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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사고수호사(史庫守護寺) - 오대산 사고와 월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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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1-03-15 10:39 조회14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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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은 다양한 신앙과 역사를 품고 있다. 신앙에 따라 관음·약사·나한도량 등으로 구별하며 역사에 따라 능찰·비보사찰 등 다양하게 부르기도 한다. 주제가 있는 사찰 기행은 사찰의 신앙과 전해오는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는 기획이다. 그 일환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史庫) 수호사찰을 소개한다. 

 

지금은 환속한 혜문이 스님으로 있을 당시 2004년 여름, 그는 일본 교토에서 어학을 공부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교토의 유서 깊은 사찰을 둘러보고 유적을 탐방하던 그는 일본 학습원 대학 교수이자 도쿄대학 교수를 역임한 조선사 연구 권위자였던 쓰에마쓰 교수가 쓴 책에 수록된 ‘이조실록고략’ 논문을 접한다. 그 안에는 도쿄대 귀중 도서관에 <조선왕조실록>이 소장되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오대산 사고 전경. 아래가 실록을 모신 사각이며 뒤가 왕실 족보를 보관했던 선원각이다. 그 위가 사고 수호사찰 영감난야다.

 


2004년 혜문의 발견에서 시작된 환수
일본에서 귀국한 혜문은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해 계명대학교 배현숙 교수가 1984년, 1988년 도쿄대 귀중서고에서 직접 조사한 적이 있음을 알았다. 배 교수는 실록의 존재를 확인하는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관동 대지진 당시 화재로 도쿄대 도서관은 수십만권의 장서를 유실했다. 그 뒤 타고 남은 귀중본을 수습하여 목록을 작성하는데, 이것이 ‘대정 12년 이전 소잔본 목록’이다. 여기에 화재에서 살아남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기록도 적혀있었다. 이조실록 겉장에 그 내용을 담은 메모가 붙어있었다.


혜문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월정사를 찾아 약탈 경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지 확인했다. 조사 결과 월정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오대산 사적’에 유출과정이 적혀있었다. “총독부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히쿠찌(桶口)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趙秉璇) 등이 와서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史庫)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史冊) 150 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대학으로 직행시켰다”고 기록돼 있었다.


2006년 3월3일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 봉선사 주지 철안스님을 공동대표로 하는 조선실록환수위원회가 출범했다. 불교계를 중심으로 김삼웅 독립기념관장, 김의정 조계종 중앙신도회장, 배현숙 계명문화대 교수, 이이화 고구려재단 이사,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등 학자들이 나서고 강혜숙 김원웅 김영춘 노회찬 이광재 의원 등 정치인들이 힘을 보탰다. 재일동포 김순식, 이춘희 변호사를 선임해 도쿄대학과의 소송에도 대비했다. 법상스님과 혜문스님이 간사를 맡아 실무를 진행했다.

 


오대산 사고 수호사찰 영감사 모습.
 

반환 촉구 당사자로 나선 월정사
월정사 측은 조선 왕조가 월정사 주지를 오대산 사고를 관리하는 실록수호총섭(總攝)으로 임명했던 사실을 들어 반환 당사자로 나섰다. 스님의 이름으로 반환 촉구 공식 문서를 주한 일본대사관에 전달했다. 2006년 5월30일 도쿄대학이 오대산 사고본을 돌려주겠다고 발표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위가 공식 출범한지 3개월 만이었다. 불가능할 것으로 여겼던 일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결론 났다. 7월7일 서울대 규장각으로 돌아온 조선왕조실록은 그 해 8월11일 원래 있었던 오대산 사고로 귀향했다가 규장각으로 들어갔다.


