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역사적 소명과 나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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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백작 작성일13-05-28 06:57 조회14,024회 댓글0건본문
1)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역사적 소명과 나의 이해
후세백작 2009.09.26 06:11
월정사의 8각 9층 석탑을 웹에서 찾아보면, 그에 설명은 대략 고려중기의 하한선 10 세기를 넘지않는 축조년대와 이형(異型)적 조각물이란 설명만 되풀이되며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그렇다면 월정사 8각9층석탑이 왜 국보 48호로 지정 되었는지 나로서는 알수 없다.
어느 한 사람이 자기 기준의 설명이 타 웹문서나 싸이트에도 의미없는 복사 설명만 되풀이 되는 것에 나로서는 심한 불만에 이 글을 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삼국시대 대략 서기 3세기 이후에 들어와 6세기경 이후 신라에서 중흥을 맞게되며 통일신라 시기를 거쳐 고려로 그 맥을 형성, 유지하고 조선시대에는 억불이란 고비를 맞게된다.
신라의 원효의 유심일체조의 해동종이 대승불교의 주창이 되었으며, 통일신라의 불교는 귀족적, 교리적 성격을 띄며 이에 따라 우리는 그 시대의 조형물의 세련된 귀족적 모습을 접하게 된다.
우리나라 옛 조형물들은 대부분 불교 속에서 존재하며, 불상, 석탑, 석등등의 조형물이 주종을 이루는데, 통일신라시대의 조형품들은 한 장르의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신라 천년의 유산속엔 그 문화의 완성품들 꽃 피우게 된다.
이루말하면 신라시대에 석탑의 모델이 제시되고, 삼층석탑으로의 발전은 감은사 3층석탑의 빼어난 조형적 완성미로 그 마감을 하였으며, 불상은 도피안사의 철불의 길쭉한 모습에서, 또는 경주 남산의 삼존 마애불에서 석굴사 본존불위 미소로까지 그 美의 절정을 맞이하였고 석등은 불국사 대웅전의 석등이 가장 완벽한 한국적 요소로 그 기본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3층 석탑의 조형적 완벽한 美의 결실이란 점은 아래 탑의 기본이란 부제에서 논의하며.)
이런 모습의 융성한 예술도 신라 천년사 마지막의 향유와 쾌락으로 국운이 쇠하고 왕건의 고려로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의 개괄적 역사를 보면, 신라 귀족들의 향유와 퇴폐속에 각 지방에서 세금을 거둬가면 서라벌에서 치부로 각 마을로 돌아오는 것이 없게되고, 백성은 궁핍하여 도탄에 빠져도 포석정에서 잔 돌리며 화백회의를 하는 식의 귀족들의 잔치에 견횐 전주 대도독은 (신라의 지방도지사격) 궁핍해지는 전라 주민들의 봉기에 앞장서 대가야( 합천)까지 습격하였고, 또한 원주의 군부 책임자 양길도 지방 백성들의 궁핍에 따른 사회적 동요에 마음이 돌아가게 되었 의적의 길로 빠지게 되며. 양길의 아래엔 철원의 궁예. 또 그 아래엔 개성의 왕건의 휘하의 反 서라벌, 反 귀족적 세략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고려초기엔 왕족의 대각국사 의천의 교주선종이론이 대두되나, 보조국사 지눌의 선주교종의 돈오점수의 이론으로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설이 나오는 현대까지 약 천년간 이땅에 불교는 지눌의 교화적 사상의 정혜쌍수의 대승 불교의 선종의 맥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불교 양식을 이해해 본다면, 통일신라의 귀족적 예술의 완성이란측면, 즉 3층석탑의 정형으로 감은사 탑과 석등의 전통양식으로 불국사 대웅전의 석등등의 조형미는 석굴사 본존불의 불상과 더불어 사각형의 공간 분할의 하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추구한 것이다
이제 고려에서는 신라의 조형적 완숙미의 탑과 석등, 불상의 예술보다 더 심오한 세계를 그려 내기엔 타 방식의 도입뿐이라 할수있고, 그러기에 찬란한 신라의 예술은 그곳에서 종지부를 찍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불교사적으로 본다면 교리위주의 귀족적 불교에서 선종계 불교의 평민적 사상의 불교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인 것이다.이것이 신라 문화의 계승 발전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의 선회의 계기가 되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 그에 따른 사상으로 인하여 제반 문화도 바뀌는데 사가들은 아직도 신라의 문화만 전통성이란 단어를 붙이는 모순을 자아내고 있다.
