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와 밀착된 부처님 가르침이 세상 감동시킨다” (5월1일-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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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5-04 08:44 조회8,709회 댓글0건본문
▲ 조정래 소설가는 안타까워했다. 한국불교에 모국어로 된 기도문 하나 없다고 했다. 모국어 기도문 없으니 영혼을 감동시키지 못한다고 했다. 사진=김규보 기자 |
“스님들도 몇 년씩 참선 하시는데, 이 속인도 문학으로 20년 면벽했지요. 허허허.”
1970년 ‘누명’으로 문단 등단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민초들 삶서 근현대 질곡 담아
주권 의식 깨우는 창작에 몰두
조종현 스님 아들로 태어나
첫 장편 ‘대장경’, 끝 작품도
불교세계관 드러낸 소설 구상
“부처님 곁에 다가서고 싶다”
좌복 대신이다. 형틀 같은 의자에 앉는다. 책상 앞에 엎드리니 꼭 글감옥이다. 밥 때와 잠들 때 빼면 매번 같다. 꼼짝 않고 빈 원고지 첫 칸에 생각 하나 긋는다. 글자는 단어가, 단어는 문장이 됐다. 좌우 이념 대립, 일제강점기, 군부독재…. 그 시대를 살아온 민초들 애환이 무거웠다. 원고지 위 까만 글씨로 꾹꾹 눌러 썼다. 어깨가 망가지고, 내장이 제자리 잃고, 오른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높이 5m50cm 원고지 5만3000여매 속 등장인물 1200여명 심장이 뛰었다. 견딘 아픔만큼 황홀했다. 1983년 ‘현대문학’, 1990년 ‘한국일보’, 1998년 ‘한겨레’에 시작한 연재는 ‘20세기 한국 현대사 3부작’이 됐다. 대하소설 ‘태백산맥’(전 10권), ‘아리랑’(전 12권), ‘한강’(전 10권)이다. ‘한강’이 2002년 완간됐으니 20년 가까이 형틀 같은 의자에 앉았다.
‘풀꽃도 꽃이다’ 출간 뒤 글감옥서 출소한 조정래(75) 소설가를 만났다. 평창 월정사 자연명상마을 촌장직 수락을 핑계로 한 부처님오신날 인터뷰였지만, 면회(?)였다. 이미 그는 글감옥 안에 자신을 가둬 두고 집필 중이었다. 국정농단, 대통령 탄핵으로 주권의 무게를 느낀 국민들에게 자각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국민은 5월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다음 소설에서 국가란 주권이란 무엇인가를 쓰려고 해요. ‘허수아비춤’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치밀하게 쓸 겁니다. 국민들 가슴을 시원하게 해드리고 싶어요. 주인이라는 자각, 대통령에게 빌려준 권력을 감독해야 하는 주인노릇 게을리 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 ‘정글만리’ 취재 차 중국 오갈 때 한 상점서 만난 포대화상 아래 글귀가 눈에 띈다. |
앞서 그는 ‘허수아비춤’(2010), ‘정글만리’(2013), ‘풀꽃도 꽃이다’(2016)에서 정치, 외교, 경제,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깊은 사유를 선보였다. 그 사유, 이번엔 국민 주권에 닿으려 한다.
사실 그의 시선은 문학청년 시절부터 한 순간도 풀뿌리 민초를 떠나지 않았다. 등단 이후 소외된 민초들의 비통하고 슬프고 참혹한 역사를 써왔다. 민초들이 숨 쉴 수 있도록 오탁악세 정화시키는 이 시대 산소 역할을 하고자 했던 셈이다.
문단에 이름 올린 1970년 ‘누명’은 반미소설이었다. ‘어떤 전설’로 연좌제를, ‘청산댁’ 같은 작품으로 월남전을 비판했다. 칼갈이, 제본소나 염색공장 여성노동자, 구두닦이, 택시운전사들에게서 사회에서 외면 받은 삶을 조명했다. 반면 초기작품 다수는 어린 시절 자기체험이나 역사체험과 직접적인 관계성이 적었다. ‘청산댁’ ‘황토’ ‘유형의 땅’ ‘불놀이’에 접어들면서 근현대사 질곡에 짓밟힌 이들을 내세워 ‘한’의 실체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상상력을 얽맬 수 있는 직접 체험을 소설로 쓰지 말아야 한다’는 창작원칙을 전면 철회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계기였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의 출발점이었다.