오대산 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2002년 천혜봉 교수의 ‘한국해외전적조사연구회’의 조사를 통해 일본 궁내청에 ‘조선왕실의궤’가 보관돼 있음을 확인해, 다시 의궤 환수 운동이 펼쳐졌다. 조선왕조실록 반환운동을 했던 불교계를 비롯한 시민단체가 그대로 움직였다. 실록에 비해 의궤 환수는 지난했다. 정부가 보관 주체라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까지 나서 힘을 보탰다. 조선불교도 연맹은 조선실록 환수에도 성명을 내며 지원한 바 있다. 일본 정계 야당도 나섰다. 우리 국회가 결의문을 채택하고 소송까지 제기하는 등 전방위 압박을 펼쳤다.


마침내 2010년 8월10일, 일본 총리가 ‘식민지애 사과와 의궤 등 도서 반환’이 명시된 담화를 발표하고 11월 APEC 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도서반환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막을 내렸다. 1년 뒤 2011년 12월6일 오후 도쿄 인근 나리타 공항에서 도서를 실은 대한항공 두 기가 책을 싣고 왔다. 조선왕실의궤를 비롯하여 90년 전 일본이 가져갔던 도서 1200권이 실려 있었다.


혜문은 조선실록과 의궤의 반환에 대해 “함께 뜻을 모은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과 희생” “조선시대 실록을 관리하고 있던 불교계가 직접 나서서 ‘법정소송의 논리를 개발하고 도쿄대학을 압박한 것이 주요한 성공 요인이었다”고 평했다. 실록을 보관했던 불교계가 주도하고 정치권 시민사회 학자들 그리고 북한과 재일교포, 일본의 양심 있는 정치인들까지 나선, 민족과 국가를 떠난 양심의 승리였다.


사고 수호 총섭은 월정사 주지였다. 승군이 사고를 지켰다. 그 터가 남아있다
 

‘기증’이라는 도쿄대에 화답한 서울대
문제는 환수 결정이 난 뒤 국내에서 불거졌다. 환수위 측은 조선실록 반환을 식민지배를 자행한 일본의 사과과 반성의 계기로 삼고자 했다. 조선왕조실록이 국내에 없어 돌려받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강제로 병합해 이 땅을 고통에 몰아넣고도 진지한 반성을 하지 않은 일본이 늦었지만 반성하고 돌려주기를 희망했다. 식민지배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 국민들에게도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히고 지금도 동북아와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상처로 남아 있기 때문에 조선왕조실록이 과거를 씻고 화합 공생하는 ‘해원의 한 마당’으로 삼고자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도쿄대와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만행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았으며 서울대는 환수 의미보다 실적을 우선했다. 환수가 아니라 굳이 ‘기증’이라고 강변하는 도쿄대를 서울대는 자극하지 말자며 “돌려받는데 의의가 있다”는 식으로 의미를 왜곡했다. 심지어 불법으로 점령한 식민지 통치 기구인 통감 재산이라는 이유로 소유권이 서울대에 있다고 주장했다. 실적에 눈이 멀어 불법점령기구 마저 합법화 하는 망발을 서슴치 않은 것이다.


더 한심한 것은 정부가 오래 전 도쿄대학에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방치했다는 사실이다. 1997년 일본 도쿄에서 열렸던 국제기록보존기구 동아시아 지역협의체 총회에 참석한 당시 국가기록원 관계자들이 총회에 참석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파악하고 반환하여 달라고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포기했었다. 정부가 하지 못했던 일을 불교계와 민간이 나서 비용을 들이며 찾아오자 소유권부터 주장하고 자신들의 치적 쌓기에 이용한 것이다. ‘조선의 혼’으로 삼으며 정성들여 제작하고는 보관은 그토록 멸시했던 스님들에게 맡겼던 조선의 관리와 유가(儒家)들이 하던 행태와 다를 바 없다.


