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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신문]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22> 고려 초기 개청·신의·홍각·홍법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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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8-07-21 08:43 조회89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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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ㆍ신이함 헤아릴 수 없는 
중생의 도사…선각자 ‘개청’
강릉 보현사 중창…선풍 펼쳐

월정사 중창불사 ‘두타 신의’
철저한 두타행 자체가 선풍 

경전탐구, 선지식 찾아 수행
봉림산문 현욱의 제자 ‘홍각’
헌강왕 궁궐서 ‘능가경’ 설해 

진리의 등불 꺼지지 않고 상속
모든 제자 ‘홍법’ 법수에 젖어
성종 목종 대 국사ㆍ왕사 책봉

강릉 보현사 사굴산문 개청 낭원대사탑비(문화재청 제공).

큰 숲은 크고 작은 다양한 나무들과 이름 모를 풀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큰 나무만이 숲을 이루는 주인공으로 부각될 때가 있다. 한국의 선사상사도 수많은 승려들에 의해 큰 물줄기가 이루며 도도히 흘러간다. 불교사에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려 초기에 선풍을 드날렸던 몇 선사들이 있다.   

개청(開淸, 835〜930년)은 사굴산문 승려이다. 속성이 김 씨, 경주에서 출생했다. 8세부터 수재로 알려졌으며, 유학을 공부했다. 출가해 화엄사의 정행(正行)에게 배우고, 강주(康州)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충청도 금산(錦山)으로 가서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경전을 열람하며, 참선했다. 후에 선지식을 찾던 중 법력을 듣고 범일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머문 지 얼마 안 돼 심인을 받았다. 범일의 입적 후 사굴산문을 지켰지만 이후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이 발생해 강릉 보현사(지장선원)로 옮겨가 사찰을 중창하고, 선풍을 펼쳤다.

개청의 비문에 의하면 “구릉을 깎아 멀리까지 도로를 만들고, 또 전탑을 높이 세우며, 문과 담장을 활짝 여니 멀리서부터 오는 자들이 구름떼와 같았다”고 한다. 당시 보현사 지장선원에 수많은 납자들이 모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선사는 명주 군수 왕순식과 인연을 맺고, 스승 범일과는 다르게 경애왕의 초빙에 응했으며, 국사가 됐다. 왕순식의 연결로 고려 태조 왕건과도 인연이 되기도 했다. 

복원된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개청은 법랍 72세, 세연 96세로 보현사에서 입적했다. 비문에 선사를 “미혹한 중생을 제도하고자 지혜의 횃불을 비추었고, 고해(苦海) 중에 자비의 배를 항해하셨다. 지혜는 걸림이 없고 신이한 마음은 헤아릴 수 없다. 중생의 도사(導師)이며, 모든 이들의 선각자”라고 묘사하고 있다. 선사가 당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고려 태조가 ‘낭원대사(朗圓大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 이름을 오진(悟眞)이라고 했다(강릉 보현사 낭원대사 오진탑비, 보물 제192호).

신의(信義)는 사굴산문 승려로 범일의 제자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인물이다. 선사는 ‘두타(頭陀) 신의’라고 불릴 정도로 철저한 두타행자였다. 신의는 월정사와 관련 있다. <삼국유사>의 월정사에 관한 내용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온 643년 현 월정사 절터에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을 친견코자 했다. 하지만 자장은 문수보살을 친견하지 못하고, 태백산 정암사에서 입적했다. 이후 신의 선사가 이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다가 입적했다고 한다. 곧 신의선사가 월정사를 중창불사한 인물이다. 신의선사를 통해 월정사가 사굴산문의 선풍이 펼쳐졌을 것으로 추론해본다. 

홍각 이관(弘覺利觀, 810˜880년)에 대해서는 기록이 정확하지 않다. 봉림산문 승려라고 하지만 가지산문의 승려라고도 한다. 선사의 행적이 드러난 것은 강원도 양양군 서면 미천 선림원지(禪林院址)에 있는 비문이다. 미천골은 ‘하늘 아래 첫 동네’라는 데서 유래한다. 미천(米川)이란 쌀뜨물이 흘러내려 가는 시내라는 뜻이다. 곧 스님들 공양 시간이 다가오면 시냇물이 온통 허예질 만큼 많은 쌀뜨물이 냇물로 흘렀다는 것으로, 대중이 많이 살았다는 큰 절을 의미한다. 이 미천골의 사찰은 선림원이다. 

국보 제102호 홍법국사실상탑(국립중앙박물관).

