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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도 오대산이 있으니 이 땅이 불국토(현대불교)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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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4-12 08:54 조회8,17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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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도 오대산이 있으니 이 땅이 불국토
자장율사
노덕현 기자  noduc@hyunbul.com
   
▲ 양산 통도사 개산조당에 봉안돼 있는 자장율사 진영
 
대신 자리 거부하고 당나라 유학
신라도 문수성지 오대산 있음 밝혀
귀국해 계율 정비, 불교 부흥 계기
통도사·월정사·신흥사 등 창건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한느 문수보살. 이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오대산이 중국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있다고 정립한 이가 있으니 바로 자장(慈藏) 율사다.
자장 율사는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워 신라의 기상을 널리 떨쳤으며,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대에 걸쳐 계율을 정비해 신라의 국력을 키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하지 않으리
〈三國遺事〉 ‘慈藏定律’ 條의 기록에 따르면 자장율사의 속성(俗姓)은 김 씨로서 이름은 선종랑(善宗郞), 무림(茂林)공의 아들이다.
 
무림공은 진골 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 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으나 늦게 까지 아들이 없었다. 자장 스님이 태어나기 전 무림공은 관세음보살상 앞에서 기도했다.
“만약 아들을 얻게 되면 진리의 바다로 나아가게 하겠으며, 모든 이의 징검다리가 되게 하겠습니다.”
자장율사의 부모들은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의 율량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이후 자장율사의 어머니가 별이 품 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한 4월 초파일에 아이를 낳으니 그가 바로 자장 율사다. 자장율사는 어려서부터 심지(心志)가 맑고 슬기로웠으며 문장과 생각이 날로 풍부하여져 세속에 물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장율사에게는 시련이 닥쳐왔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것이다. 스님은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자 인생의 무상(無常)을 실감한다. 스님은 집안의 전답을 모두 팔고 원녕사(寧光寺)란 절을 짓고 그곳에서 혼자 수행에 들어갔다. 스님은 호랑이나 이리를 피하지 않고 오로지 고골관(枯骨觀, 白骨觀)을 닦았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피곤할 때는 작은 방을 만들어 주위를 가시로 막고 맨 몸으로 그 안에 앉아 움직이면 가시가 찌르도록 하고 심지어 머리를 들보에 매어 혼미한 정신을 바로 잡는 혹독한 고행(苦行)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구도를 위하여 혼신의 정열을 쏟을 때 조정에서는 대신(大臣) 자리가 비게 된다. 관례대로라면 스님의 가문이 문벌(門閥)로서 맡을 차례이기에 조정에서는 스님을 여러차례 부른다.
하지만 스님은 응하지 않았다. 이에 왕은 칙령을 내려 “취임하지 않으면 목을 베리라”고 하였으나 스님은 굽히지 않았다.
“내 차라리 단 하루라도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파계(破戒)하고 백년 동안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吾寧日一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
 
이때 스님은 강한 출가(出家)의지를 표했다. 이 말이 전해지자 왕도 어쩔 수 없이 스님의 출가를 허락하였다.
이에 다시 스님은 산 속 깊이 은거하여 수행하는데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人)이 와서 오계(五戒)를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 뒤 산골로부터 나오자 각처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계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자장율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선덕여왕 5년(636) 소칙을 받아 제자 실(實) 등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오대산에 세워진 월정사
 
오대산에서 문수보살 친견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오대산을 찾았다. 오대산은 ‘장차 문수보살이 살 곳’이라 예언된 동쪽의 산으로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친견코자 했다
.
자장율사는 입당해 청량산(淸凉山)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 앞에서 기도정진에 들어갔다. 이때 꿈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산스크리트 어(梵語)로 된 4구(句)게를 주었다. 스님은 깨어나서 기억은 나는데, 모두 산스크리트 어여서 어떻게 해독할지 몰랐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홀연히 한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은 자장율사의 꿈에 나타난 게를 번역해 주었다.
 
가라파좌낭시(呵?婆佐?是) 모든 법을 알았다
달예치거야(達?) 본디 성품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다
낭가희가낭(?伽伽?) 이와 같이 법성(法性)을 풀면
달예노사나(達盧舍那) 곧 노사나불을 보게 되리라
 