2월3일 입춘(立春), 전국에 걸쳐 폭설이 내렸다. 오대산에도 눈이 쌓였다. 월정사에서 지장암과 부도 밭을 지나 상원사로 가는 선재길도 눈에 덮였다. 한참을 걸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아스팔트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1km 가량 가면 건물을 만난다. 오대산 사고다. 입구 위 사각(史閣)이 있고 그 위에 선원보각(璿源寶閣)이 서있다. 새로 건립한 건물이다. 사고(史庫) 뒤는 사찰이다. 영감난야(靈鑑蘭若)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난야는 스님이 수행하는 작은 토굴이나 암자를 일컫는다. 사고 옆에는 사고를 수호하는 병사들이 머물던 수직 터가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실 족보인 <선원보략(璿源普略)>을 보관했던 오대산 사고(史庫)는 1606년(선조 39년)에 설치됐다. 1605년 10월 상원사를 사고지로 선정했다가 이 곳으로 옮겼다. 월정사를 사고 수호사로 지정했지만 너무 멀어 영감사를 수호사찰로 지정했다. 물 불 바람의 재화를 막을 수 있는 길지(吉地)라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역사서를 보관하기 적절한 곳으로 선정됐다. 자연의 재화는 막았지만, 스스로 나라를 지키지 못해 결국 이민족에게 빼앗기고 그마저 불타 소실됐으니, 적은 자연이나 외부가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교훈이다.


전주사고본을 토대로 새로 만든 4 가지 복사본 중 교정본을 보관했다. 오자와 탈자가 표시돼 있어 희귀성뿐만 아니라 학술적인 가치가 크다고 한다. 첫 봉안 뒤 1805년(순조5년)에 <정조실록>을 봉안하기까지 59회 가량 행해졌다. 오대산 사고 실록을 수호하는 총섭은 월정사 주지였으며 수호군(守護軍) 60명, 승군(僧軍) 20명이 수직(守直)했다.

 


2007년 오대산 사고 앞에서 일본 정치인들에게 설명 하는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불교신문 자료사진).
 

학술 가치 높은 원 교정본 보관
1910년 국권을 강탈 당하고 사고도 서울로 강제로 이안했다. 오대산본은 그러나 1913년까지 월정사 주지 보호 아래 있다가 이 해 10월 동경제국대학 부속 도서관으로 반출됐다. 일본이 조선 강점기 초반에 그들 식으로 강압 통치를 했다가 저항에 부딪히자 통치 전략 차원에서 연구용으로 가져갔다. 일본 학계 요청을 받아 당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이를 받아들여 시로토리(白鳥庫佶) 도쿄대 교수와 함께 오대산본 760여 책을 도쿄대에 반출했다.


당시 도서를 운반했던 촌로에 따르면 실록을 마차에 싣고 진부로 옮겼다가 다시 강릉으로 옮긴 후 배로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고 한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대부분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도쿄대 도서관에 <중종대왕실록> 30책, <성종실록> 9책, <선조소경대왕실록> 8책 등 47책이 소장돼 있다는 것이 알려져 환수위를 통해 다시 돌아왔다.


사각과 선원보각 두 건물은 일제 때까지 남았지만 한국전쟁 때 불에 탔다. 월정사는 전쟁 당시 남과 북이 대치하던 접경이었다. 전쟁 초기에는 화를 피했지만, 국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반격하면서 격전지로 변한다. 월정사도 이 때 적광전 앞 탑만 남기고 모두 불타고, 상원사 만이 한암스님 덕분에 화를 면한 바 있다. 현 건물은 1989년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복원에 착수해 1992년 준공했다.


불교계가 주도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환수는 1965년 한일협정 이후 다시 돌아온 최초의 국보급 문화재의 귀환이자 약탈된 문화재 환수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획기적 사건이었다. 환수 과정은 한국 뿐만 아니라 조선불교도연맹, 재일본거류민단 등 북한과 일본 동포에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정치인들까지 가세한 동북아 평화운동이기도 했다. 환수위원들은 “강제 징용에 끌려간 형제를 찾는 마음으로, 위안부로 잡혀간 누이를 찾는 마음으로” 나섰다. 두 번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이 땅에서 벌어지면 안되는다는 가르침을 영감사 오대산 사고지기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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