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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강원인물]상원사 아래 사제 삼대 사리탑비…7월의 초록을 흠향하고 있었다(강원일보)201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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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3-07-11 09:08 조회10,1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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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강원인물]상원사 아래 사제 삼대 사리탑비…7월의 초록을 흠향하고 있었다

①탄허 스님이 1934년 22세에 머리를 깎고 출가한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②탄허 스님을 비롯한 한암 스님 등 상원사 대표 스님들의 부도와 공적비가 세워진 승탑전. ③탄허 스님이 쓴 '월정대가람' 현판이 걸린 월정사 일주문. ④1983년 탄허 스님이 세수(世壽) 71세, 법랍(法臘) 49세로 입적한 오대산 월정사 방산굴(方山窟). 지엄 스님이 김도연 소설가에게 탄허 스님의 수행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평창=권태명기자
일찍 찾아온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날이라고 하자. 서울 종로에서 강릉 가는 버스를 타면 무려 열 시간이 훨씬 넘어야 오대산과 강릉으로 갈라지는 곳인 월정거리에 도착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주변의 풍경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버스에서 내린, 눈빛 형형한 한 사내가 있다. 월정사까지 이십여 리 길, 걸어야 하는 방법밖에 없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들 무렵 사내는 길 옆 밭에서 김을 매는 노파에게 길을 묻는다.

“그 길로 쭉 가시오.”

“오대산에 탄허라는 도인이 살고 있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게 들었소만.”

노파는 산 하나쯤은 거뜬히 삼킬 것 같은 사내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길을 걷는다. 그동안 비슷한 질문을 건네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터라 노파는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밭을 맨다. 저잣거리로 가는 길을 가르쳐줘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후회하며.

“쯧쯧! 저 이는 얼마나 버틸꼬…….”

아주 오래전의 그 사내처럼은 아니지만 나 역시 햇살 쨍쨍한 날 오대산으로 가고 있었다. 탄허를 만나러. 자장이 문을 연 오대산은 1만 문수(文殊)가 상주하는 곳이라고 한다. 개창 이후로 오대산에는 많은 고승들이 머무르거나 다녀갔다. 고려의 나옹혜근과 조선의 사명당, 청허휴정……그리고 한암과 탄허까지.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중학교를 다닐 때 내 친구들의 아버지 중에는 전직 대처승이 많았다. 월정사와 상원사는, 그리고 스님들은 지나온 세월 속에서 가깝고도 먼 그 무엇이었다. 탄허 스님을 만나러 가는 오늘의 탐방 역시 그 묘한 마음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며 일주문 앞에 섰다.

초록의 전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문 없는 문인 일주문에는 `월정대가람'이라는 현판이 곱게 다져놓은 흙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탄허 스님이 1979년에 쓴 글씨다. 그 아래에 서서 촘촘한 전나무 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과 그늘이, 반짝이는 그물처럼 내려앉아 있는 길을 바라보았다. 고백건대 오대산 월정사는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본 큰절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월정사를 보기 위해 이십 리 길을 걸어 전나무 숲으로 들어섰고 그 너머에 절이 있었다. 거대한 전나무 숲과 위풍당당한 월정사의 모습은 한동안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정도였다. 일주문을 지나 전나무 숲의 초입에는 자그마한 삭발비(削髮碑)가 세워져 있었다. 첫 방문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전나무 숲을 통과해 절을 찾아갔지만 나는 단 한번도 삭발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주머니 속에 감추고 있는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하였기에 끙끙대며 숲의 그늘만을 찾았고 어두워져서야 빠져나오곤 했다.

