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엔 별개의 산으로 존재한 듯… 청학동은 小금강, 오대산은 亞금강으로 불러
‘병풍같이 둘러친 두 개의 절벽 사이에 시냇물이 흘러오다가 폭포수가 되어 떨어진다. 맑은 하늘에 천둥이 치듯 온 골짜기가 흔들린다. 그 폭포수는 다시 고여 못을 이루며, 이 못은 차가운 거울 같고 깨끗한 옥과도 같다. 주위의 풍광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데를 고르려 했지만 찾지 못하고 여러 번 자리를 옮겼다. 바로 서쪽으로는 한 봉우리가 우러러 보이게 우뚝 솟아 있다. 그 이름을 촉운봉矗雲峰이라 했다. 예로부터 식당암이라 부르던 바위를 비선암이라 개명했다. 골짜기를 천유동天遊洞으로, 절벽 바위 밑에 있는 못을 경담鏡潭이라 하고, 이 산 전체를 청학산이라 명명했다.’
― 율곡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 중에
율곡 이이(1536~1584년)는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다. 이들의 학문적 깊이와 사상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이들이 자연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비교해 보기 위해 율곡을 이번 호에 소개한다. 지난 호에 퇴계가 쓴 <유소백산록>에 견줘 이번 호에 율곡 이이가 오대산을 다녀와 남긴 <유청학산기>를 따라 가본다. 아쉬운 대목은 율곡은 청학산 유산 중 비가 내려 중간에서 내려와 미완으로 남은 채 지금까지 전한다는 점이다. 그래도 2박3일 일정이다.
퇴계와 율곡은 공통적으로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고 봤다. 당시 이러한 학문적 풍토는 12세기 안향이 성리학을 중국에서 들여오면서 도교적 무위자연사상이 유학에 습합되어 하나의 학문적 분위기를 형성할 정도였다. 구곡과 음풍농월, 은둔이 유행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학문적 풍토였기 때문이다. 조선 유학자들이 자연을 대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청학동’은 1220년 고려 중기 문신 이인로의 <파한집>에 거의 처음 언급된다. 이후 많은 학자들이 청학동을 찾아다닌다. 당시 이인로도 청학동을 찾아 헤맸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학동의 유래는 중국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온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무릉도원, 즉 인간의 이상향이 그곳에서 비롯된다.
율곡이 남긴 유산기에도 무릉계와 청학동, 소금강, 신선대 등이 소개된다. 율곡의 유산기에는 첫 출발지가 불명확하다. 따라서 지금 오대산 청학동지구가 있는 입구를 기점으로 한다.
1220년대 <파한집>에 청학동 첫 기록
입구엔 무릉계라는 이정표가 있다. 길을 안내한 강릉 토박이 신미영 오대산국립공원 자연환경해설사는 “율곡 이이가 청학동을 방문하기 전에는 복숭아나무가 많이 서식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없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율곡의 동선은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았지만 유산기에 등장하는 지명으로 볼 때, 지금의 탐방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지금과 같은 뚜렷한 탐방로는 없었겠지만 계곡으로 올라가면서 물을 피해 간 정황은 확실하다.
‘산길이 잡초로 막혀 있는 데다가 나뭇잎이 쌓여서 길을 분간할 수 없다. 시냇가를 따라 돌을 밟고 가자니 힘이 들었다. 얼마 안 가서 기이한 산봉우리와 겹겹이 쌓인 바위를 만났다. 기상이 사뭇 달랐다. 실과 같은 산길이 높은 산을 가로질러 나 있었다. 나무를 붙잡고 올라가니 구름에 쌓인 산봉우리가 아늑하기만 하다. 숲이 우거진 골짜기는 어둠에 잠겨 있다.’
율곡이 표현한 겹겹이 쌓인 바위 한쪽에 ‘二能契이능계 詠春臺영춘대 小金剛소금강’이라 새긴 글자가 눈길을 끈다. 유산기에 나오지 않은 걸로 보면, 율곡 이후에 석각된 글씨로 추정된다. 신 해설사는 “1700년대 명주(강릉의 옛 지명) 선비들이 청학동에 유람 와서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술을 잘 마시고 시를 잘 읊는 선비들이 두 가지 모두 잘 한다는 의미로 이능계라는 모임을 가졌던 것 같다”고 설명한다. 이능계는 9월에, 영춘대는 3월에 왔다고 석각에 남아 있다. 봄맞이 유람과 낙엽 쌓인 가을의 풍광을 즐긴 것으로 판단된다.
