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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일대에 화전민이 급격히 증가한 이유(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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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3-12-05 10:26 조회5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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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첫날 오대산 적멸보궁을 다녀왔다. 아내는 취준생 아들을 위해 자주 절을 찾아 기도했다. 오대산 적멸보궁도 그중 한 곳이었다. 간절했던 아내에 비한다면 난 건성건성 따라만 다녔다. 기도가 취업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따라다닌 건 절을 품고 있는 산이 좋아서였다. 아내의 간절한 정성이 통했는지 아들은 작년에 취업 관문을 넘어섰고, '염불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던 내겐 새해 첫날 오대산 통행 중 과속 단속 카메라에 찍혀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고지서에 오기가 생겨 다시 찾은 오대산은 설경으로 눈이 부셨다.
 
큰사진보기표지석 글씨는 쇠귀 신영복의 작품이다.
▲ 오대산 상원사 표지석 표지석 글씨는 쇠귀 신영복의 작품이다.

상원사 입구 표지석에는 쇠귀 신영복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상원사가 화재를 당한 후 법당과 선원을 분리해 지으면서 문수전 현판을 신영복에게 부탁하면서 표지석 글씨까지 쓴 것이다. 표지석에 쓴 글처럼 오대산 상원사는 문수 신앙의 성지이다. 상원사 입구에 있는 관대걸이에는 세조와 문수 신앙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세조가 등창에 걸려 오대산 상원사로 행차하여 상원사 아래 계곡에서 몸을 담그고 있을 때 지나가던 동자가 다가와 등을 밀어주어 등창이 나았다는 전설이다. 세조는 등을 밀어주던 동자에게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고 말하지 말라고 얘기했더니, 임금님도 문수보살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고 대답하고 홀연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세조가 등창에 걸려 오대산 상원사를 방문했다는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오대산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가 있었다. 강원도 각지에 있는 사찰 승려들이 교대로 오대산에 동원되어 왕조실록 사고 수직을 담당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고 수직에 동원되는 승려들의 부담도 크고 교대로 수직 하는 과정에서 각 사찰 승려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도 있었다.
 

강릉 부사 조명교가 올린 첩정 안에, '본부 오대산 월정사의 사고 참봉 정난귀, 총섭승 상순의 보고를 받으니, 「선원각의 창살이 꺾여 떨어지고 봉안된 궤의 문이 열려 책은 드러나고 책을 쌌던 붉은 보자기는 없기에 지키는 번승들을 하나하나 엄하게 조사하였더니, 양양 낙산사에서 온 번승 재명이 달게 듣고 승려 맹흔, 수안, 득청, 재형 등이 지교하여 이달 5일에 과연 변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내용을 사실대로 자복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부사가 급히 달려가 봉심하니, 《선원계보기략》 8권, 《선원보략》의 주의 8책은 다행히 없어지지 않았기에 궤 안에 수습하여 따로 자물쇠를 잠근 후 종전대로 봉안하였습니다.


고종 12년(1875년) 8월 2일 조선왕조실록 내용이다. 오대산 사고 수직을 둘러싸고 오대산 월정사 승려들과 양양 낙산사 승려들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서, 낙산사 승려들이 월정사 승려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수직 과정에서 고의로 사고 창살을 훼손하고 봉안된 궤를 열고 책을 쌌던 붉은 보자기를 없애버렸다 들통이 났다는 것이다. 오대산 사고를 지키기 위해 동원되었던 강원도에 속한 사찰 승려들의 부담과 갈등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대산 사고 주변에는 금표를 설치하여 일반 백성들의 접근을 엄금했다. 그래서 사고가 설치된 주변에서 화전을 경작했던 사례가 드물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오대산 일대 화전민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1913년 조선총독부는 오대산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일본 동경제국대학에 기증했고, 1922년 조선왕실 의궤를 일본 궁내청에 기증했다.
 

일제 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오대산 원시림을 무자비하게 벌목했고, 이 과정에서 오대산 일대에 화전민이 급격히 증가했다.
▲ 눈 덮힌 오대산 일제 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오대산 원시림을 무자비하게 벌목했고, 이 과정에서 오대산 일대에 화전민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후 오대산 일대에서 대대적인 벌목이 진행되었다. 오대산 월정사의 부채 정리 명목을 내세워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이후 30년간 오대산 산림 벌목권을 장악했다. 동양척식회사에 벌목권을 넘겨준 월정사 주지 이종욱은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장하는 친일 승려였다.
 

일제강점기, 오대산에선 수시로 목재가 실려나갔다. 나무를 베고 산 아래로 나를 노동력이 필요한 일제는 산 속의 화전민을 착취했다. 300여명이 이곳에 살며 벌목에 동원됐다. 국립공원 내 월정사와 상원사 사이 구간에서 당시의 화전민 집터 50여 기를 확인할 수 있다. 화전민 마을은 1975년 오대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때까지도 일부가 남아있었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마을 어른들의 증언에 따르면 월정사주변 화전민 마을은 주로 일제강점기에 형성됐고 약 150가구 300여명까지 살았다고 한다"면서 "이들은 산판(벌목) 일이 한가한 여름철에는 숲에 불을 놓아 밭농사를 지었고 겨울철에는 산판 일에 동원됐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2018.8.14. 기사)

 
오대산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을 일본으로 반출한 후 일제는 오대산 일대의 삼림을 대대적으로 베어냈다. 조선왕조실록 사고를 지키기 위해 화전이 금지되었던 오대산 일대에 화전민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벌목에 필요한 노동력 동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대산 월정사 국립공원 안에는 지금도 '회사거리'란 터가 있고, 목재를 실어 나르기 위해 설치한 목차 레일의 일부도 남아있다.

다시 찾은 오대산 눈부신 설경 사이로 조선왕조실록과 목재 수탈의 역사가 아프게 되살아났다. 

202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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