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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오대산 상원사 중창 권선문(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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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3-12-05 13:31 조회1,490회 댓글0건

본문

“바른 인연 만드니 마음이 보리라 세자에 부촉해 전하노라”

한글로 조성된 최초 필사본
현전하는 最古의 한글 필서
세조 신미대사 작성한 ‘2건’
세조 권선문 어첩으로 불려

여기서 다루고 있는 15세기 언해본 불서들은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모두 인쇄의 과정을 거쳐서 출판된 문헌, 곧 인간본(印刊本)들이다. 인쇄본의 형태는 대부분 활자본이나 목판본이고, 나중에는 인경(印經) 목활자본(1496년)이 출현하기도 했다. 그 단 하나의 예외에 해당하는 문헌이 바로 <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五臺山 上院寺 重創 勸善文)>이다. 한글로 조성된 최초의 필사본으로 장정의 형태는 절첩장(折帖裝)이다. 

그런데 이 문헌은 언간으로 불리는 사신 형식의 편지글이 아니고, 공지의 성격을 띤 권선 모연문(募緣文)이다. 혜각존자 신미대사와 국왕인 세조가 각각 작성한 두 건의 권선문인데, 이를 필사하여 첩장으로 조성해 놓은 것이다. 정음으로 쓰인 15세기 최초의 필사본이면서, 현전 최고(最古)의 한글 필서(筆書) 자료라는 가치를 가진다. 국보 292호로 지정돼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문헌은 두 첩으로 나뉘어 있다. 언해본 한 첩과 한문본 한 첩이다. 두 첩 모두에 신미대사와 세조가 각각 작성한 ‘권선문’이 들어 있다. 세조의 권선문은 국왕이 썼다고 하여 ‘어첩(御牒)’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두 첩 중 서외제가 있는 문헌은 언해본이다. 언해본에만 ‘御牒(어첩)’이라는 서외제가 있다. 이 서외제 때문에 언해본에만 세조의 권선문이 들어 있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어서 주의를 요한다.

두 종류의 첩장 중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문헌은 언해본 첩장이다. 언해는 대역(對譯)의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언해의 방법에서는 불경 언해서들과 차이가 있다. 구결문을 만들지 않고, 한문 원문의 바로 다음에 행을 바꾸어 같은 크기의 글자로 언해문을 둔 것이다. 언해문에 들어 있는 한자에 주음을 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한자에도 한자음 주음을 단 예는 없다. 원문 다음에 언해문을 배치하고, 그 다음에 국왕의 존함과 직함이 들어 있는 기명행(記名行), 왕비의 직함 기명행, 국왕이 보낸 시주물인 물감[彩色] 등 중창 불사용(佛事用) 자재의 물목, 세자 기명행, 그리고 내명부 및 외명부 여성들로 되어 있는 공덕주(功德主) 열기(列記)를 둔 형식이다. 국왕을 포함해 18명에 달하는 시주질(施主秩)이다.

국왕 존함앞 불제자로 표기
국보로 지정돼 월정사 소장
구결문 없이 원문 옮긴 번역

왕의 존함과 직함 밑에는 실명의 기명이 있는데 존함 앞에 ‘불제자’라는 표현을 쓴 점이 시선을 끈다(佛弟子承天體道烈文英武朝鮮國王李). 기명의 끝에는 어압(御押)과 함께 방형의 옥쇄 인기를 두었다. 왕비의 직함 뒤에도 방형의 인기가 있고, 세자는 수결(手決)과 방형의 인기를 모두 두었다. 여성들의 경우에는 인기를 두기도 하고 생략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주질을 두어 모연에 동참한 이들을 밝힌 것이다. 한문본에는 어첩을 내린 국왕을 제외하면 세자를 비롯해서 234명에 달하는 남성 공덕주들만 배열하여 차이를 보인다.

신미대사가 작성한 권선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임금의 은혜가 매우 크고 무거우나 우리가 보답할 힘은 적다. (보은의 방안으로) 영이하고 수승한 땅에 상원사를 다시 지어 복 빌 곳으로 삼고자 우리가 의발(衣鉢)을 다 모았다. 그런데 주상과 중전이 이 내용을 듣고, 특별히 윤명을 내렸다. 불사를 도와 국인(國人)의 이로움을 넓히겠다는 뜻에서, 어의(御衣) 몇 벌과 쌀, 포목, 토목 공사에 쓸 자재들을 지원하라고 했다. 이런 큰 보시가 있으니, 모든 시주와 불자들은 환희심과 보리심을 내어 위로는 주상의 성수 무궁을 빌고, 아래로는 억만대에 이르도록 복리가 끝이 없어서 영원히 요익(饒益)하기를 기원한다.”

