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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팔만대장경 일본에 공짜로 넘길 뻔했다 (4월27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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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7-04-27 10:37 조회9,6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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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황대일 기자 = 천연 고찰 경남 해인사에서 2017년 팔만대장경이 공개됐다.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보관 건축물 출입문을 폐쇄한 지 8년 만이다.

팔만대장경은 1236년부터 만들어 16년 만에 완성했다.

고려인이 신분을 뛰어넘어 하나가 돼 연인원 125만 명이 제작에 참여했다.

불교 힘으로 몽골 침략을 막아 보려는 염원에서다.

 

고려시대 후기 팔만대장경 판본(板本).

 

팔만대장경은 가치를 산정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해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다.

팔만대장경을 약 800년간 유지해온 비밀은 보관 건물인 장경판전의 과학적인 구조다.

창문을 뚫어 공기 순환을 원활하게 한 덕에 뒤틀리거나 썩지 않았다.

바닥은 장마철 습기를 흡수하고 건기에는 물기를 내보내 습도를 조절한다.

팔만대장경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정확한 불교 대장경으로 인정받지만, 그동안 사라질 고비를 무수히 맞았다.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팔만대장경판에 집착했다.

조선 포로를 돌려보냈다가 대장경 인쇄본 2질을 받은 게 계기가 됐다.

태조는 1395년 조선인 포로 570명이 돌아오자 답례로 인쇄본을 하사한다.

이때부터 일본은 포로 송환 때마다 대장경을 달라고 애걸한다.

대장경이 갖는 불교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태종은 한때 대장경판을 건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인쇄본을 일일이 찍어서 보내는 부담을 덜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조선은 1556년까지 약 50차례 인쇄본을 준비하느라 큰 불편을 겪었다.

그런데도 태종은 머잖아 결심을 바꿔 원판을 계속 보유하기로 한다.

신하들이 일본 기증을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만 경기도 여주 신륵사 인쇄본은 일본에 건넨다.

1381년 간행된 것으로 총 587상자에 4천995첩이나 된다.

팔만대장경판으로 찍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현재 일본 교토 오타니 대학 도서관에 있다.

이런 일이 150년 넘게 반복된 탓에 조선에는 대장경 책이 사라진다.

대장경은 일본에서 불교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한다.

대장경을 찍은 책 가운데 국내 최고 작품은 1865년 만든 강원도 월정사 소장본이다.

 

 

일본은 희귀 동물과 대장경 원판을 맞바꾸려는 노력도 했다.

1411년 아주 귀한 선물이라며 코끼리 한 마리를 보내 대장경판을 요구했다.

조선은 코끼리를 예의상 받았지만, 애물단지였다.

식량을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데다 고위 관리를 밟아 죽이기까지 했다.

징벌 차원에서 한때 전남 순천 섬으로 유배 보냈다가 육지로 옮긴다.

태종이 죽이지 말고 잘 키우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다만, 사육비가 워낙 비싸 전라·경상·충청 등 3개 지방이 돌아가며 키운다.

일본은 코끼리 선물 약발이 통하지 않자 단식 투쟁도 벌였다.

세종 6년 대규모 사신단이 토산물을 바치며 대장경판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돌발 행동을 벌였다.

사신 2명이 갑자기 식사를 거부한 것이다.

이들은 "빈손으로 귀국해서 처벌받느니 차라리 여기서 먹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다"고 위협했다.

세종은 더는 버티기 힘든 듯 "우리에게 무용지물이니 그냥 내어주자"고 제안한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국보급 문화재가 일본 앙탈에 공짜로 넘어갈 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자 곧바로 없던 일로 한다.

신하들은 고귀한 대장경 가치를 고려해서 제동을 건 것은 아니었다.

 

경남 합천에 위치한 해인사 전경.

 

대장경판은 아낄 물건이 아니지만 이번에 넘겨주면 나중에 다른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류큐(오키나와) 왕국은 해인사로 무장 군대를 보내 약탈을 시도하기도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장경판 확보에 열을 올린 것이다.

불교를 억압하는 조선을 귀찮게 하면 언젠가는 넘겨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세종은 골머리를 앓자 대장경판 보관소를 이전하는 방안을 고려한다.

도성 근방인 회암사 등에 옮기면, 국보급으로 여긴다는 뜻을 일본이 알고 더는 요구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송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실행하지는 못했다.

대장경은 일제 강점기에도 위기를 맞는다.

일제가 강제로 반출하려고 했다.

해인사 승려들은 대장경을 불태워서 같이 타 죽겠다며 거세게 저항했다.

한 승려는 죽어서 대장경이 보관되는 일본 어디든 저주를 내리겠다며 칼로 자해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도 아찔한 상황이 있었다.

1950년 인천 상륙작전으로 후방에 고립된 인민군은 해인사 일대에 은신했다.

전투기 편대장인 김영환 장군 대령은 해인사를 폭격해 인민군을 소탕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김 대령은 그럴 수 없다고 버틴다.

빨치산은 금방 빠져나가지만, 문화재를 잃으면 복구할 길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김 대령은 전시 명령 불복종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 위기를 맞았다가 공군총장 탄원 덕에 간신히 구제된다.

해인사에서 창건 이후 무려 7차례나 큰불이 났을 때도 팔만대장경은 잘 견뎠다.

숱한 위기를 무사히 넘긴 덕에 대장경은 부처님 기적을 상징하는 문화재가 됐다.

2007년 6월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고려 선조들이 13세기에 합심해 이룬 업적을 세계 문화재로 국제사회가 인정한 것이다.

대장경은 한반도를 넘어 인류 보물로 격상된 만큼 잘 보존해서 세계에 널리 알리는 일은 이제 우리 후손의 몫이 됐다.

hadi@yna.co.kr

 

기사원문보기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4/24/0200000000AKR20170424149500797.HTML?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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