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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 홍살문 (4월10일-경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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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4-11 09:09 조회8,8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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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수 여유당건축사사무소㈜ 문화재실측설계기술자

사찰 가는 길에는 여러 문이 있는데 일주문과 금강문 및 천왕문 등이다. 이 문들은 문짝이 없는 ‘문 없는 문’으로 경계의 의미가 있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세속의 흔적을 씻는 의식으로 보며 출입통제 의미는 없다. 

특이하게 용주사는 이런 상징의 문을 창건시기에는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유교를 상징하는 홍살문을 세우고 거대한 삼문을 세워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유교의 상징인 홍살문이 왜 불교사찰인 용주사에 세워져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보통 홍살문은 궁전, 관아, 능, 묘, 원, 향교 등의 앞에 세우던 문짝 없는 문이다. 이 문의 구조는 목조로 두 개 기둥과 이를 연결하는 중방이 두 개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개 중방 사이에는 화살 모양의 뾰족한 나무를 꼽았고 중앙에는 삼지창이나 태극문양을 붙였다. 홍살문이라는 명칭은 초석 이외는 목조로 붉은색을 칠하고 상부의 화살 모양의 살 때문이라고 본다. 보통 홍살문이라고 하지만 기록에는 홍전문(紅箭門)으로 되어있어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홍살문의 기원은 인도 산치탑(Sanchi stupa)으로 보고 있다. 산치탑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무덤으로 아소카왕에 의해 확장되었고 가장 오래된 탑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탑은 반원 돔(dome)으로 되어 있고 주위에는 4방향에 문(門)과 난간으로 돌려져 있다. 난간은 신라 왕릉에 영향을 주어 난간석으로 발전하고 조선 왕릉의 틀이 된다. 문인 토라나(torana)는 난간보다 많은 영향을 여러 나라에 주게 되는데, 중국에서 패방(牌坊)으로 발전하고 한반도에서는 유교의 홍살문과 불교의 일주문이 된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신사(神社) 앞에 서있는 도이리(鳥居)로 변화한다. 토라나의 영향은 나라와 종교를 넘어 영향을 미치고 형태도 다양하게 세워진다. 이들의 공통된 형태는 두 개의 기둥과 문짝이 없는 것이다. 무형적인 공통점은 경계의 의미를 가지며 중요하고 신성한 곳이라는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용주사의 홍살문은 근대에 지은 사천왕문 지나 금천(禁川) 넘어 오솔길 따라가면 만날 수 있다. 사찰에서 처음 보는 홍살문이 궁금한지 옆에 있는 안내판에 집중하는 탐방객을 많이 목격할 수 있다. 안내판에는 ‘홍살문이 없어진 지 100년을 기념하여 2008년에 복원하였다’고 쓰여 있고 복원의 근거가 된 사진도 있다. 하지만 사찰에 일주문이 아닌 왜 홍살문이 세워져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숭유억불 조선시대에서는 사찰이 핍박의 대상이었다. 사찰은 멋있는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어 권력자나 사대부 양반들이 소풍장소가 되었다. 신성한 수행의 장소에서 기생을 끼고 술을 먹는 이들에게 시중을 해야하는 것이 당시 사찰의 가장 고통이었다. 사찰이 양반들의 행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왕실 원찰로 지정되는 것이다. 원찰이 되면 재정지원도 받지만 홍살문도 세워주기 때문에 풍락객의 출입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금강사군첩 중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도 일주문 대신 홍살문이 그려져 있어 원찰들은 홍살문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본다. 홍살문은 개인이 아닌 나라에서 설치해주는 것이다. 홍살문 안에서 난잡한 행위를 할 양반은 없었기에 오히려 원찰에서 유교적인 홍살문을 설치를 원하였을 것으로 본다.

홍살문이 원찰에서 없어지게 된 것은 구한말이며 두 가지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하나는 왕실의 재정지원이 끊어진 점이다. 정미조약(1907)으로 실질적 일제강점정책이 시작되면서 조선왕실 재정이 떨어지고 더이상 원찰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갑오개혁(1884)으로 계급타파가 이루어지고 사찰에 대한 양반의 부당한 횡포가 없어진 점이다. 이로써 원찰들도 그동안 불교 교리와 맞지 않게 자리하던 원당과 홍살문을 유지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용주사 역시 호성전에 지내던 제사를 중지하고 홍살문을 철거하게 되었다고 본다.

용주사 홍살문의 복원은 문화재보호 측면에서 보면 바람직하지만 교리와 상반되는 것으로 쉽지 않은 결정에 박수를 보낸다.

 

 

기사원문보기 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9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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