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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강원인물]한국 불교의 영원한 사표 한암스님(강원일보)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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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7-17 09:29 조회7,1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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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 스님.
[역사속의 강원인물]전쟁 중 온몸 던져 오대산 불교문화 지켜낸 이 시대의 큰스님

한국 불교의 영원한 사표 한암 스님-이홍섭 시인

1876년 화천에서 태어나
9세 때 존재의 실상에 의문 품고
유교경전에서 답을 못구하자
22세때 금강산 유람 중 홀연히 출가
수행 중 4차에 걸쳐 오도과정 경험

일제강점기 17년, 해방 이후 3년
불교계 최고 지도자 '종정'역임
'참선,간경,염불,의식,가람수호'
스님이 제정한 '승가오칙'은
참다운 수행자 정신 잘 담겨있어
탄헌·보문·난암 등이 수법제자
만해 스님은 한암을 두고
"이 나라 천지 7천 승려 가운데
뜻이 굳기는 한암 스님뿐" 평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국군이 오대산 상원사 불 지르려하자
법당 안 불상 앞에 좌정하며
"나와 함께 불 질러라"
그 기개에 놀라 문짝만 뜯어 태워
전각과 국내서 가장 오래된 동종
그렇게 전쟁 참화 속에서 살아남아

온몸으로 상원사 지켜낸지 두 달 뒤
가사와 장삼 갖춰 입고
단정히 앉은 채로 그대로 입적
법랍 54세, 세수 76세였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중공군에게 밀려 후퇴하던 국군에 벼락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사찰을 비롯하여 작전지역 안에 있는 모든 민간 시설물들을 소각하라는 지시였다. 그렇게 오대산 월정사는 전소되었다. 칠불보전을 비롯한 17동 건물이 모두 불탔고, 소장 유물들도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팔각구층석탑 (국보 제48호)만이 외롭게 남아 이곳이 천년고찰의 자리임을 밝혔다.

국군은 이어 오대산 중턱의 상원사로 몰려갔다. 당시 상원사에는 한 노스님이 있었다. 군인들이 법당에 불을 붙이려 하자 노스님은 잠깐만 시간을 달라고 한 뒤 방에 들어가 가사와 장삼을 갖춘 뒤 법당 안 불상 앞에 좌정했다. 그리고는 이제 불을 질러도 좋다고 말했다.

장교가 끌어내려 하자 노스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가 장군의 부하라면 난 부처님의 제자라네. 중이란 원래 죽으면 화장을 하는 법, 나는 여기서 힘 안들이고 저절로 화장을 할 터이니 당신들은 명령대로 어서 불을 지르도록 하게.” 노스님의 기개에 압도당한 군인들은 결국 법당의 문짝만 뜯어서 태운 뒤 절을 떠났다. 상원사의 전각과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제36호)은 그렇게 전쟁의 참화 속에서 살아남았다.

상원사와 한 몸이 되어 전각과 소중한 유물들을 지켜낸 이 스님이 바로 한암(漢巖·1876~1951년)이다. 당시 스님은 오대산에 들어온 이후 27년간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고 수행정진 중이었다.

스님은 이렇게 온몸으로 상원사를 지켜낸 지 두 달여 뒤인 1951년 3월22일(음력 2월14일) 아침, 가사와 장삼을 갖춰 입고 단정히 앉은 채로 그대로 입적했다. 이때가 법랍 54세, 세수 76세였다. 이때 한 군인이 찍은 스님의 좌탈입망(坐脫立亡) 사진은 평생을 흐트러짐 없이 살다간 선사로서의 일생을 함축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암은 1876년 3월27일 화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온양 방(方)씨였다. 그는 아버지 방기순(方箕淳)과 어머니 선산길씨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한암은 9세 때 서당에서 `사략(史略)'을 배우던 중 “태고에 천황씨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반고씨가 있었다면, 반고씨 이전에는 누가 있었는가”라는 의문을 품을 정도로 존재의 실상에 대한 궁금함이 깊었다. 유교 경전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지 못하자 1897년 22세 때 금강산 유람 중 홀연히 장안사로 입산 출가하여 행름(行凜)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2001년 처음 공개된 한암의 자전적 구도기 `일생패궐(一生敗闕)'에 따르면, 그는 수행 중 모두 4차에 걸친 오도 과정을 경험했다고 한다.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듣던 중 “무릇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 만일 모든 형상이 상(相)이 아님을 간파한다면 곧 바로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소식을 얻었다. 이후 통도사 백운암에서 정진하던 중 입선을 알리는 죽비 소리를 듣고 몰록 또 깨달음을 얻었다. 또한 해인사에서 하안거를 마치고 `전등록'을 보다가 `한 물건도 작용하지 않는다'라는 대목에 이르러 또 한소식을 얻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 34세 되던 해인 1910년, 평북 맹산군 우두암에서 겨울을 지내던 어느 날,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마침내 확철대오에 이른 것이다. 비로소 유년시절부터 품었던 `반고씨 이전의 면목'을 확연히 깨치게 되었다.