“광주 통행금지가 풀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내와 아들 데리고 광주로 향했다. 금난로 YWCA 건물에 구멍 뚫은 총탄 자국을 세기 시작했다. 350개쯤 셌을까. ‘여순사건보다 더하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총탄 자국이 낭자했던 순천 금융조합 빨간 벽돌 건물이 떠올랐다. 건물을 내려오며 지워지지 않은 피냄새에서 한을 느꼈다. 이 땅에 분단이 있는 한 남과 북에는 진정한 민주주의란 없고 인간다운 세상은 요원하다고 생각했다. 통일이 답이었다. 문학도 기여해야 한다는 건 너무 당연했다. 분단소설의 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황홀한 글감옥’ 중)
▲ 소설 집필 전 취재는 필수다. 서재에 빼곡하게 쌓여있는 취재수첩. |
조정래, 그는 민초들과 그들의 언어인 모국어로 소통했다. 수없이 소설 무대가 됐던 지역을 직접 발로 밟았고, 민초들 말에 귀를 기울였다. 수십권 수첩에 적은 취재기록을 원고지에 옮겼다. 민초들 개개인의 애환 관통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질곡과 아픔을 모국어로 그려냈다. 생활과 밀착된 생생한 모국어와 민족의식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태백산맥’은 일본어로 처음 번역되면서 세계에 알려졌다. 당시 일본의 한 평론가는 이렇게 평했다. “한국 민족을 이해하는 데 이 소설은 백과사전이다.” 독일 세계도서문화대전에서도 유럽인들 극찬을 받았다.
서재 책상 위에서 항상 그를 올려다보던 포대화상이 웃는다. 2011년 ‘정글만리’ 취재 차 중국을 찾았을 때 어느 상점에서 ‘(나를 두고)왜 그냥 가느냐’ 하는 말에 끌려 얼른 돌아서서 가방에 모셔온 포대화상이다. 바닥 들어 책상 눈여겨보니 ‘불교통일선언문’ ‘풀꽃도 꽃이다’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정래는 한국불교가 아쉽다. 우리네 영혼에 울림 줄 수 있는 모국어로 된 기도문이 없어서다. ‘2015 인구주택총조사’에서 드러난 불교인구 300만명 감소 소식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6월 모교 동국대에서 스님 70명을 대상으로 특강할 내용을 살짝 귀띔했다. “중요한 이야기인데 먹히지 않는 게 문제”라고 했다.
“세계에는 수없이 많은 종교가 있지만 경전이 가장 많은 종교는 불교입니다. 쉽게 말해 팔만대장경이지요. 모국어로 번역하면 몇 권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 경전이 왜 아직 제대로 된 모국어로 번역되지 않았나요. 불교는 지혜의 바다이지만 부처님 말씀은 언어와 밀착되지 않았습니다. 고려 팔만대장경 언어는 산스크리트어를 자기 식으로 받아들인 중국어입니다. 1700여년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에 모든 종파 초월한 기도문이 있는 지 묻고 싶습니다.”
없다. 조계종에서 예불의식문을 한글화 하고 있지만 ‘한글 반야심경’엔 한문투 언어가 섞여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는 주기도문이 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조정래는 기독교의 파격을 말했다. 그의 표현 빌리자면 파괴적일 만큼 진취적으로 교세를 뻗어나갔다. 모국어 번역이 힘이라고 했다. “우리 한국불교는 지금까지 못했어….” 내쉬는 숨에 진한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언어는 곧 영혼입니다. 영혼은 의식이며 의식은 곧 인간의 모든 행위를 통제하고 결정합니다. 영혼을 감동시킬 간절한 기도가 모국어로 정리되면 좋겠어요. 40년 전부터 불교계에 던진 화두에요.”
애정 어린 조언하던 그는 조만간 문수성지 오대산에 칩거(?)한다.
▲ 조정래 소설가는 눈길 함부로 걷지 말라는 서산대사 경책을 좋아한다. 글 쓰는 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사진=김규보 기자 |
“문학이란 길 없는 길 위를 부처님 믿고 걷는다”
"부처님은 어느 종교보다 일찍 인본주의, 민주주의를 고했다. 가장 오래됐지만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미래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평생 가슴 속에 부처님 모시고 산다."
“인연이라는 게 그래요.”
짧은 말에 70 평생이 다 들어 있었다.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이 제안한 자연명상마을 촌장직을 두말없이 넙죽 받았다. 집필실도 만든단다. 불연 돌이켜보니 새삼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정념 스님은 “다시 태어나면 스님이 되고 싶다고 하셨다. 문학사는 물론 한국과 불교계의 보배”라며 추천했다. 다음 생에 스님 되고픈 소망은 조정래 소설가를 자연명상마을 촌장이란 시절인연과 만나게 했다. 그는 욕망 커서 지쳤거나 삶에 실패했거나 어떻게 살아야 좋은지 몰라 방황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싶은 작은 바람이 있다.
