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적사에서...(경기도 와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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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후세 작성일13-05-26 23:56 조회9,521회 댓글0건본문
[ 나물 뜯으러 간게 묘적사에서 놀기만 했습니다]
올 봄은 봄이와도 봄갖지 않다는 春徠不死春이라는 오랑캐의 봄이었던가??
어제 5월 첫주의 일요일엔 그 징그럽던 변덕의 날씨는다 지나간듯
모처럼 봄날의 남풍이 불어 오는닷,
봄의 回春에 동구밖 가까운 야외로 ,,,,
앞에 동그란 항아리는 오락적인듯한 물속의 시주함이다.
물론 이게 나의 시주인듯 하지만,,,나는 동전을 위 사진의 연못속 시주함 구멍에 던졌다.
항아리에 골인이 되지않자 옆에서 나의 평생 비서 하는말,,, 복 못 받겠다나...
나도 가만 못 있지... 아니...부처님은 大道라던데 그 하나 못 넣었다고 날 지옥에 버릴라고..
다만 돈 줍는 스님이 나의 돈을 건지자면 한길 물속에 쪼물락 쭈물락 거려야하니 고생일따름이겠지.
저는 종교는 아직 무교입니다.
무엇을 배척하는것은 아니고, 앞으로도 그러한 자연인이길 바랍니다만,,,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저도 절에는 자주 놀러 갑니다.
서양의 사원이나 성당엔 인류문명 발달의 문화적 역사사 숨쉬지만, 우리의 교회는 도회지
에서 잿빛 콘크리트나 벽돌로 높이만..그래서 외부인은 놀러갈 공간이 않되는 느낌이지만,,
산사의 절간은 나에게로 이어져 내려운 천년의 역사문화가 숨쉬고 있으며, 우리의 생활문
화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기왕 내가 매번 생각하는 후세 특유의 농담으로 하겠습니다.
교회가 문화공간이 아니란 점은 아닙니다.
서양의 건축양식에 돔의 출현,,, 다음 고딕의 출현등의 역사는 인간 고정관념의 사고를 탈
피하는 좋은 예입니다만,,, 우리네 교회는 놀러가보기엔 담과 벽만 높은듯 합니다. 허나
산속의 절은 입장료를 물고서도 구경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조의 개국에 억불, 배불숭유정책을 쓰지만 그건 역사의 오해이다. 왜냐면??
고려 500년역사가 사라지는 원인을 이성계는 불교라 떠 밀지만, 저는 곰곰히생각해 볼때.
몽고항쟁의 90년간의 비폐와 이에 따라 왕권의 약화에 무신정권의 3대 60년간, 마치 조선
말에 외척 3대 60년과 같은세월을 중앙 왕권의 허약해진점과 이에따라 볼모에서 돌아온
공민왕의 국내 역사나 사정은 모르고 그러다 보니 죽은 노국공주에 미쳐 국정이 또 한번
신돈에게 최면이 걸려서 난잡해지니...
물론 이때나 조선에서왕권의 큰 결함은 요즘같은 왕의 탄핵이 없이 세력다툼의 실세들에
게만 이익이 돌아가는 부패가 가장 큰 원인 아니였던가??
이성계는 멸망하는 고려를 잡고 다시 일으켜 세우며 선양하고자 하였지만, 그 자신도 무
신출신으로 고려멸망 원인을 최충헌 무신정권의 중방정치의 폐라고 말할수 있었던가??
그런 논리적 모순을 탈하고자, 려말 정몽주등 주자학이 대두되며 이를 유학을 건국이념
으로 삼고 정책은 배불숭유이지만 이성계의 원찰은 어디이던가??
신륵사 뒷산을 조금 돌아 올라가면 종형의 큰 부도 두개가 있다. 이것은 나옹화상와 그의
제자 무학대사의 부도이다. 그럼 두말할 여지없이 이곳이 이성계의 원찰 아니겠는가??
이후 모든 왕들은 모두들 죽어 위패를 모시는 원찰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불교는 과거 천
년간 ,<당시로선 5-6백년간> 불교는 우리의 생활 자체였기 때문일까??