평일의 월정사 경내는 그늘 없는 고요가 팔 할이었다. 옛날 사진 속의 절과 지금의 절은 많은 부분이 달랐다. 전쟁은 월정사의 많은 것을 앗아갔다. 1950년대의 사진을 보면 팔각구층석탑과 그 탑을 사색하는 석조보살좌상이 거의 전부였다. 석탑과 석조보살좌상에도 한동안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탄허 스님은 그 폐허 위에다 오대산수도원을 열고 경향의 인재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외롭고 가난하고 추웠으리라. 당시 수도원생으로 들어와 있었던 문학평론가 김종후의 일기를 보면 매일 죽과 깡보리밥을 먹으며 강의를 듣고 참선을 했다고 한다.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 스님의 인재 양성을 향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당시 월정사는 비구 대처승들 간의 분쟁 속으로 휘말려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가난과 분쟁의 여파로 결국 탄허 스님은 수도원을 삼척 영은사로 옮겨야만 했다. 그늘 없는 월정사 경내를 나는 사진기자 권태명과 천천히 거닐었다. 세월의 풍화를 견디지 못한 석조보살좌상은 성보박물관으로 이사를 갔고 그 자리엔 새 보살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탑은 절의 한가운데서 팔각의 추녀 아래에 풍경들을 매단 채 선정에 들어 있고……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내게 탄허 스님이 기거하던 월정사 방산굴(方山窟)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마치 문자 밖의 어떤 소식처럼. 나는 대웅전 현판과 주련에 씌어 있는 스님의 글씨들을 툴툴거리며 훑었다. 땀을 흘리며. 언젠가 시인 김지하는 스님의 힘찬 글씨와 오대산, 그리고 월정사의 고요한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게 속삭였던 적이 있다. 그런 듯도 하고 그렇지 않은 듯도 하고, 내 눈은 자꾸만 침침해졌다. 나는 결국 방산굴로 가는 길을 잠시 접고 상원사로 발길을 돌렸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이십여 리 길은 흙길이다. 탄허 스님은 상원사에서 출가 후 15년여 동안 한암 스님을 모셨다. 그 기간 묵언정진과 중요 선어록들을 사사하였다. 더불어 강원도 삼본산연합승려수련소가 상원사에 개설돼 조교 겸 강사 생활을 했고 이후 선원의 대중들과 함께 화엄결사와 화엄산림까지 열게 되었다. 화엄학을 통해 동양학을 아우르는 경지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전쟁이 일어나자 스승은 오대산에 남고 제자는 오대산을 떠나면서 영영 이별을 하게 된다. 나와 권 기자는 점심공양을 마친 스님들이 밀짚모자를 쓴 채 걷고 있는 그 길을 덜컹거리며 달렸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오대천이 휘돌아나가는 그 길을 옛사람과 마찬가지로 걸어가는 게 마땅했지만 우리는 차에 실려 오대산 깊은 곳으로 묵묵히 들어갔다. 흙먼지를 피우지 않으려 조심하며. 탄허 스님의 운전기사였던 권영채 씨는, 스님은 상원사에 가면 북대 미륵암에 꼭 들렀다고 한다. 나도 오대산의 여러 절 중에서 북대(北臺)를 가장 좋아한다. 상원사 시절 스님은 북대에 혼자 가서 책을 읽곤 했다고 한다. 나옹의 전설이 서려 있는 북대는 오대산에서 가장 멀리,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암자다. 북대는 길이 끝나고 벼랑 위에 피어 있는 한 송이 꽃 같은 암자다. 그러나 우리는 상원사에서 서대 염불암, 중대 적멸보궁, 북대 미륵암 어디에도 가지 못하고 멈췄다. 상원사 바로 아래 양지바른 곳에는 세 기의 사리탑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제 삼대인 한암, 탄허, 만화(萬化)의 탑비가 그것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오대산의 초록을 흠향하고 있었다. 상원사 동종 천 년의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다시 월정사로 돌아왔다. 팔각구층석탑은 여전히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서 있었다. 바람이 잠자니 풍경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 한 마리 스스로 종을 울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은 채 성보박물관 지하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스님이 `신화엄경합론'을 비롯해 온갖 불경을 번역하는 데 사용했던 만년필과 잉크, 원고지, 책상 등이 전시돼 있었다. 화엄경 번역 10만 매의 증거들이었다. 재가 제자의 회상에 의하면 당시 스님의 머릿속에는 만년필과 잉크밖에 없었다고 한다. 돌아가실 때까지도 특별한 지갑에 여러 개의 만년필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스님은 미수 허목(許穆)의 시를 빌려 공부하는 이들이 귀감으로 삼을 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눈이 한 척이나 내려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도 족한데 물건(붓과 쌀)은 왜 보냈는가? 선비로서 붓은 받아도 되겠지만 쌀은 받을 것이 아니니, 가(可)한 것은 두고 아닌 것(否)은 돌려보내겠노라.' 나는 스님의 만년필과 잉크를 마음 깊이 감춘 채 박물관을 나왔다. 석탑의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지는 시간, 방산굴로 가는 길은 아직 미궁처럼 얽혀 있었다. 종무실에서 냉커피 한 잔을 얻어 마신 우리는 결국 방산굴행을 포기하고 절을 나왔다. 갈 수 없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고개를 끄떡이며.

전화기가 울렸다. 생각을 바꿔 멀리서나마 스님이 입적한 방산굴을 엿보려고 몰래 숲을 헤매던 차였다. 방산굴로 가는 길이 열렸다는 전화였다. 우리는 다시 절로 돌아왔다. 방산굴은 월정사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검정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를 따라와 꼬리를 흔들었다. 탄허 스님은 상원사 시절부터 방산굴이 있는 자리에 오면 유독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1983년 초여름에 돌아가셨다. 옛날 방산굴의 주련에는 스님의 이런 시가 걸려 있었다.

배고프면 쌀 없는 밥을 먹고 / 목마르면 젖지 않는 물을 마시고 / 허공 꽃 불사(佛事)를 짖는다

오대산에서 나온 젊은 스님이 땀을 흘리며 월정거리를 향해 씩씩거리며 걸어간다. 길 옆 밭에서 감자를 캐던 노파가 일손을 멈추고 스님에게 묻는다.

“스님,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오?”

“에이, 절에 왔음 공불 가르쳐줘야지. 허구한 날 일만 시켜먹고!”

시봉 생활을 하다 도망치는 스님이 분명하다. 노파가 웃는다. 언젠가는 깊은 눈을 지닌 채 다시 돌아올 스님을 보며. 돌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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