율곡 일행은 이능암을 지나 이윽고 석문에 들어섰다. 그 석문은 절벽 모퉁이에 크고 둥근 바위가 붙어 있고, 그 바위 밑에 구멍이 나 있다. 머리를 구부려야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다. 석문을 지나니 별세계가 나온다고 율곡은 묘사했다.
조금 더 올라가면 구룡폭포와 만물상이 나오는 등 식당암보다 더 청학동 같은 자연의 풍광이 기다리고 있는데 아쉬운 순간이다. 신 해설사도 “날씨만 나쁘지 않았다면 율곡이 구룡폭포와 만물상까지 올라가 또 어떤 지명을 남겼을지 정말 궁금하고 아쉽다”고 말했다. 실제 율곡은 이로부터 9년 뒤 해주 석담에서 고산구곡을 노래했다. 해주 석담의 자연 풍광이 청학동 소금강과 비교해서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충분히 그에 못지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율곡도 비슷한 감정으로 유산기를 마무리했다.
‘저 오대산이나 두타산은 이 산과 비교하면 그 품격이 한 수 아래 떨어지는데도 오히려 이름을 떨치고 아름다움을 전파해 찾아오는 사람이 끊이질 않는다. 이 산은 그 아름다운 자태를 많은 산봉우리 사이에 숨겨 놓아 누구도 그 참된 영역을 보지 못했구나! 하기야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하는 것이 이 산에 무슨 손익이 될까만 이치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번에 우리를 만나 이 산의 진가를 알리게 하니 이 또한 운수인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훌륭한 비경秘境이 산 속에 숨었는지 모른다. 아! 세상에서 때를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이 어찌 산뿐이겠는가.’
율곡은 오대산보다 청학산을 더 아름답게 봐
율곡은 더 이상의 청학산의 비경을 보지 못하고 해주 · 연천 등지로 옮겨 말년을 보냈다. 율곡이 노래한 청학산은 아름다운 자연으로 뭇 선비들이 찾아 작은 금강산으로 알려져 소금강으로 명명됐고, 광복 이후 1970년에 명승 제1호로 정부에서 지정했다. 명불허전 그대로였다.
그런데 과거나 지금이나 청학동이라 하면 전부 지리산으로 알고 있으나 오대산 청학동 지구에 청학산이 있는 줄 몰랐다. 율곡의 <유청학산기>로 인해 청학산이 선비들 사이에 마침내 회자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러 고문서에는 여전히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유람하는 것이 압도적이다. 신 해설사는 “원래 이 계곡 옆의 산이 청학산이었고, 주변 지역을 청학동이라 불렀다. 율곡이 유산기를 쓴 이후 이곳의 청학동이란 이름이 전국에 더욱 알려지는 계기가 된 거지, 없던 지명이 율곡으로 인해 생긴 것은 아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오대산 유람록은 조선 후기 문신 김창흡(1653~1722)이 쓴 <오대산기>가 대표적이다. 그는 1695년 8월 6~10일 4박5일간 유람한 기록을 <삼연집>권24 속에 남겼다. 그해 윤달을 포함하고 있어 지금으로 치면 9월 하순이나 10월 초순쯤 되겠다. 그의 일정 중 오대산권에서만 묵은 과정을 보면 금강연~월정사~금강대~오대산사고~상원사(1박)~중대~사자암~금몽암(지금 적멸보궁 추정)~상원사(1박)~진여각~북대~상원사(1박)~우통수~서대~상원사를 거쳐 하산한 걸로 나타난다. 등산이 아니고 유산의 과정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그의 흔적을 따라 가보자. 오대산국립공원사무소 남동준 해설사가 길을 안내했다.
월정사 옆 금강대서 쉬고 사고로
월정사 옆 오대천 계곡에 반듯한 바위가 있다. 김창흡은 이를 금강대라 했다. 금강대에서는 매년 산신을 모시는 행사를 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쉽지 않지만. 지금의 탐방로가 아닌 월정사 옆 잣나뭇숲 사이로 희미한 옛길이 보인다. 남 해설사는 “옛날에는 이 길로 상원사까지 올라간 듯하다”고 말한다. 운치 있는 길이다. 월정사 끝 지점에서 선재길이란 옛길이 조성돼 있다. 공단에서 옛날 사람들이 다닌 길로 추정해서 만들었다. 그 길로 오대산사고史庫로 향했다.
