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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옹스님 - 왜 오대산 상두암에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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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일월 작성일17-07-05 10:39 조회9,656회 댓글0건

본문

나옹스님은

 

1. 물같이 바람같이 세상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시고 갔다.

   사람은 물이나 바람없이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이나 바람은 자기자랑은 아니 한 듯 합니다.    

2. 나옹스님은 원나라 수도 연경에서 인도스님 지공에게 배웠다.

   지공스님의 지시를 받고  인도 나란다 대학처럼 불교인재양성을 위하여

   양주 회암사를 중수 하였다고 합니다.

3. 불교중흥을 위하여 2,000여명의 제자들을 키웠다.

4. 「나옹화상어록(錄)」 1권과 「가송()」 1권이 전한다.

5.  제가 청년 때는 청산은 나를보고 - 라는 시만 보았으니 

나옹스님은 말없이 청산에서 수행하시다가 조용히 가신 분으로 알았으나

이 땅의 불교중흥을 위하여 노력하신 많은 업적들을 높이 경배합니다.

끝으로 오대산 상두암에 가신 이유는 여기 오신분들의 상상에 맡깁니다.

 

이하내용은 퍼온 글입니다.

 

1.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 )」
이 시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이 시는 고려 말의 고승 나옹의 작품이다.
나옹은 충숙왕 때부터 우왕 때까지 활동한 승려로 법명은 혜근( 또는 ), 처음 이름을 원혜()라 했으며 법호를 나옹(), 머무는 곳을 강월헌()이라 불렀다. 성씨는 아()씨로 경북 영덕군 영해() 사람이다.
아버지는 선관서령() 벼슬을 지낸 아서구()이며 어머니는 정()씨이다.

2.
21세 때 친한 벗이 죽자, 무상을 느낀 그는 공덕산 묘적암()에 있는 요연선사()를 찾아 출가하였다.
충목왕 3년인 1347년 원나라로 건너가서 연경()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의 지도를 받으며 4년 동안 지냈다.
나옹은 견문을 더욱 넓히기 위해 중국 각지를 편력하며, 특히 평산처림()과 천암 원장()에게서 달마()로부터 내려오는 선()의 요체를 배워 체득했다.

3.
그 뒤 계속 전국의 유명한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던 중, 충혜왕 5년인 1344년 양주 천보산 회암사()에서 대오()하였다.
마침 회암사에 머물던 일본 승려 석옹()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았다.
충정왕 2년인 1350년 평강부() 휴휴암()에서 한철을 보냈고,
다시 자선사()의 처림()을 참견()하여 그의 법을 이었다.

4.
이듬해 명주()의 보타락가산()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육왕사()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하였다. 그곳에서 무상()과 고목영() 등의 승려를 만나 법론()을 벌였다.
1352년에는 복룡산()의 천암장()을 찾았는데, 원나라 순제()는 나옹을 연경의 광제선사()주지로 임명하였고, 금란가사를 하사하고 지극한 예우로써 우대하였다
1356년 개당법회()를 가진 후, 순제의 만류를 무릅쓰고 주지직을 내놓은 뒤 다시 지공을 찾아간다.

5.
나옹은 공민왕 7년인 1358년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에 은거한다.
그러나 공민왕과 태후의 간곡한 청에 의하여 잠시 신광사()에 머무르면서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때 홍건족이 잇따라 신광사 주위를 노략질하였지만 법력으로 신광사를 수호할 수 있었다.
그 뒤 공부선()의 시관()이 되었고, 1361년부터 용문산ㆍ원적산ㆍ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6.
1371년 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ㆍ바리를 하사받고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에 봉해졌다.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한 그는, 1376년 문수회()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7.
왕명으로 밀성(:) 영원사()로 옮기던 중 5월 15일 나이 56세, 법랍 37세로 여주 신륵사에서 입적하했는데, 이색()이 글을 지어 세운 비와 부도가 회암사와 신륵사에 있다.
나옹의 제자로는 자초(), 지천() 등 2,000여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錄)」 1권과 「가송()」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이다.

8.
그는 정도()가 혼침된 고려말의 불교계에 습정균혜()와 근수()ㆍ지혜로써 성불의 가능성을 보여준 고승으로서, 철저한 불이사상()의 토대 위에서 선()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즉 종래의 구산선문()이나 조계종()과는 다른 임제()의 선풍을 도입하여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나옹의 「귀의자심삼보()」의 주장과 ‘염불은 곧 참선’이라고 한 것은 이후의 우리나라 선종에서 계속 전승되었다.

9.
나옹의 참선시
「참선을 실행함에 많은 말 필요없다. 다만 말 달리듯 채찍을 더할 뿐
의단이 타파되어 눈 한 번 번쩍 뜨면 공겁() 이전을 비로소 비추리라.
화두()에 달라붙어 부디 놓치지 말지어다. 엎치고 뒤치면서 ‘이 뭣꼬?’라고만 하라.
끝없이 의심하여 불덩이처럼 될 때 문득 생사의 긴 꿈에서 깨어나리라.

--- 중략 --- 

[네이버 지식백과] 나옹화상(고려)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승려의 생활),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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