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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띠 작성일20-06-22 00:04 조회3,281회 댓글0건본문
당시 한암선사가 계셨을 시기는 식민지와 피식민이라는 정치적 구도만이 문제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당시의 시대적 질문은 부처님의 정법이 ‘불변수연(不變隨緣)’하는 것이라면 ‘불변’의 절대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시절 인연에 순응하며 ‘수연’의 가치를 져버리지 않는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변의 이치에 닿아 있는 자만이 생활 속에서 그 정법을 펼치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인연을 펼칠 수 있다고 봅니다. 한암 스님은 이에 대한 답으로 계정혜 삼학에 철저했으며, 승가오칙(참선, 간경, 의식, 염불, 수호가람)을 제시해 승려의 본분을 가르쳤고, 선방에서 어록과 경전을 가르치면서, 보조지눌의 정혜결사를 계승하면서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립했고, 27년간 동구불출하면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으로는 자신의 몸을 던져 상원사를 수호했으며, 좌탈입망으로 수행자의 참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암 스님을 네 번이나 종정에 내세운 당시 한국의 불교는 시절 인연의 엄혹함에 저항하지 않고, 굴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끝내는 불교를 지켜내었습니다. 그 시절 수좌들은 잠잘 곳이 좁아 ‘칼잠'을 자며, 먹을 것이 부족해 매일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상원사로 끊임없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러한 당시의 각자(覺者)들에 의해 나라가 망하고, 불교까지도 일본불교에 침탈되었지만 한국의 선불교는 지금까지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존속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불교의 진리가 진리임을 밝히고 미래의 각자(覺者)들의 공명(共鳴)을 얻는 길을 모색해야할 때라고 봅니다..
한 달에 한 번 상원사와 적멸보궁을 참배하는 강원도민입니다.
인연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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