한암의 이런 고백은 그 솔직함으로 주목을 받았다. 많은 스님이 단박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반해, 한암은 여러 차례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깨달음이 완성되어 왔다고 진솔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과장과 자화자찬을 싫어하는 그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면서 동시에 후학들에게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지침이 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암으로 하여금 처음으로 한소식에 이르도록 이끈 스승 경허와의 만남은 이후 한국 불교사에서 일대 장관을 만들어냈다. 베스트셀러가 된 최인호의 소설 `길 없는 길'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경허(1846~1912년)는 꺼져가던 선불교의 불씨를 살려내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불린다. 특히 그는 만공, 혜월, 수월, 한암 등 뛰어난 제자들을 길러내 이후 한국불교가 만개할 수 있는 초석을 놓은 선구자였다.

훗날 경허는 한암과 함께 지내다 헤어지게 되자 전별사를 써주며 이별을 슬퍼했다. 그는 이 글에서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이별의 쓸쓸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라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리”라고 슬퍼했다.

경허는 한암이 30년 연하의 제자였지만, 학문이 고명하고 선지(禪旨)가 남다르다며 그를 아꼈다. 한암은 이 전별사를 받고 “서리국화 설중매 이제 막 넘었는데/ 어찌하여 오랫동안 가르침을 받을 수 없을까요/ 만고에 빛나는 마음달 있나니/ 덧없는 세상 어찌 또 뒷날을 기약하리오”라며 스승과의 이별을 안타까워했다.

한암이 스승 경허와 함께 지낸 시기는, 청암사 수도암 시절부터 1903년 해인사 선원에서 하안거 정진을 할 때까지 약 3년간이다. 그의 나이 23세 때부터 27세 때인 이 시절에 그는 깨달음을 얻고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으며 마침내 한 세계를 얻었다.

경허와 한암은 사제지간의 선승들이었지만 각자에게서 뿜어져 나온 선풍은 달랐다. 경허는 걸림이 없는 무애행으로 자유로움을 구가했지만, 한암은 계율을 철저히 지키면서 승가의 전통을 이어나가고자 애썼다. 이처럼 두 사람은 선풍이 서로 달랐지만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깊이 존중했다.

한암은 스승이 입적한 지 18년 뒤인 1930년, 스승의 또 다른 제자인 만공의 부탁으로 쓴 `선사 경허화상 행장'에서 스승의 일생을 가감 없이 기술한 뒤 “화상의 법화(法化)를 배움은 옳으나 화상의 행리(行履)를 배움은 옳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스승 경허가 보여준 걸림 없는 무애행이 후학들에게 잘못 전해질까봐 미리 경계한 것이다. 후학들이 극과 극을 달린 경허의 무애행만 보다가 정작 중요한 스승의 진면목을 놓치지나 않을까 우려한 탓이었다. 결국 이 행장은 만공이 주도해 1943년 출간한 `경허집'에 수록되지 못했다. 만공은 한암이 스승의 행리를 배우면 안 된다고 한 구절을 못마땅해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공은 훗날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스님에게 스승의 행장을 따로 부탁해 이를 실었다.