조형미의 완숙이나 세련미가 뒤 떨어 진다고 전통성이 아니라 이형이라면 그건 곤란하다. 미술사에서 사실주의가 더 기품이 있는가?? 아니면 폴, 고갱의 표면주의가 이 시대의 앞장인가?? 한 시대의 문화를 타 시대와 이꼴 관게에서 따진다면 그건 크나큰 모순을 불러올 수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엔 역사적으로 문화의 단절은 딱 한번 있었다.백제의 멸망과 더불어 600년의 백제문화는 끝나고 더 계승되지는 못했다. 이것은 이웃 중국은 전쟁으로 국가의 존폐가 결정 되었지만( 중국역사에 딱 두번만 제외하고는)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는 백제의 전쟁으로 인한 멸망 이외엔 통일신라에서 고려 왕건으로 또한 조선의 이성계도 전쟁을 통한 국가획득디 아니라 엎어치기 이였기에 그 문화의 변형적 수용이 불가피해 지는 것이다.
물론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설엔 백제인 아비지의 기여가 크지만, 우리가 지금 정리하여보면 백제의 문화와 신라의 문화양식의 표출엔 좀 다른 감상을 느낄수 있다. 여기서 백제인의 조형 표현엔 두툼한 볼륨의 인정많은 인상이라면 신라인의 조형은 날씬하고 세련된 귀족형문화의 표출인 것이다.
또한 황룡사 9층 목탑은 그 규모면에서 아마 세계 최대의 수치를 자랑한다.3만평의 면적에 울타리 공사만 14년, 목탑의 높이는 9개층 전부의 최고 높이는 67m, 아마 지금 건물로는 25층 이상의 목조건물 이고 그 공사기간은 무려 90년, 100톤이 넘는다는 대종의 공사까지의 기간까지 합하면 무려 200년 가까운 세월의 공사기간이다.< 에밀레종은 24톤이다>
그러나 이 목조건물은 고려시대 몽고란에 < 90년간 > 몽고의 건물들보다 크다는 이유로 무지한 몽고인들이 불을 질러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지금도 재건의 계획은 없다 한다며 또한 大鐘은 몽고로 반출되어 가는 도중 유실되었다 한다.
이토록 목조건축물의 수난과 목조 탑의 제작의 까다로움에 이후로는 내구성이 강한 화강암의 소재를 택한 석조 탑으로 대체하게 된다.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이 현존 最古의 탑으로 그 탑은 석재를 이용하여 마치 목재의 탑의 느낌을 만들었고 이후로는 모든 석탑들이 기간부의 면석에 기등을 만드는 것이여다
또한 다층의 규모가 큰 탑이 사라진 이유는 도선국사 이후 우리나라 모든 지형엔 2층 이상의 건축물이 풍수사상에 않 맞는다는 이론이 등장하여 이후로는 2층 이상의 목조 건축물이 쇠퇴하여 간 것이다.
미륵사지 5층 석탑이 현존 最古의 석조 탑파를 찾을수 있으며, 이 제작엔 면석을 우주의 기둥으로 분할 하는등 석재의 조각에 목조의 모양을 따른것이고 이후 모든 석탑들이 이 방식을 전개해 나간 것이다.
이제 월정사 8각9층 석탑을 둘러보기에 앞서, 이 석탑을 이형이라 하면 과연 정형의 탑파 양식은 무엇인가??
史家들은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의 감은사 3층석탑을 정형으로 보건데, 그러나 찬미의 글은 별로 없다.그렇다면 이 탑은 무엇이 우리를 매료시킬까??
이 부분은 석탑의 생명선에서 다시 거론하며이 글의 종미로 월정사 8각9층 석탑의 의미는??