물론 신라나 백제의 왕들도 그들이 거처하는 왕궁보다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 크게는 20
칸에 고색창연한 단청과 사찰의 가람규모는 왕궁보다 큰 곳도 있지 않은가??
이성계 이하 모든 왕들은,,, 우리의 역대 왕들은 모두 절간이 궁궐보다 큰것도 순응 하였지
만, 분서갱유를 한 진시황이라면 왕궁보다 큰 사찰을 전부 불 질렀슬까??
지금 우리가 보아도 어마어마하고 당시로선 크레인이나 장비도 없이 무척이나 스케일이
크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이는 중생들 마음속에 왕권보다 교리의 부처님 믿음이 더 깊은것을 반영하는것 아닙니까??
역사속의 모든 신도들은 부처님展을 제일 큰 건축으로 남기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불자들이 넘이 뭐라그래도 부타에 대한 예의심이랄까??
이것은 교인도 아닌 나로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인것이다.바로 그점이 돈 주
고도 사찰을 구경하는 이유 아닐까 합니다.
허나 지금의 우리의 교회들의 그런 면모는 나로서는 알수없다.
이는 역으로 우리의 크리스쳔인들도 역사에 문화를 장식하고 기록함에 노력은 더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 어떤 교리의 예찬이나 비평은 아닙니다. 이 후세백작은 그런 논지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허나 이성계의 불교 금지엔 무언가 이해되지 않는 점의 나의 생각인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들의 울 나라 역사의 이성적 , 자주적 판단이 없었다고 그냥 이성계의 숨김
도 모르고 그냥 그말을 베껴 우린 역사를 배운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역사엔 정말 이런부분들이 많습니다.
그 첫째가 기자조선의 식민화라 그러는데 그 위치는 대동강쯤으로 오류적인 해석도,,,
기자조선의 의미와 그 지역을 이젠 좀 알수있슬것 같은데 울 역사가들의 기지가 좀 있어야 할게,,,
우리 역사는 모든 부분들을 다시금 판단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지난 역사의 옳고 그름의 판단만이 아니라 그것이 국력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서안의 피라밋, 이제는 개개인이 구글 어스로도 확인되는대 중국은 그를 방치하는가??
아니 만리장성이 세계 제일이라 떠들며 팔아 먹는 짱게넘들...
우리의 우리의 동이족들의 무덤들의 피라밋을 개봉해야....
그런데 우리의 역사가들은 동이 (東夷)할때 오랑캐 이자를 쓴다... 미친넘들,,, 우리가 스스로 오랑캐란 말인가...
이 동이(東彛)의 어원과 한문표시는 담으로 한다
우리는 지금 동이란 단어를 東彛(떠떳할 이)로 고쳐 써야 한다. 이게 역사학자들의 일거리인데...
언젠가 TV에서 어느 역사학자왈 夷자는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지랄두..
이것은 위지동이전에서 위나라 이외의 부족은 모두 동이( 동쪽의 오랑캐로 부른것 입니다)
그런데 역사학자가 국민들 보는 TV에서 활을 잘쏜다고 무식질하던 역사를 모르는 역사학자 이름은 공개하지 않습니다.
東彛라 불리던 이점은 길게 다음에 설명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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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묘적사는 신라때 창건하여 효종땐 이완장군의 첩의 아이디어로 북벌계획에 10만 대군
을 산속에 승려로 둔갑.승병들의 지역 사령부격을 지낸 사찰입니다.
대웅전 앞의 당형 팔각칠층 석탑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원래는 약 11층 석탑이지 않았슬까
하지만 저의 눈엔 9층 탑이였슬 것이란 점입니다.
이 묘적사 대웅전및 당우 몇채는 근자에 재건한 것이며 조금 원형에서 이탈된 석탑만 전래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마져 없었더라면 우린 지금도 산속에서 가끔보는 폐사지로 전략하였슬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 기둥을 보고 나는 평생지기에게 또,,,
야, 야~~
이 기둥은 아마 삼천년은 거뜬히 갈껄,,,
삼천갑자 동방삭이 올때까지....
관세음보살 나미아블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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