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의궤’의 실물이 드디어 다음달 9일 고향 평창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해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정부로 부터 운영 예산(15억4,200만원) 확보와 함께 본격적으로 진행된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평창 ‘국립조선왕조실록전시관(옛 왕조 실록·의궤박물관)’으로의 오대산사고본 문화재 이관 작업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서울을 중심에 둔 논리와 문화재보호법 등에 가로막혀 일본으로부터 반환을 받고도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의 복제본(영인본)만을 품고 있어야 했던 평창 ‘왕조 실록·의궤 박물관’의 드라마틱한 변신인 셈이다. 이번에 환지본처(還至本處·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옴) 되는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에 대한 네가지 궁금증과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본다.
Q1. 사고(史庫)는 왜 오대산에 지어졌나
사고(史庫)는 말 그대로 역사를 보관하던 창고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들의 사적을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을 비롯한 중요 서적과 각종 문서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사고는 한양에 있던 춘추관 사고를 내사고(內史庫)라고 불렀고, 지역에 있던 사고를 외사고(外史庫)로 구분했다. 외사고가 설치된 것은 중요 기록의 소실을 막기 위한 분산 보관에 목적이 있었지만 조선초기 충주와 성주, 전주에 있던 사고는 읍내에 위치해 있어 평상시에도 화재에 취약한데다 임진왜란(1592년)과 함께 모두 불에 타면서 새로운 사고 설치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졌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비변사는 아직 전란이 끝나지 않은 1594년에 “반드시 가파르고 험해 인적이 닿지 않는 곳을 가려야 후환이 없을 것(선조실록 55권, 선조 27년 9월 5일)”이라고 제안했다. 오대산 사고는 결국 1606년(선조 39년)에 이르러 강화도 마니산(→정족산), 평안도 묘향산(→적상산), 경상도 태백산 사고 등과 함께 건립된다. 오대산사고지는 물과 불과 바람 등 세가지 재앙이 침입하지 못하는 길지로 평가받았다.
Q2. 오대산사고에 실록의 교정쇄본이 보관된 이유는
임진왜란 기간 모든 사고의 문서들은 불에 타 사라지고 가까스로 전주사고에 보관되던 실록 등 문서만이 화를 이를 지킨 지역 사람들로 인해 화를 면하게 된다. 이후 전란이 끝난 1603년부터 1606년 사이 이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4부를 재간행하게 된다. 이렇게 제작된 실록은 오대산을 비롯해 산간지역에 새로 설치한 사고에 보관된다. 추가 제작된 3부에 교정쇄본 1부가 포함된 것이다. 다른 사고에는 정본 실록이, 오대산사고에는 교정쇄본이 봉안된다. 보통 교정쇄본은 실록 간행 후 글자를 물에 씻어 지우거나 불에 태워 파기하는 세초(洗草)를 진행했는데, 임진왜란 직후 실록을 인쇄할 종이가 부족한데다 고가였기 때문에 교정지를 제본해 오대산 사고에 보관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왕조실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실록청은 “방본(傍本) 1건은 바로 초본(草本)인데 지금 보관할 만한 지고(地庫)가 없으나 그냥 버리기가 아까우니, 강원도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는 것이 마땅하다(선조실록 199권, 선조 39년 5월 7일)”고 건의하고, 왕(선조)은 이를 허가한다.
Q3. 왜 오대산사고본만이 일본으로 옮겨졌나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대한제국이 패망한 이후, 일본은 본격적으로 우리 문화재 유린에 나선다. 오대산사고본 문화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록은 1913년, 의궤는 1922년 일본으로 불법 반출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정족산 사고본과 태백산 사고본은 경성제국대, 적상산 사고본은 창경궁 장서각으로 옮겨졌지만, 오대산사고본만이 유일하게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빼돌려 진다. 일본과 가까운 항구(주문진항)를 통해 약탈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 바로 평창이었기 때문이다. 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은 “총독부 관원 및 평창군 서무주임 히쿠찌(桶口) 그리고 고용원 조병선(趙秉璇) 등이 와서 월정사에 머무르며 사고(史庫)와 선원보각에 있던 사책(史冊) 150짐을 강릉군 주문진으로 운반하여 일본 도쿄대학으로 직행시켰다. 3일에 시작하여 11일에 역사(役事)를 끝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31년 일제가 작성한 ‘오대산 석존정골탑묘 찬앙회 취지서’에는 “정부의 명에 의해, 도쿄로 이송됐다”고 적고 있어,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직적 범죄임을 확인할 수 있다.
Q4. 오대산사고본 실록·의궤는 얼마나 ‘환지본처(還至本處)’ 됐나
오대산사고본 실록의 경우 일본이 약탈한 788책 가운데 1923년 일본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소장됐다가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소실되고 남은 것과 나중에 소재가 확인된 실록 등을 포함해 모두 74책으로 알고 있지만, 75책이 맞다. 이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대출 등으로 도서관 밖에 있으면서 화를 면한 실록 가운데 27책이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데 이어 2006년에 되돌려받은 47책을 단순히 더했기 때문이다. 다시 2018년에 오대산사고본 실록 가운데 ‘효종실록’ 1책이 추가로 환수, 국보로 지정되면서 최종 75책을 구성하게 됐다. 오대산사고본 의궤는 2010년 간 나오토 전 일본 총리의 도서 반환계획에 따라 돌아온 82책으로 임금이 열람하는 어람건(御覽件)이 아닌, 보관을 목적으로 하는 분상건(分上件) 의궤다. 이들 문화재들은 지난해 국회의 ‘국립조선왕조실록 전시관 설립 촉구 결의안’ 채택과 월정사의 ‘왕조 실록·의궤 박물관’ 기부 체납, 정부의 운영예산 편성과 리모델링 작업 진행 등이 급물살을 타면서 이관작업을 통해 다음달 평창에 새롭게 둥지를 틀게 된다.
Q5. 실록 47책과 의궤 82책은 왜 뒤늦게 환수됐나
2006년과 2011년에 각각 되돌아온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는 그 실체를 몰랐기 때문에 일찌감치 환수운동이 벌어지지 않았고 환국에도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이다. 실록은 1984년과 1987년 배현숙 계명대 명예교수가 관동대지진 이후 도쿄대가 회수한 오대산사고본 실록의 잔본들을 도쿄대의 ‘소잔본목록(燒殘本目錄)’을 통해 확인하고 2004년도쿄대 도서관에서 오대산사고본 실록 47책이 도쿄대 도서관 귀중서고에 보관돼 있다는 기록을 통해 실재(實在)를 확인했다. 의궤는 월정사 등이 참여한 환수위원회가 오대산사고본 문서의 행방을 쫓던 중 2006년 10월 일본 궁내청에 보관된 사실을 밝혀내고 열람하면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뒤늦게 오대산사고본 실록과 의궤를 확인한 것은 일본의 기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5년 한일협정 이전부터 반환요구가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이는 일본의 공식문서 ‘한국관계 문화재 추가참고자료(1958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이조실록(李朝実録)이 전부소실(全部焼失) 되고 사진복제(写真複製) 된 것만 남아있다”고만 밝히고 있다.
오석기기자 sgtoh@kwnews.co.kr
2023-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