오대산 불교문화를 뿌리내린 한암과 덕숭산 불교문화를 꽃피운 만공은 같은 스승 밑에서 공부했지만 서로 다른 가풍을 만들어냈다. 한암은 전통을 이어가며 불교문화를 지켜나가고자 했다면, 만공은 참선 제일주의로 한국불교를 개혁해나가고자 했다. 경허 이후 한국불교를 이끌어간 두 스님은 체질과 성품, 그리고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달랐지만, 스승 경허를 향한 지극한 존경과 추모의 열기는 같았다. 경허와 이들 제자들이 만들어낸 숱한 일화와 가르침들은 근대 한국 불교의 일대 장관을 연출해내며 불교 대중화에 큰 기여를 했다.

한암은 1929년 1월, 조선불교 선교 양종 승려대회에서 7명의 교정(敎正·오늘날 종정) 중 한 명으로 선출된 이후 무려 4차례에 걸쳐 불교계 최고 지도자의 자리인 종정(宗正)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17년, 해방 후 3년을 합쳐 총 20년간 불교의 최고 어른 자리를 지킨 것이다. 성철 스님이 12년간 종정을 역임한 것과 비교해보면, 한암이 얼마나 오랫동안 대중의 지지를 받아왔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한암은 1925년 서울 봉은사 조실로 있을 때 “내 차라리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되지 않겠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시는 산문 밖을 나서지 않았다.

이후 스님의 삶은 말 그대로 학(鶴)과 같았다. 스님은 간화선을 최고의 수행법으로 삼았지만 경전 공부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강조했으며, 특히 계율을 잘 지킬 것을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그가 제정한 `승가오칙(僧家五則)'은 이러한 그의 승가정신이 잘 담겨져 있다. 그는 참선, 간경, 염불, 의식, 가람수호 등 다섯 가지를 다 잘 할 수 있어야 참다운 수행자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참선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전통 수행 방법을 두루 익히고 실천해야만 진정한 수행자로 거듭날 수 있고, 한국 불교를 지켜나갈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이다. 한암의 수행 가풍이 날로 높아지자 많은 스님이 그의 회상에서 수행 정진하고자 했다. 효봉, 탄옹, 청담, 고암, 서옹, 석주, 고송, 월하 등 한국불교를 이끈 기라성 같은 고승들이 다녀갔으며, 난암, 보산, 보문, 탄허 등이 그의 수법제자가 되었다.

한암은 수행자로서 자신에게는 서릿발처럼 엄격했지만 일반 대중에게는 다정다감했다. 현재 남아서 전하는 45통의 편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스님들에게는 순한문으로, 거사들에게는 국한문으로, 보살들에게는 순한글로 각각 편지를 썼다. 그만큼 상대를 배려한 것이었다. 처음 찾아오는 사람이나, 여러 번 찾아온 사람이나 인사를 하면 언제나 같이 맞절을 했다.

특히 스님의 검박한 일상은 수행자들에게 표상이 되었다. 새벽 3시부터 밤 9시까지 항상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참선을 했다. 아침에 죽, 점심 때 밥으로 하루 두 끼만을 먹었다. 조석 예불과 운력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버리는 것을 싫어해서 콩나물을 다듬을 때도 대가리 하나 버리지 않았다. 만해스님은 이런 한암을 두고 “이 나라 천지 7,000 승려 가운데 뜻이 굳기는 한암 스님뿐이다”라고 평가했다.

한암이 입적하자 그와 편지를 나누며 우정을 나누었던 경봉 스님은 “눈빛을 거두는 곳에 오대산이 서늘해/ 꽃과 새들도 슬피 울고 달에까지 향연이 어리는 듯/ 격식 밖의 현담을 누가 아는가/ 만산엔 변함없이 물이 흐르네”라고 추도했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한국의 큰스님 글씨-월정사의 한암(漢岩)과 탄허(呑虛)'라는 제목으로 사제간인 두 스님의 서예전을 열었다. 원래는 두 달간 전시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관람객들이 쇄도해 결국 두 달을 더 연장하고, 장소도 전국으로 확대했다. 한암과 탄허로 이어지는 오대산 불교문화가 만개했음을 입증해주는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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