일행은 상원사로 향한다. 지금 탐방로와 같은 길이었는지 사고에서 바로 상원사로 넘어가는 고갯길이 있었는지는 불명확하다. 다리를 서너 번 건넌다고 하니, 지금의 선재길과 유사한 길로 간 것으로 추정된다.
상원사에 도착해서는 곧바로 중대로 향한다. 사자암을 거쳐서 금몽암에 도착했다. 그런데 금몽암이란 암자는 지금 없다. 문맥상 적멸보궁을 당시 금몽암이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이름난 샘물을 마셨다. 바로 중대 옥계수다. 적멸보궁 도착 직전에 나오는 용안수龍眼水가 당시 옥계수로 판단된다. 샘물은 지금 말라 있다.
오대산 오대에는 각각의 암자에 따른 샘물과 보살이 모셔져 있다. 비로자나불이 모셔진 중대 사자암엔 옥계수玉溪水, 대세지보살이 있는 서대 수정암엔 우통수于筒水, 관세음보살이 있는 동대 관음암엔 청계수靑溪水, 미륵보살이 있는 북대 미륵암엔 감로수甘露水, 지장보살이 있는 남대 지장암엔 총명수聰明水 등으로 나눠 불린다. 특히 중대는 원래 문수보살이 모셔져 있었으나 비로자나불로 변했다. 비로자나불의 협시부처님이 문수보살이기 때문이다. 문수보살은 항상 사자를 타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는 사자 형상이 많다. 중대에 사자암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북대는 하늘에서 보면 영락없이 코끼리 머리같이 생겨 상두암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김창흡은 적멸보궁 터를 ‘산신이 지키고 있는 풍수 제일의 명당’이라 표현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선 오대 지명에 대해 ‘동쪽이 만월滿月, 남쪽이 기린麒麟, 서쪽이 장령長嶺, 북쪽이 상왕象王, 복판이 지로智爐인데,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 섰고,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라 이름했다’고 소개한다. 아마 오대란 지명이 정착되기 전 각 봉우리마다 이름을 소개하는 듯하다.
그는 다시 상원사로 내려왔다. 이번엔 진여각眞如閣을 지나 북대로 향했다. 진여각은 신라 신문왕의 두 아들인 보천과 효명이 문수보살을 알현하기 위해 움막을 짓고 기도하는 중 연꽃이 피어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건물이다. 건물은 진여각이었지만 명칭은 진여원이었다. 이 진여원이 상원사의 이름을 유래케 했다. 진여원 위에 절을 지었다고 해서 상원사란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오대마다 모신 보살과 암자·물 이름 달라
북대 가는 중에 환희령, 일명 삼인봉이 나온다. 이곳은 지금 어디인지 불명확하다. 남 해설사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북대 가는 길은 외길이다. 임도로 제법 길이 넓어 차가 다닐 만하다. 가는 능선 위에서 상원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고즈넉한 산사의 모습이 운치 있게 보인다. 상원사에서 약 5km.
김창흡도 빨리 하산했다.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갔던 길로 되돌아 내려왔다. 그는 상원사에서 아침을 먹고 이번에 서대를 찾아가려고 한다. 북대와 비교하면 절반밖에 안 된다.
서대 가는 길은 가파르다. 거리는 1.8km쯤 되는 듯하다. 공단 직원들은 “서대 수정암 가는 길은 영원히 통제구간이다. 가파르기도 하고, 뱀이 많이 출몰하고, 너덜지대도 있어 안전사고의 위험도 있다”고 설명했다. 뱀은 햇빛에 몸을 말리려 바위 위에 몸을 드러내지만 이 날은 비가 내리고 구름이 잔뜩 낀 날씨다. 너덜지대가 미끄러울 뿐이다.
서대 수정암은 강원도 전통 가옥인 너와집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산 속에 홀로 터전을 내린 너와집 한 채는 승경 중의 승경이다. 승려 혼자 머문다고 한다.
‘이 산은 그릇이 중후해 마치 유덕한 군자 같다. 가볍거나 뾰족한 태도가 전혀 없다. 이것이 제일 승경이다. 빽빽한 잣나뭇숲과 아름드리나무는 해를 가려 영락없는 첩첩산중이다. 청한자 김시습은 “풀과 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속된 자들이 거의 오지 않는 점에서 보면 오대산이 최고”라고 말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둘째 승경이다. 암자가 빽빽한 산림 속에 있어 곳곳마다 하안거를 할 수 있는 것이 셋째 승경이다. 샘물의 맛이 가히 절색이라 다른 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이 넷째 승경이다. 이러한 네 가지 아름다움이 있어 아금강亞金剛이라 부르는 것이 정말 마땅하다.’
