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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65.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㉟ 신라 중고기의 왕실계보와 진종설화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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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9-11-19 14:27 조회5,3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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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 율사가 창건한 수다사지 삼층석탑 전경


지금까지 13회에 걸쳐 27대 진평왕대(579~632)부터 29대 태종무열왕대(654~661)까지 83년 동안 용수(龍樹)‧춘추(春秋) 부자의 정치적 성장과 즉위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왕권강화와 지배체제의 정비과정을 추적하여 보았다. 신라의 ‘중고’기에서 ‘중대’로 전환되는 시기의  고대국가의 발전과정 문제를, 용수‧춘추 부자의 정치적 성장과정을 중심으로 하여 이해를 추구한 것은 지금까지 역사학계에서 동륜태자‧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계통을 성골(聖骨), 진지왕(사륜)‧용수‧춘추(태종무열왕) 계통을 진골(眞骨)로 신분을 구분하고, 이 시기의 역사를 두 계통 사이의 대립과 갈등의 구도로 상정하는 이해를 추구해 오고 있는 것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촉구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역사학계의 이러한 이해는 사실과는 크게 다른 것이며, 나아가 성골과 진골의 신분 구분 자체가 전연 의미가 없는 것으로서 전면적인 재검토가 요구되는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제 지금까지 추구하여 온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용수는 진지왕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인 진지왕의 실정(失政) 책임으로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왕위는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이 뒤를 이어 진평왕이 되었다. 진평왕의 즉위에는 그 어머니가 입종(立宗) 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萬呼夫人)이었다는 점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용수는 진평왕 44년(622) 내성사신(內省私臣)이 되어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의 3궁을 관리하게 되었는데, 내성의 권한은 3궁의 관장에 그치지 않고 국왕 고유의 지배영역과 궁정 관할의 공방(工房) 등 일체를 관리함으로써 왕권을 지탱하는 핵심 조직이었고, 삼국통일 이후 관할 기구가 더욱 방대하게 되면서 강력한 중대왕권을 뒷받침하는 핵심 기관이 되었다. 진평왕 51년(629)에 용수는 대장군이 되어 가야계 출신의 서현(舒玄)‧유신(庾信) 부자와 함께 출병하여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용수‧춘추 세력과 서현‧유신 세력의 연합은 이미 진평왕대부터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대 들어가 용수의 정치적 영향력은 더욱 강화되어 4년(635)에는 곧 상대등이 되는 수품(水品)과 함께 실권자로서 전국 주현(州縣)을 돌면서 위문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14년(645)에는 황룡사 9층탑의 조성사업을 총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용수는 진평왕의 사위이자, 선덕여왕의 제부의 신분으로서 선덕여왕의 불안한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용수는 진덕여왕 즉위년(647)에 적어도 69세 이상의 고령으로서 그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측된다. 

용수가 사망한 이후 ‘중고’기의 왕권을 뒷받침하는 역할은 아들인 춘추에게 이어져 김유신과 함께 반여왕세력인 비담(毘曇) 등을 제거하고 진덕여왕을 즉위시키었다. 그리고 춘추는 김유신과 처남 매부의 인척관계로서 군사권을 장악한 김유신의 지원을 받으면서 대당외교를 주도하여 선덕여왕 2년(648) 당 태종과 나당군사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삼국통일의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중국의 선진문물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진덕여왕 5년(651) 집사부(執事部)를 중심으로 하는 행정관서를 정비하고 그 운영원리로서 유교정치이념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진덕여왕 8년(654) 3월 춘추가 29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중고’를 마감하고 새로이 ‘중대’를 열게 되었는데, 당시 춘추의 나이는 52세였다. 김춘추 이후의 강력한 중대왕권은 궁정 업무를 관장하는 내성(內省)과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집사부(執事部)라는 양대 기구를 통해 구축되어 갔는데, 두 기구는 용수와 춘추 부자에 의해 마련된 것임을 유의할 것이다. 

