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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불교이야기] ② 조지훈 시인의 불교詩(불교신문) 201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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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4-02-28 09:01 조회9,16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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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 불교이야기] ② 조지훈 시인의 불교詩
번뇌는 별빛이라
하정은 기자  tomato77@ibulgyo.com
   
평창 월정사 전나무숲. 1941년 조지훈 시인도 이 숲길을 걸었으리라. 불교신문자료사진
가슴시린 정한과
선적 향기 묻어나는
조지훈의 ‘승무’
시인은 이 시를
열아홉살에 지었다고…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서럽도록 아름다운 한 비구니 스님의 승무가 애절하고 신비한 정감으로 그려진 조지훈의 시 ‘승무(僧舞)’의 일부다. 가슴시린 정한과 선(禪)적 향기가 뚝뚝 묻어나는 이 시를 조지훈은 1939년 열아홉살 때 지었다. 현 동국대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에 갓 들어간 문과생 신분이었다. 스무살도 안된 어린 나이에 섬세한 미의식에 종교성을 빌어 이토록 가슴절절한 시를 지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조지훈은 시 ‘승무’의 배경은 화성 용주사다. 그는 생전에 ‘승무’와 관련 “용주사 승무제에서 어느 이름 모를 승려의 승무를 보고는 밤늦도록 용주사 뒷마당 감나무 아래에서 넋을 잃고 서 있었다”며 “당시 승무의 불가사의한 선율을 다음 해 여름에 비로소 시로 지을 수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용주사에선 매년 10월 정조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승무제가 열린다.
 
혜화전문학교에서 불교를 접한 조지훈은 1941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무살에 김난희씨와 결혼했다. 유부남이 된 조지훈은 결혼하고 오대산 월정사행, 월정사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냈다. 정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했던 조지훈은 월정사서 외전강사를 할 때 일본이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주지 스님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종일 통음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 매천 황현, 만해 한용운을 이어 조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줬다.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스님이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에 참례한 것이 고작 열일곱 살이었으니….
 
조지훈이 오대산 월정사에 머무를 때 쓴 작품은 고사(古寺)1,2다. ‘목어(木魚)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 부처님은 말이 없이/ 웃으시는데/ 서역만리 길/ 눈부신 노을 아래/ 모란이 진다/’(‘고사1’의 전문) 조지훈은 “이 시는 선사상에서 피어난 것이거니와…시는 생명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요, 대상을 내적 생명에서 감수하는 것이므로 모두 하나의 범생명(汎生命) 또는 범신론(汎神論)의 세계에 절로 통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설하기도 했다.
 
조지훈은 월정사에 오래 머물진 않았다. 1년여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 속에 흐르는 감성과 시가 지향하는 세계에는 불교적 사유가 깊게 깔려 있다. 월정사를 떠난 이후에도 그는 박목월 시인을 찾아 생애 첫 경주여행을 하면서 ‘대숲 사이로 복사꽃이 발갛게 고개를 든 석굴암’을 찾았고 암울한 시대 문학도반과 잔술에 취해 불국사 나무그늘을 서성이기도 했다. ‘8:2 가르마’에 세련된 뿔테안경을 쓰고 흰 양복을 위아래 반듯하게 차려입고서 목월과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기념촬영한 사진은 나라잃은 시대임에도 ‘호탕한 멋’을 한껏 부린 시인의 기품이 새어나온다.
 
[불교신문2989호/2014년3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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