“평소 생각을 말씀 드렸지요. ‘스님이 되렵니다’라고. 명예, 재산, 혈육에 구속 받지 않아서 좋다고 했습니다. 지치고 고독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부처님 말씀으로 길잡이가 되고 길벗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가요. 평생 불교를 가까이 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70 넘어가니 도시생활도 정리하려던 참이었어요. 딱, 제의가 들어오니 너무 좋았어요. 흔쾌히 응했습니다.”
“부처님 말씀과 문학을 섞어 위로 건넬 수 있다면 말년도 행복하겠다”고 했다. 평소 인연 없던 정념 스님과 만남이 편한 그였다. 스님들과 처음 만나도 10년 전 인연처럼 편하단다. 종립 동국대를 나왔고, 어지간한 스님은 그의 집안 내력을 안다고 했다.
종교 황국화를 추진하던 조선총독부는 일본불교처럼 대처승을 만들었다. 교세가 컸던 순천 선암사 젊은스님을 혼인시켰고, 조정래가 태어났다. 그에게 출가를 권했던 사람도, 문학을 용인한 사람도 스님, 아버지였다. 시조시인이자 조종현 스님이다. 해방 되자 순천 선암사 앞에 ‘사답(寺畓)을 소작인들에게 무상분배해야 한다’ ‘절은 사회에 봉사해야 한다’ ‘스님들은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는 편액 내걸었던 깨어있는 성직자이기도 했다.
‘조계사 승적 168호’. 아버지가 불쑥 내민 종이에는 적힌 내용은 승적번호였다. 서너 달 전 지어주신 호는 법명이 돼 있었다. ‘인천(鄰天)’. ‘하늘을 벗해 살라’던 호가 ‘출가해서 부모 형제 다 잊고 하늘을 벗해 사는 큰 스님이 되거라’ 였다.
▲ 늘 부처님 따르고 있다는 소설가 책상에 연꽃 그림이 새겨져있다. |
“너, 부처님 앞으로 가거라. 그 험한 난리 속에서도 너희 여섯 형제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부처님 가피 덕분이다. 장남은 좀 그러니 차남인 네가 가는 게 좋겠다.”
문학으로 인생 방향 정했던 보성고 3학년 대학입시를 앞둔 무렵이었다. ‘아버지,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복받쳐 오르는 원망보다 먼저 아버지는 선제공격을 했다. “문학 하겠다”는 반발에 예상이라도 한듯 “만해 스님은 종교도 문학도 다 이뤘다”고 받아쳤다. “만해 스님은 100년에 한 분 날까 말까한 분”이라는 말로 ‘조계사 승적 168호’ 인천 스님을 물렸다.
“머시여, 니도 쫄쫄이 가난허게 살겄다 그것이여? 안 되야, 상대로가 상대. 상대 가서 돈 많이 벌어야 써.”
정작 국문과 진학을 반대한 이는 어머니였다. 조정래는 시조문학 하나 붙들고 평생을 고생시켜온 남편에 대한 원망인 동시에 자식까지 고생길로 들어서게 할 수 없다는 애틋한 모성애로 기억했다.
거대한 문학 산맥 쌓아 제법 돈도 벌고, 반쯤 스님 반쯤 문인 같은 촌장으로서 사람의 영혼을 위로한다니…. 아버지와 어머니 기대는 충족시키지 않았을까.
조정래 소설가는 ‘황홀한 글감옥’서 “일제의 은혜로 풍경소리와 목탁소리 태교 삼아 태어난 목숨이다. 사람이 은혜를 입었으면 보답을 해야 하는 법이니, ‘아리랑’을 썼다”고 뼈 있는 너스레를 떨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으로 앞서 걷지 않은 길에 발자국 남겼으니, 썩 괜찮은 인생일지도 모른다. 틀림없다. 그는 스님 됐더라도 글 쓰고 싶은 목마름을 참지 못하고 끝내 파계했으리라.
“이거 아니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실감 있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을 10번 100번 확인하는 게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안 하면 초조하고 조바심 나서 하고 싶은 욕구가 계속 살아 있어야 하지요. 하고 싶은 일과 안 하면 못 견디는 일 2가지가 충족돼야 합니다. 욕구를 해결하고 싶으니 자연스럽게 노력을 하게 됩니다.”
하루 꼬박 13~14시간 의자에 앉아 책상에 엎드려 원고지에 글을 쓴다. ‘태백산맥’ 집필 땐 매일 200자 원고지 30매를 썼고 아버지 임종도 못 지켰다, ‘아리랑’ 쓸 때엔 오른팔에 마비가 왔다. ‘한강’에 와서는 너무 오래 앉아 탈장됐다. 출판편집인 손철주 말대로 “뼈 빠지는 수고를 감당하지만 남이 보면 풍경”이다. 조정래도 강조했다. 축구선수 박지성, 피겨선수 김연아의 상처투성이 발을 보지 못한다고 했다. “노력 없는 재능은 열매 맺지 못하는 꽃과 같다”고 했다. 화려할지언정 기억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쓸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비결을 묻는 질문은 우문이라고 일침했다.