한편 용수와 김춘추 부자는 ‘중고’기의 진평왕대부터 진덕여왕대까지 대를 이어가며 왕권을 뒷받침하고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한 나머지 마침내 태종무열왕으로서 새로운 ‘중대’를 열게 되었는데, 이들 부자와 여러 측면에서 견주어지는 인물로서 무림(武林)‧자장(慈藏)의 부자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용수‧춘추 부자와 무림‧자장 부자는 정치사상적으로 협력과 대립의 2중적인 관계를 이루면서 ‘중고’기 후반의 정국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무림‧자장의 가계는 무림이 소판(蘇判)이라는 3등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아 진골귀족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속고승전(續高僧傳)’ 권15, 법상전(法上傳)에서는 자장을 신라의 왕자(王子)라고 하여 그의 가계가 진골귀족 가운데서도 왕실의 일원이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또한 고려시대(1307) 민지(閔漬)의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오대산월정사사적五臺山月精寺事蹟)에서는 자장이 무림의 둘째 아들이었고, 선덕여왕의 친족(親族)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두타산삼화사사적(頭陀山三和寺事蹟)’에서는 신라의 왕손(王孫)으로 기록되어 있어 ‘중고’기의 왕실과 친연성이 매우 깊은 관계였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무림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2, 진덕왕조에 의하면, 진덕여왕대(647~654) 남산 우지암(于知巖)에서 개최된 6인의 원로회의 참석자 가운데 4번째로 거명되고 있었던 것을 보아 진덕여왕대까지 생존하면서 최고 원로 실력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원로회의 구성원 가운데서 50대 전반의 김유신이 여섯번째로 거명된 반면, 용수가 누락된 것은 진덕여왕 즉위에 앞서 사망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무림에게는 아들인 자장을 얻기 위해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는 탄생연기설화를 전하고 있으며, 딸인 법승랑(法乘娘, 南澗夫人)의 아들 3형제가 모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볼 때, 독실한 불교신앙의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3형제는 국교대덕(國敎大德)・의안대덕(義安大德)・명랑(明朗, 國育) 등인데, 특히 의안대덕은 문무왕 14년(674) 9월 대서성(大書省)에 임명되었으며, 명랑은 문무왕대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기 위한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개설하였고 뒤에 밀교 계통의 신인종(神印宗)의 조사로 추앙받았다. 이로써 무림의 집안은 독실한 불교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며, 대를 이어 아들인 자장, 외손자인 국교대덕・의안대덕・신인종 조사 명랑 등의 승려를 배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림과 비슷한 연배인 용수는 때로 용춘으로도 불렸는데, 첫 이름인 용수가 인도 대승불교의 집대성자인 용수(龍樹, Nāgārjuna)의 이름을 취한 것임을 볼 때, 원래는 불교적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뒤에 자신의 이름을 용춘으로 바꾸고, 아들의 이름은 춘추로 작명한 것을 보아 불교에서 유교로 개종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음 자장은 ‘중고’기의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후대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쳐서 흥륜사 금당에 소상(塑像)으로 모셔진 신라 10성(聖) 가운데 한 분의 고승으로 추앙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자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학자들에 의해서 각자마다의 추정연도가 분분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어느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한 실정이다. 자장의 생몰년에 관한 추정연도의 예를 들면 607~676(?)년설(江田俊雄), 608~677(?)년설(趙明基), 596이전~667년이전설(安啓賢), 590년경~658년경설(金渭錫), 590년경~654년경설(鄭炳三), 610년전후~650년전반경(南東信) 등인데, 어느 주장도 추정치일 뿐이다. 현재 전해지는 자료들을 좀더 면밀하게 검토하면 근사치 정도는 추정할 수 있다. 첫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앞서 제시한 바 있는 민지가 찬술한 ‘봉안사리개건사암제일조사전기’인데, 그에 의하면 자장이 국왕의 출사령(出仕令)을 거부하고 출가를 허락받은 때의 나이가 25세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뒤에 자장이 당에 유학 가는 해가 선덕여왕 7년(638)이었는데, 그가 입당에 앞서 백골관(白骨觀, 또는 枯骨觀)이라는 고된 수행을 체험하였으며, 제자들을 이미 양성하여 당에 갈 때에는 승실(僧實) 등 10여명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갔다는 사실 등을 감안할 때 비교적 늦게 출가하였고, 상당기간의 수행을 거쳤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출생과 출가년도를 추정하면 진평왕 22년(600)에서 동왕 27년(605) 사이에 출생하고, 진평왕 46년(624)에서 동왕 51년(629) 사이에 출가를 허락받았으며, 선덕여왕 7년(638) 당에 갈 때의 나이는 34세에서 39세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자장이 입적한 해에 대해서는 도선(道宣)과 동문인 도세(道世)의 ‘법원주림전(法苑珠林傳’ 권64 자장전(慈藏傳)에 의하면 자장은 경미한 병에 걸려서 영휘(永徽) 연간(650~655)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또한 ‘통도사지(通度寺誌)’의 옛 기록인 ‘사바교주계단원류강요록(娑婆敎主戒壇源流綱要錄)’에는 자장이 수다사(水多寺)를 창건한 때가 진덕여왕 5년(651)이었다고 기록하여 자장이 진덕여왕 6년(652)에서 태종 무열왕 2년(655) 사이에 입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자장은 600년대 초반(진평왕 22~27년)에 출생하여 650년대 전반(진덕여왕6~무열왕2)에 입적하였으며, 고승으로서는 50세 전후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무림․자장 부자의 생몰년을 앞서 언급한 용수․춘추 부자의 그것과 비교할 때, 무림은 용수, 자장은 춘추와 같은 시기를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양 가계는 같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선진 문물제도의 수입을 선도하였으며, 국가의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여왕의 실추된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상징물로서 황룡사의 9층탑 조성을 함께 주도하였다. 그러나 두 가계 사이에는 불교와 유교라는 사상적 입장에서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진덕여왕 5년(651) 김춘추가 집권하여 중앙의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그 운영원리로서 유교정치이념을 채용하게 되면서 불교 계율의 강화와 교단의 정비를 추진하던 자장은 지방으로 밀려나서 불우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는 ‘중고’기의 불교를 대표하는 자장의 불교사상, 그리고 나아가 ‘중고’기에서 ‘중대’로의 사상적 변화의 의의를 자장과 김춘추의 대비를 통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밝혀 보고자 한다.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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