸린 종각 혹은 종루가 있기 마련이이니까. 종각에는 범종만 있는 게 아니라 운판(雲板)·목어(木魚)·법고(法鼓)가 함께 있어 이 네 가지 공양구(供養具)를 한데 불러 ‘사물(四物)’이라고 한다. 쓰임새는 모두 당목이나 채로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타악기이지만 각자 나름대로 깊은 의미가 있으니 어느 것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그래도 전각 이름이 종각이듯이 이 사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아무래도 범종일 것이다. 아침저녁 예불 직전에 사물을 치는데 비록 거의 단음조에 가까운 단순한 음계이건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느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것보다 깊은 울림을 느끼게 한다. 사물을 치는 순서는 범종을 맨 마지막에 치는데 울림통이 가장 크다보니 그 묵직하면서도 여운이 가득한 소리가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제격이다. 범종의 존재감은 소리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몸체에 장식된 장엄무늬에서 찾을 수 있는데 한마디로 불교미술의 정수를 모아놓았다고 할 만큼 다양하고 화려하다. 725년 3월 성덕왕대 제작 15세기 안동서 상원사 이운 생동감 넘치는 용뉴 인상적 굵은 음통은 만파식적 상징 날아갈듯 한 비천상도 일품 범종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또 그 시원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속 시원한 대답은 아직 없다. 여러 가지 진지한 학설이 있고 그럴듯한 가정(假定)이 있는데, 간단히 정리해보면 미술사학계나 음악사학계에서는 궁중에서 연주되던 타악기 용(甬)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최근에는 불교의 장식구인 방울 모양의 탁(鐸)이 발전되어 범종이 되었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는 추세다. 용이든 탁이든 이것이 발전해 지금의 범종 모양으로 정형화된 것은 대략 서기 1∼2세기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된 범종은 8세기에 만들어진 상원사 범종이다. 그런데 상원사 범종은 최고(最古)라는 타이틀 말고도 종소리는 물론, 청동 합금 및 주조기술 면에서도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된다. 말하자면 미적인 면뿐만 아니라 기능적·기술적 측면에서도 최고(最高)의 반열에 오른 작품으로, 우리나라 범종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면서 모범적인 형태를 지닌 최우수작으로 이 상원사 범종이 으뜸으로 꼽히고 있는 것이다. 상원사 범종의 제작 연대는 몸체에 새겨진 종명(鐘銘)에 725년에 해당하는 연호가 나온다. 이 무렵은 신라의 문화가 한창 절정으로 달려가던 때인 성덕왕(聖德王)대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경주의 성덕대왕신종 역시 8세기에 만들어져 상원사 범종의 바로 뒤를 잇는다. “개원 13년 을축 3월8일에 종이 완성되어서 이를 기록한다(開元十三年 乙丑 三月 八日 鐘成記之)”로 시작되는 명문 중에는 이 범종을 만들 때 들어간 놋쇠가 모두 3300정(鋌)이었고, 이 범종의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도 자세히 열거되어 있다. 그런데 이 범종은 처음부터 상원사에 있었던 게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540여년 전인 1469년에 이곳 상원사로 옮겨졌다. 그 전에는 경북의 어떤 절에 있었던 것 같은데 절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상원사로 옮겨지기까지의 유래에 대해 몇 가지 기록이 있다. 우선 ‘조선왕조실록’ 1469년 윤2월조에 조선 초의 고승 학열(學悅)이 조정에 “안동 관아에 있던 범종을 (상원사로) 옮겼습니다”하고 보고한 내용이 있다. 안동의 읍지 ‘영가지(永嘉誌)’에도 이 무렵 안동 관아의 누문(樓門)에 걸려 있던 옛 종을 상원사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누문에 걸린 건 아니고, 그 전에 어느 절터에서 범종을 가져와 걸었다는 것이다. 상원사 범종은 범종으로서의 위용 외에 겉면에 갖가지 장엄의 향연이 베풀어져 있는데, 이런 장엄 장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 우선 범종을 형태면에서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범종의 구성은 꽤 단순한 편이다. 가장 위에 있는 편편한 곳을 천판(天板)이라고 한다. 여기에 용(龍) 한 마리나 두 마리가 얹혀있는 게 통일신라부터 고려에 이르는 전형적 모습이다. 특히 신라의 범종은 예외 없이 용이 있고 그 용이 음통(音筒) 또는 용통(甬筒)이라 부르는 원통 형태를 등에 지고 있는 모습을 한다. 범종은 천판 아래가 밑으로 내려갈수록 일정한 비율로 넓어졌다가 맨 아래에서 직선으로 끝맺음을 한다. 천판 바로 아래를 ‘종 어깨[鍾肩]’라고 하는데, 여기에 둘러진 띠를 상대(上帶)라고 한다. 그런데 상원사 범종 같은 경우 상대에 바로 잇대어 아래로 연곽(蓮廓)이라는 사각형 공간이 있다. 종 어깨를 둘러 가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전부 네 곳에 배치되어 있고 그 안에는 끝부분이 둥글게 돌출된 돌기가 있다. 이 돌기의 생김새가 마치 연꽃봉우리 같다 해서 연뢰(蓮蕾)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 연곽 안에 연뢰 아홉 개가 배치되는 게 통식이다.