오대산 산신
한국 문수보살의 성지… 다른 신이 터전 잡기 쉽지 않을 듯
오대산은 신라 통일 직전 자장율사의 중국 유학에서 중국 오대산에서 유래했다고 <삼국유사>에 전한다. 같은 책 제3권 탑상 제4에 <산중고전>을 살펴보면 ‘이 산이 문수보살이 머무르던 곳이라고 기록한 것은 자장법사부터 시작됐다. 자장이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의 진산을 현몽하고 643년에 강원도 오대산에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3일 동안 날이 어둡고 흐려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녕사에 머물면서 문수보살을 뵈었다.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칡덩굴이 얽혀 있는 곳으로 가라”고 했으니 지금 정암사가 그곳이다. 훗날 두타승 신의가 있었으니 곧 범일대사의 제자다. 오대산에서 자장이 쉬던 곳에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신의가 죽자 암자도 역시 버려져 있었는데, 수다사의 장로 유연이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지금의 월정사가 바로 그곳이다’고 나온다.
중국 오대산은 불교의 성지다. 다른 신이 전혀 발붙일 수 없을 정도로 불교의 신, 즉 보살들이 자리 잡고 있다. 중국 오대는 유동문수(한국 비로자나불)가 있는 중대 금수봉(2,936m), 총명문수(한국 관세음보살)가 있는 동대 망해봉(2,880m), 사자후문수(한국 대세지보살)가 있는 서대 괘월봉(2,773m), 지혜문수(한국 지장보살)가 있는 남대 취암봉(2,757m), 무구문수(한국 미륵보살)가 있는 북대 협두봉(3,061m)으로 구성돼 있다. 중대 금수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하나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 형국이다.
불교경전에 따르면 ‘화북지방에 청량산이란 명산이 있는데, 그곳에 보살이 상주하고 있다. 그 이름은 문수라고 한다. 문수보살은 1만여 명의 보살과 함께 살며 항상설법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청량산이 곧 오대산이고, 때로는 오봉산이라고도 한다. 남 해설사는 “오대산의 원래 이름은 청량산”이라고 한다. 문수보살은 용의 화신이며, 석가모니불의 지덕과 체덕을 맡아서 부처의 교화를 돕기 위해 보살로 화했다고 한다. 문수가 타고 다니는 사자는 그의 지혜가 용맹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칼은 일체 중생의 번뇌를 끊겠다는 뜻이고, 왼손에 들고 있는 꽃(청련화)은 일체 여래의 지혜와 무상의 지덕을 맡는다는 의미다. 머리에 상투를 틀고 있는 것은 지혜의 상징이다. 다섯 개의 상투가 대일여래의 오지(五智)를 표현한 것이다.
중국 오대산은 이같이 문수보살의 발원지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며, 지혜는 통합을 이룬다. ‘일즉다(一卽多)이고 다즉일(多卽一)’이다. 화엄경의 아이콘인 것이다. 당시 중국은 몇몇 통일왕조를 거치지만 진정한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당나라는 강력한 통치 이데올로기가 필요했다. 화엄경의 지혜와 통합은 매우 적절한 사상이었다. 문수보살로 대표되는 불교는 급속도로 중국으로 전파됐고, 나아가 동아시아까지 확산됐다. 한반도에 문수신앙이 정착한 것은 신라 고승 자장에 의해서였다. 혜초도 문수보살의 지혜와 화엄경을 공부하기 위해 인도를 거쳐 중국으로 유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통합 이데올로기가 절실했던 시기였다.
자장은 643년(선덕여왕 12)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고, 오대산 태화지와 지명이 비슷한 울산 태화사, 용이 살던 곳인 양산 통도사에 사리를 봉안할 사찰을 건립했다. 이어 오대산 중대에 적멸보궁을 창건해 문수신앙의 중심도량으로 만들었다. 이곳이 한반도 문수보살 신앙의 효시다. 지금 문수사나 청량사, 또는 청량산오대산문수산 등은 전부 문수보살과 관련 있다고 봐도 거의 틀림없다.
이와 같이 오대산에는 불교 문수보살의 성지로서 다른 산신이 터전을 잡기가 영 신통찮다. 원래 산신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 정도 강한 영성이 있을 때에는 다른 신은 자리를 비켜 주는 게 도리일 것 같다. 아마 신의 세계도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