통일신라시대의 찬란한 문화는 완벽한 세계의 추구로 더욱 발전계승할 공간의 여지가 없는듯도 하지만, 시대는 바뀌어 신라의 귀족제도에서 왕건의 평민적 사상에 힘입어( 왕건의 평민적 사상이란 없지만 그는 신라 침공시 민가의 약탈자는 처형한다는 군률로 도의적 전쟁으로 후일 신라의 투항하는 계기가 되는 사상들,,)
고려시대엔 신라의 중앙 집권이 지방 분권화 되면서 지방 호족의 등장과 평민들 사상이 싹트게 되며, 이는 불교의 선종사상의 수입이란 대 명제와 맞 물려 돌아갔기에 고려의 불교는 깨치고 딱는 돈오점수의 대중적 교화의 사상이 지배적이며 당시 문화의 수입 배경엔 중국의 송나라를 기조로 하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송나라는 10세기에 중원에서 200년 이후 남송으로 이동하여 150년의 그 힘과 부의 마련은 철기(주물) 생산과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으로 주철의 수출에 힘입어 가장 많은 시인과 묵객을 배출한 중국 최고의 르네상스 시기를 구가 하였다.
< 그 내용은 나의 글 '"황사는 天災인가?? 人災인가??""에 참조>
당시 송나라의 이웃 고려로서는 한시대를 풍미했던 신라의 복고가 아니라 황금기의 송나라가 선진문물이 수용되었고, 월정사 8각9층 석탑도 당시 송나라에 유행하던 8각탑의 다각적 수용의 상태이다.고려시대에는 신라의 4각 3층석탑의 단순함에서 벗어나 넉넉한 곡선의 이 8각 석탑의 시기였다.
북한의 묘현사 8각탑등 북에는 다수의 팔각탑이 있으며, 남한에는 월정사 8각9층 석탑, 수종사 8각 5층석탑, 묘적사 8각 7층석탑이 현존한다며 남방 한계선의 마지막이 월정사 8각탑이 된다.
그 하나 하나를 분석하여보면 묘적사 8각7층 석탑은 그 곡선의 비례로 보면 원래는 8각 11층 석탑 정도 이었슬 것이고, 자세히 보면 아래 3층과 그 위의 곡선은 어긋나 다시 개축한 점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 두 부분의 돌의 산지도 좀 틀린점과 낙수면 꼭지점에 풍경을 달던 핀 고리의 틀린점을 알수있다.
월정사의 탑은 높이가 15m로 장대하며 그 여유로운 곡선은 우리 탑의 정형이라는 감은사 3층 석탑탑의 도도함과는 상반되는 내면의 美를 자아내고 있다.
월정사 8각 9층 석탑의 예찬은 아래 탑의 생명이란 글로 미루며, 과연 문화란??한 시대를 이루어 나가는 문화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전통성과 정형은 어떤것인가?? 그 기준을 나로서는 알수 없지만....한 시대( 통일신라) 의 예술의 발전이 완성품으로 끝나고 사상이 변혁된 다른 시대에서도 과연 그 예술만으로는 충족할수 있슬까??
다소 美的 질이 떨어진다해도 다각적 사상 즉, 불교의 서민화에서 각 지역의 문화가 표출됨도 당연하고 선진 송나라 문화의 수용도 당연 하였으리라.
그럼 우리는 신라의 우수한 문화는 정형이고 전통성을 부여할수 있지만 그 다음 시간의 역사들을 그 잣대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크나큰 괴리를 가져올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세대의 문화는 그 문화의 완성시간까지 보아주지 못하며 무조건 알수없는 이형이라고만 못박음은 큰 과오이리라 생각한다.
이것이 나의 월정사 8각9층 석탑에 대한 이해이며 그 美적 찬가는 다음 페이지 " 탑의 생명선은??" 에서 열거하기로 한다,
또한 아울러 史家들은 이제는 북한에 있는 팔각탑들과 비교하여 월정사 팔각탑의 조형적 연구도 이루어지길 기대하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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