중국이나 일본 범종에서는 연뢰의 수가 우리보다 훨씬 많아서 한 연곽 안에 36개 또는 72개나 배치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겨질 때 이 범종의 연뢰와 관련해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온다. 범종을 옮겨가던 일행이 경북 풍기읍과 충북 단양 경계에 있는 죽령 고개를 넘을 때였다. 갑자기 종이 너무 무거워져 도저히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이 때 한 스님이 연곽 안에 있는 연뢰 하나를 뚝 떼어서는 안동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다시 쉽게 움직여 무사히 상원사로 옮길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실제로 이 범종의 네 개의 연곽 중 한 곳에는 연뢰 하나가 없다. 맨 아래에도 둥글게 띠가 둘러져 있어서 이를 하대(下帶)라 하고, 상대와 하대 사이를 종신(鍾身)이라고 한다. 이 종신에 베풀어지는 장엄은 시대마다 다른데, 신라시대에는 아주 우아한 모습의 비천(飛天)이 주로 표현되어 있고, 고려시대에는 보살상이나 승려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상원사 범종을 보는 사람은 가장 먼저 용뉴(龍鈕, 용 모양의 고리)에 있는 용의 모습에 감탄한다. 용은 커다란 눈에 우뚝 솟은 귀와 머리 위에 뿔 하나가 달려 있다. 불이라도 막 내뿜을 기세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고, 네 발은 잔뜩 움츠린 모습인데 마치 막 하늘로 뛰어오르려는 양 불끈 솟은 근육과 튀어나올 듯 굵은 힘줄이 인상적이다. 이 상원사 범종을 비롯해서 다른 신라시대 범종에 장식된 용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만파식적’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용이 짊어진 굵은 음통은 곧 만파식적을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범종을 두드림으로써 한 번 불면 모든 고뇌가 사라진다는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의 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 울리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상원사 범종의 장엄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게 비천상(飛天像)일 것이다. 둥근 몸체의 양 옆에 하나씩 새겨진 이 비천상은 숱한 비천 중에서도 미적인 면에서 가장 압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빼어나게 아름답다. 무릎을 세우고 허공에 뜬 채 공후(箜篌)와 생(笙)을 연주하고 모습 자체도 찬탄이 절로 날 만큼 우아한데다가, 마치 짙은 향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듯 얇은 비단 옷자락이 위로 유려하게 흩날리고 있는 것도 환상적이다. 두 비천은 모두 영지버섯 모양의 구름 위에 앉아 있는데, 비단 옷자락의 띠 끝부분에까지 인동초를 새겨놓을 정도로 섬세하기 그지없다 이 두 비천상 외에 상대의 띠 안에도 자그마하게 새겨져 있다. 띠 위쪽에는 피리와 쟁(箏)을, 아래쪽에는 피리 같은 취(吹)악기를 비롯해 장고·비파 등을 그리고 좌우 띠에도 생(笙)과 요고(腰鼓, 허리에 달고 치는 북의 일종)를 연주하는 비천상들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비천의 향연이요 천상의 소리를 상상하게 한다.
그 밖에 상원사 범종에는 갖가지 길상(吉祥)무늬와 범자 장식이 다양하게 배치되어 있다. 길상무늬로는 사리가 담긴 보병·법라(法螺)·일산(日傘)·차양(遮陽)·연꽃·물고기·매듭·법륜 등 팔길상(八吉祥) 또는 팔보(八寶)가 멋지게 장식되었다. 또 범자로는 ‘卍’자와 더불어 ‘육자 대명왕진언’도 있다. 이 육자진언을 염송하면 사람 안에 있는 에너지가 활성화되어 우주 에너지와 통합할 수 있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를 범종에 새겼다는 해석도 있다. 끝으로 오래 전부터 느껴왔던 의문 하나가 있는데, 범종은 불상이나 불화처럼 예경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공양구일 뿐일까 하는 문제다. 10여년 전 어느 해 여름 상원사 측의 협조를 받아 이 범종을 상세히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그 즈음엔 절에서 예식 올릴 때 말고는 종각 문이 닫혀있어서 일반인은 조그맣게 난 창살 너머로나 볼 수 있었다. 나는 다행히 반나절 연구의 허락을 얻어 문을 열어 놓고 있었는데, 일군의 사미·사미니 스님들이 줄을 지어 종각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는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도 있었고, 또 잠시 멈추어 서서 마치 불상을 대하듯 허리를 깊게 꺾어 절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자 인솔하던 스님이 만류하며, “범종은 그저 공양구일 뿐인데 거기다 왜 절을 하느냐?”하며 약간 힐난조로 물었다. 그러자 절 하던 스님이 잠시 머뭇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스님, 저는 공양구에 절을 한 게 아닙니다. 저 범종이 천 년을 넘었는데, 처음 이것을 만들었던 사람과 그들의 발원심이 너무 고마워 그것에다 절 한 것입니다.” 인솔자 스님은 멋쩍어졌는지 더 이상 뭐라 안 하고 쓱 지나쳤다. 자, 범종은 성보가 아니니 절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맞는가 아니면 환희심에 젖어 저도 모르게 합장하던 사미니의 마음이 이해되는가? 난 아직도 잘 모르겠다. 신대현 사찰문화연구원 대표 buam091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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