홍각은 속성이 김 씨로, 경주 출신이다. 17세에 출가했다. 유학에도 해박했으며 경전을 연구한 뒤 선지식을 두루 찾아다니며 수행했다. 어느 해 해인사의 노스님들을 찾아뵙자, 노스님들이 ‘후생가외(後生可畏, 젊은 후학이 매우 뛰어나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라며 홍각을 칭찬했다. 이후 홍각은 설악산 억성사에서 염거(廉居, ?˜844년, 가지산문 2조)선사에게 법을 구한 뒤 합천 영암사에서 수학하다가 봉림산문 현욱(玄昱, 789˜869년)의 제자가 됐다. 다시 873년 설악산 억성사로 돌아와 사찰을 중창하기도 했으며 점차 법력이 높아지면서 선사 문하에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헌강왕(875˜885년 재위)이 궁궐로 초빙하자, 선사는 궁궐로 가서 <능가경>을 설하고, 바로 사찰로 돌아왔다. 선사는 880년(헌강왕 6년) 억성사에서 입적했다(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홍각의 비문이 발견된 선림원지는 사림원(沙林院)이라고도 해, 염거의 도량 억성사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비(碑)는 제자들의 건의에 따라 886년(정강왕 1년) 10월 양양 선림원에 건립했으며, 비문은 수병부랑중(守兵部郞中) 김원(金?)이 지었다. 김원은 이전에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寶林寺 普照禪師 彰聖塔碑, 가지산문 3조)의 글씨를 쓴 바 있어 문장과 글씨에 능통했던 인물이다. 홍각의 비문은 신라말 고려초기의 선사상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홍각선사비는 본래 강원도 양양 선림원 터에서 발견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비신이 깨져 현재 일부만이 전한다. 

홍법국사(弘法國師)는 고려 전기 인물이며 충북 충주에서 활동한 선사이다. 어찌된 일인지 홍법에 대한 기록이 선종사에 전하지 않는다. 필자가 근자에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해 예전에 없던 탑과 비를 발견했다. 수많은 탑비와 탑을 보았는데, 홍법국사의 탑은 예술의 최정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년 전 중국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설봉사의 수많은 승탑들을 보고, 느꼈던 감회가 다시 떠올랐다. 홍법의 탑은 고려 현종 8년(1017년) 제작됐는데,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탑으로 섬세한 조각과 단조로운 무늬가 조화된 수작으로 꼽힌다. 홍법이 선사였던 점을 감안해 자료를 찾아보니, 미처 몰랐던 보물 같은 자료가 있었다. 필자를 비롯한 한국불교학자들은 늘 한정된 인물만 가지고 쳇바퀴를 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상탑 옆에 나란히 있는 홍법국사 실상탑비.

홍법선사의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기록이 정확치 않다고 한다. 선사는 대략 920년 중반인 12세에 출가했다. 출가한 사찰은 정확치 않다. 대략 그의 출신지가 충주인 것으로 보아 인근 지역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홍법은 930년(태조 13년) 마하갑사(摩訶岬寺) 계단(戒壇)에서 수계했다. 고려 태조는 관단사원을 설치하여 구족계 수계를 국가 차원에서 관장했는데, 이에 대한 첫 번째 사례가 홍법국사의 경우였을 것으로 추론한다. 마하갑사는 오관산(五冠山)에 소재한 사찰이었고 오관산은 개경의 대표적인 사찰지 였다. 순지의 오관산문도 고려 태조에 의해 개산한 점을 고려해볼 때, 홍법이 구족계를 받은 마하갑사 또한 왕권과 밀접하게 연관된 사찰일 가능성이 크다. 

비문에 의하면, 홍법은 “화양(華壤)에 가서 유학할 것을 결심하고, 입조사(入朝使)인 시랑 현신(玄信)의 배에 편승하여 아무런 사고 없이 운도(雲濤)를 헤치면서 바다를 건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점으로 보아 홍법은 930년도 중반 무렵 당나라로 유학을 갔을 것으로 본다. 선사는 절강성이나 강서성, 복건성 지역의 선지식을 찾아 구도를 이어갔다. 비문에 의하면, “삼라만상이 모두 파초와 같이 허무하다는 제행무상의 법문을 억념하여 법성(法性)이 모두 공(空)한 이치를 깨닫고 색신(色身)은 마치 환몽과 같음을 관하였으니, 선사에게 어찌 특별한 스승이 있었겠는가!”라는 부분이 있다. 홍법은 배움에 있어 한 스승만이 아닌 여러 선지식을 찾아 오랜 시간 구도 행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홍법국사는 개경의 보제사와 봉은사 등 사찰에 머물렀다. 홍법은 산문을 개산하고, 학인을 지도하였는데, 어느 누가 법을 물어도 답을 하는데 걸림이 없었다. 이를 비문에서는  “학인을 지도함에 어느 누가 법을 물어도 빠짐없이 대답해주는 것이 마치 대상에 놓여 있는 거울이 만상을 비추는데, 구석구석 어두운 곳조차 비추지 않는 데가 없는 것과 같다”고 묘사하고 있다. 비문에는 “육조혜능 이래 대대로 법이 상전하며, 진리의 등불이 꺼지지 않고 상속하였다. 모든 제자들이 스님의 법수에 젖었다”고 했다. 

홍법선사는 국사로 추증되면서 ‘대선사’ 호칭을 받았다. 대선사는 선종 승려에게 내리는 최고의 고승을 의미한다. 학계 기록에 의하면, 홍법이 대선사ㆍ국사로 인정받을 시기가 성종과 목종 대인데, 지금까지 전하는 문헌이나 금석문 기록에 성종과 목종 대에 국사나 왕사의 책봉을 받은 선사는 없었다고 한다. 이후 만년에 홍법국사는 정토사에 머물다가 목종(997~1009년 재위) 대에 앉은 채로 입적했다. 목종은 선사가 입적했다는 부음을 듣고, 국서로 조의를 표함과 더불어 공양품을 보냈다. 목종은 선사의 시호를 홍법(弘法), 탑명을 실상(實相)이라고 했다(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비).  

[불교신문3410호/2018년7월21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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