“TV 리모콘, 스마트폰의 재미를 이겨야합니다. 문학에 무관심하거나 삶에 지쳤거나 해서 글을 읽지 않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감동을 줄 수 있을까요. 보통사람도 세 끼 밥 먹으려고 8시간 노동을 합니다. 지쳐 있는 영혼 뒤흔드는 울림을 남기려면 몇 곱절 더 노력해야합니다.”
▲ 인터뷰 하는 동안 줄곧 매만졌던 염주. |
그는 “인생이란 스스로를 말[馬] 삼아서 끝없이 채찍질 가하며 달려가는 노정”이라고 했다. 자기가 말이니 내릴 수도 없다. “삶 앞에 주어진 2개 돌덩이를 하나씩 옮겨가며 거친 물살 건너는 게 인생”이라고도 했다.
“그게 인생이야….”
왜곡된 한국사를 이고지고 끈질기게 버티며 살아온 민초들 인생의 무거운 돌은 그가 옮겼다. 남기고 싶어서다. 글이 가진 반영구적인 기억, 언어의 역사성과 영원성을 그는 믿는다. 거기서 소설가로서 작가로서 지식인의 사명을 찾고, 글에 담아왔다.
“글은 시공간을 초월해 전달되지요. 존재 이윱니다. 소설은 이야기를 만들어 감동을 기억으로 남기는 문자예술입니다. 재미있게 읽히되 유익한 감동을 잊히지 않게 전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방법이로든 인간사회 문제의 핵심을 잡으려고 끝없이 탐구해야 하지요. 소설은 인간을 향한 탐구입니다. 글을 쓰는 이는 시대의 미래를 비추는 등불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서산대사의 시를 좋아한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걷지 말지어다.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불교의 역할도 이 지점에서 가늠했다.
“기복(祈福)을 복 달라고 비는 행위로 해석하면 1차적입니다. 마음에 희망을 심는 것이지요. 도와달라고 비는 희망심기 넘어 도와달라고 빌었던 일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노력하면서 희망을 가꿔야 합니다. 마지막에 그 희망을 수확하는 일까지 기복의 역할입니다. 이 3단계가 잘 진행되려면 완전히 감정에 밀착된 모국어의 기도문이 있어야합니다. 간절한 그 기도문에서 마음이 위안 받고 힘을 얻어 행동으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스님네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그의 희망심기는 어디 있을까. 부처님이었다. 코팅된 ‘문학, 길 없는 길’을 들어보였다. ‘화엄경’에 나오는 말이 너무 좋아 차용했단다. 늘 곁에 두고 마음이 흐트러지면 경종 울리고자 쳐다본다고 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쓰고 또 쓰면 열리는 길’이 문학이라고 했다. 책상에 ‘문학, 길 없는 길’ 새겨 넣고, 그 위에 연꽃도 그려놓았다. “부처님은 항상 날 지키신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했다.
조정래 소설가는 두 권의 책 집필을 끝내면 마지막 작품으로 불교를 생각하고 있다. 첫 장편이 ‘대장경’이었으니 회향도 불교로 잡았다. 취재하러 가을께 인도 8대 성지순례를 떠난다. 마지막 순례다. 여러 번 다녀왔지만 늙어버린 껍데기 건사하기 힘들어서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처럼 20세기 최고 사건은 1차, 2차 세계대전이 아닙니다. 서양이 불교와 만난 것이지요.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발견만 하면 다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유일신 강조하는 종교와 다릅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가르침이지요. 부처님은 어떻게 이렇게 기막힌 사상과 진리를 설파했을까요. 어느 종교보다 일찍 인본주의, 민주주의, 동학으로 말하자면 인내천을 고했습니다. 이게 불교입니다. 가장 오래됐지만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미래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습니다. 난 그렇게 믿습니다. 그래서 평생 가슴 속에 부처님 모시고 사는 겁니다.”
먼 길 돌아왔다. 스님 ‘인천’ 물리고 문학인생 50여년 회향한 뒤 다시 문수보살 품으로 들려는 조정래. 오대산 자연명상마을에서 “부처님 곁에 신중하게 다가가는 작품을 쓰겠다”고 했다. 인터뷰 내내 매만진 그의 염주가 반질반질 빛났다. 오래됐다는 증거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조정래는
1943년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뒤 왜곡된 민족사에서 개인이 처한 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며 소설을 집필했다. 작가정신 결정체라 할 수 있는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은 ‘20세기 한국 현대사 3부작’으로 1500만부 돌파라는 한국 출판사상 초유의 기록을 수립했다. 한국문학 최고 작가로 손꼽힌다.
기사원문보기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7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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