세조가 작성한 권선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잠저(潛邸)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대사와 불연을 이어 왔는데, 도(道)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결같은 청정심으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대사의 공이다. 대사께서 내가 병상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백리를 분주히 오니 감동의 눈물이 끝이 없었다. 또한 대사가 학열, 학조와 더불어 나를 위하여 옷을 다 팔아 절을 다시 짓는다고 하니, 그 감동이 이루 다 이를 바가 아니다. 이러 하므로 내가 대사 등을 위하여 기꺼이 조금 쓸 것들로 도와서 궁극적으로는 바른 인연을 만드는 것이니, 이른바 곧은 마음이 곧 보리이다. 세자에게 부촉하여 길이 후손에 전하노라.”

언해본은 앞뒤의 표지를 제외한 본문 부분이 모두 32면(절첩 부분을 경계로 오른쪽 절첩선에서 시작하여 6행으로 마무리되는 왼쪽 절첩선까지를 1면으로 한다)이고, 한문본은 앞뒤의 표지를 제외하면 모두 64면이다. 언해본의 붉은 색 표지 위쪽에는 ‘御牒(어첩)’이라는 묵서가 종서로 쓰여 있다. 그리고 표지 한 면을 넘기면 첫 행에 ‘五臺山上院寺重創勸善文(오대산상원사중창권선문)’이라고 적어 놓아서 흔히 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언해본의 한문으로 된 부분과 정음으로 옮긴 부분 등 두 편의 권선문을 모두 합해야 17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중 정음으로 된 부분은 10면이다. 한문본 역시 본문은 8면이지만 시주질이 길게 있어서 64면이 된 것이다.

당시 현실 언어 반영해 주목
15세기중반 한국어연구 자료
공덕주 250여 명 명단 수록
직제 서지 연구에도 큰 도움

언해본은 경어법의 구사가 두드러진 문어체 중심의 문장으로 되어 있고, 글의 성격상 사용된 어휘도 제한적이다. 하지만 구결문 없이 원문을 바로 옮긴 번역이어서 당시의 현실 언어가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고 본다. 국어사 연구 자료로써 활용 가치가 높은 이유이다. 이런 점으로 인해 이 문헌이 그동안 훈민정음 창제 직후인 15세기 중반의 한국어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이용되어 왔다. 그런가 하면 두 책의 공덕주 열기에 보이는 도합 250여 명에 달하는 당대의 인물들인 왕비, 세자, 세자빈, 종친은 물론, 내명부 및 외명부의 여러 여성들과 품계, 그리고 중앙과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거나 퇴임한 수많은 전·현직 관료들의 직함과 수결 등은 당시의 직제 연구나 서지 연구에 도움이 되고 있다.

그런데 두 문건을 쓴 이가 국왕과 신미로 서로 다르고, 쓴 시기 또한 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데, 비슷한 필체로 필사된 두 종류의 문건이 한 첩에 들어 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다. 이는 우리가 접하는 첩장이 글쓴이가 맨 처음에 작성한 그 진필(眞筆)이 아니라, 나중에 누군가에 의해 새로 쓰여서 각각 언해본과 한문본의 두 첩으로 조성된 후 보관돼왔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두 건의 권선문을 쓴 각각의 시기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듯 ‘권선문’과 ‘어첩’을 쓴 시기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데, 언해본과 한문본 모두 신미 작성의 권선문에만 쓴 날짜가 적혀 있고, 어첩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어서 이의 해명에 혼란이 있었다. 권선문의 경우에는 언해본과 한문본 공히 한문으로 된 권선문의 말미에 적혀 있는 ‘天順八年臘月十八日’(세조 10년, 1464년 12월 18일)로 보아 그때에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조의 어첩에는 어디에도 작성 연대가 명기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세조 11년(1465년) 2월 20일의 실록 기사에는 두 첩장의 중창 불사용 자재 물목에 나오는 내용(품목과 수량)이 동일하게 나온다. 

또한 같은 해 4월 4일의 기사에 호조판서가 김국광(金國光)에서 노사신(盧思愼)으로 바뀐 것으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문본 첩장의 공덕주 열기에는 두 사람 모두 호조판서의 직함으로 적혀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그 즈음에 작성된 것으로 본다. 

202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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