그 스님은 “비록 만교(萬敎)를 배운다 할지라도 아직 이 보다 나은 글이 없다”며 가사(袈裟)와 사리(舍利)등을 주며 부처님의 것이라고 전했다. 또 그 스님은 신라 북쪽 명주 경계에 오대산이 있으며, 거기 만 명의 문수보살이 늘 있으므로, 가서 만나라고 전하기도 했다. 명주는 지금의 강릉이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의 성별을 받은 것을 알고 북대(北臺)에서 내려와 태화지(太和池)에 다다라 당나라 서울로 향했다. 당나라 태종은 칙사를 보내 율사를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하며 후하게 대접했다.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게 되기까지
자장율사는 또 다른 만남을 이룬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태화자라는 연못가를 지날 때였다. 어디에선가 한 신령스러운 사람이 나타나 물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는습니까?”
“불도를 깨치기 위해 왔습니다.”
대답을 들은 그 사람은 합장하고 절하며 다시 물었다.
“그대의 나라에는 어떤 어려운 점이 있소?”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말갈, 남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침입하니 이런 이웃 나라들의 횡포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왕을 모시고 있소. 여자가 임금이니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으므로 이웃 나라들이 넘겨보는 것이오. 그대는 고국으로 돌아가 나라의 힘이 되도록 하시오.”
“고국에 돌아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힘이 되리이까?”
“황룡사의 호법룡은 바로 나의 맏아들로 그 절을 호위하고 있소. 지금 본국으로 돌아가면 절 안에 9층탑을 세우도록 하오. 그리하면 이웃 나라들이 모두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가 조공해 올 것이며 나라가 길이 평안하리라. 또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들을 석방하면 외적들이 감히 해치지 못할 것이오. 그리고 경기 지방 남쪽 해안에 자그마한 절을 짓고 내 복을 빌어 준다면 나 또한 그 은덕을 갚으리다.”
말을 마친 신령은 자장율사에게 옥을 바치고는 이내 사라져 버렸다. 탑이 구층이 된 것은 ‘구한이 조공을 바칠 것’이라는 신인의 말 안에 암시되어 있다.
 
선덕여왕 11년(642), 백제가 신라 서쪽지방 40여 성을 탈취하고, 백제와 고구려가 합세해 당항성을 쳐 당나라와의 해로를 차단하는 한편 대야성(大耶城)을 함락하였다. 선덕여왕은 자장율사의 지혜를 빌리기 위해 당태종에게 글을 보내 자장율사의 귀국을 정식으로 청한다.
 
자장율사는 귀국길에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일부와 번당(幡幢), 화개(花蓋) 등 복리(福利)가 될 만한 것을 청하여 귀국하게 된다.
자장율사는 먼저 분황사에 머물며 승려들의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부터 착수한다. 그 다음에 각 지방을 돌면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자장율사의 원대한 뜻은 화엄사상에 의한 불국토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자장율사는 황룡사 구층탑의 건립을 건의해 구층탑을 세운다.
 
   
▲ 통도사 금강계단
 
계율로 국가 기강 바로잡아
자장율사는 불교의 계율을 신라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다. 자장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僧職)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된다. 대국통(大國統)은 승려를 하나로 이끄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자장율사는 불교의 일을 맡아 받들고 수행하는 규칙을 제정해 조직화하는데 나섰다.
 
비구와 비구니의 규범을 통제하기 위해 반월(半月)마다 계(戒)를 설했으며 겨울과 봄에 시험을 치러 잘 지켰는지 알아보았으며, 순사(巡使)를 보내 외부의 절을 두루 조사하여, 승려의 품위를 떨어뜨리는지 엄격히 경계하였다. 경전과 불상을 엄중히 모시는 것은 더욱 철저한 규칙이었다.
 
왕궁과 분황사에서 보살계본을 강의하는 한편 사부대중을 교화하기에 이른다. 당시 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10명에 8~9명이 될 정도였다. 이에 이들을 수용하고자 세운 절이 통도사(通度寺)다. 금강계단(金剛戒壇)도 이 때 만들어졌다. 통도사에는 불사리와 가사 뿐만 아니라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대장경이 역사상 최초로 봉안되기도 했다.
 
자장율사가 전국에 만든 사찰과 탑이 열군데 정도 되는데 하나씩 만들 때마다 그를 받드는 신도들이 가득히 찾아와 일을 도왔다. 〈삼국유사〉에서는 하나 만들 때 ‘하루도 안 걸려 이루어졌다’고 표현하는데 다소 과장이 섞였을지 모르나, 자장율사로 인해 일종의 불교 붐이 일어났음이 확실하다.
 
자장율사의 활동은 불교에만 그치지 않았다. 자장율사는 복식과 표장(標章) 등의 양식을 중국에 준하여 입자고 건의했다. 진덕여왕 3년(649), 신라는 이를 받아들여 중국 의관을 입고, 다음해 연호를 중국식으로 하여 영휘(永徽)라고 했다. 이를 통해 신라는 당대의 앞선 문화를 발빠르게 받아들인다. 이러한 모습들이 뒷날 삼국통일의 기틀로 자리한다.
 
월정사, 신흥사 등 창건, 세연 다해 홀연히 떠나
국가와 불교를 위해 애써 노력한 자장율사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떠나 오대산에 월정사, 설악산에 신흥사, 마곡사, 정암사, 통도사, 용연사, 유금사, 광덕사를 세우기도 했다.
 
불법을 펴는 것에 일생을 바친 자장율사는 이윽고 자신의 세연(世緣)이 다 하였음을 알고 한번 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발원한다. 자장율사의 꿈에 중국에서 만났던 한 스님이 나타났다. 그 스님은 날이 밝거든 대송정(大松汀)에서 만나자 하여 자장율사는 놀라 일어나 송정에 이르렀다. 그 스님은 문수보살이었다. 자장율사는 이어 문수보살의 계시로 갈반지(태백산)에 석남원(정암사)을 세웠다. 그러나 보잘것없는 늙은이로 변해 찾아온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아상(我相)에 낙망해 3년 뒤를 기약하고 몸은 남겨둔 채 정신만 산으로 들어갔으나, 육신이 다비되는 바람에 현실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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