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홍도가 다시 그린 듯… 순백의 오대산은 여전히 눈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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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0-02-05 15:37 조회6,131회 댓글0건본문
[자박자박 소읍탐방]<51>평창 진부면 월정사에서 적멸보궁까지
눈보다 비가 잦은 겨울, 설경이 그리우니 일부러 찾아 나섰다. 목적지는 평창 진부면, 지난달 30일 강원 산간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영동고속도로 새말휴게소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고원지대지만 높은 산자락에도 눈은 없었다. 평창으로 접어들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진부역에 도착했을 땐 눈송이가 제법 굵어졌지만 영상의 기온 탓에 바닥에 쌓이지는 않았다.
도깨비장난인가, 전나무 숲길과 월정사 설경
진부는 사실상 평창의 중심이다. 군청소재지인 평창읍보다 인구가 많다. 고속철도 KTX역도 동계올림픽 경기 시설과 가까운 대관령면이 아니라 진부면에 들어섰다. 조선시대부터 한양과 강릉을 잇는 길목이어서 진부 오일장(3ㆍ8일)은 정선과 횡성의 장꾼이 모일 정도로 일대에서 큰 장이었다. 고속도로에 이어 고속철도까지 통과하면서 면 단위 시장으로선 상대적으로 생기가 넘친다. 오대산과 천년고찰 월정사를 품고 있다는 것도 큰 이유다.
월정사는 진부역에서 약 12km 떨어져 있다. 보통 사찰의 ‘경내’라고 하면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구역이지만, 월정사의 범위는 특정하기 힘들 정도로 넓다. 매표소(입장료 성인 1인 3,000원, 주차료 5,000원)를 통과해 월정사를 지나고, 부속 사찰인 상원사, 그 뒤편 산중턱의 사자암, 꼭대기의 적멸보궁까지 합하면 사실상 오대산 남쪽 산자락 전체가 월정사다.
월정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눈이 제법 쌓였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가루처럼 흩날린다. 계곡을 따라 조성한 산책로, ‘선재길’도 새하얗게 변했다. 개울의 자갈도 눈으로 덮여 둥글둥글, 모난 구석이 감췄다. 올겨울 평창 사람들도 이정도 눈은 처음이라며 곳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예년이면 꽁꽁 얼었을 계곡에 물소리가 청량하다. 그렇게 계곡을 따라 조금 내려오다 다리를 하나 건너면 월정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오대산 전체를 사찰로 여기기 때문일까. 일반적으로 일주문 현판에는 ‘○○산△△사’라 쓰여 있는데, 월정사 일주문에는 한자로 ‘월정대가람(月精大伽藍)’이라 적혀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월정사의 상징 전나무 숲길이 시작된다. 넓은 산책로 양편으로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찌른다. 이따금씩 도깨비장난처럼 흩날리는 눈가루가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나무 향기가 달다.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스러진 아름드리 전나무 자체가 작품이지만, 돌과 나무 등 자연을 이용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 숲은 2016년 드라마 ‘도깨비’ 촬영지이기도 하다. 최근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포레스트’도 이곳에서 찍었다. 이렇게 약 700m를 걸으면 월정사 마당으로 들어선다.
대웅전 격인 적광전 앞에 불탑 하나가 단연 눈길을 잡는다. 국보 제48-1호 팔각구층석탑이다. 탑 이름에 호사스러움이 그대로 반영돼 있다. 추녀 끝이 말려 올라가듯 8각으로 날렵하게 깎은 돌을 층층이 쌓아 올린 모양이다. 모서리마다 작은 종을 매달았으니 72개 풍경 소리가 자아내는 화음이 또 예술이다. 탑은 가까이 갈수록 웅장하고,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특히 적광전 옆 나무 사이에 서면 사찰의 전각이 모두 가려져 깊은 산중에 홀로 선 듯 고고한 자태를 드러낸다. 석탑 바로 앞, 오른쪽 무릎을 꿇고 앉은 석조보살좌상은 석탑과 한 쌍으로 역시 국보다. 보일 듯 말 듯 은은한 미소가 특히 매력적인데, 진품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있다.
자장율사가 오대산 자락에 사찰을 지은 가장 큰 이유는 물ㆍ불ㆍ바람 등 3재가 없는 곳이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월정사는 자연재해는 피했지만 전란은 비켜가지 못했다. 천년 고찰을 자랑하지만 현재 월정사의 가람은 모두 한국전쟁 이후 지은 건물이다. 적의 은신처로 활용될 것을 우려해 전부 불태웠기 때문이다. 석탑과 석불이 온전하게 남은 건 그나마 다행이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까지 환상의 설경
월정사의 부속 사찰인 상원사까지는 계곡 상류로 9km 거슬러 올라야 한다. 전나무 숲에서 시작한 ‘선재길’이 계곡을 따라 연결돼 있어 걸을 수도 있지만, 보통은 버스를 타거나 개인 차량을 이용한다. 월정사 뒤편부터는 비포장도로다. 눈이 내려도 버스가 다니는 데 지장이 없도록 수시로 제설 작업을 하지만, 바닥이 얼어붙기 때문에 운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최소한 타이어에 뿌릴 미끄럼 방지용 스프레이는 준비해야 한다. 눈길 운전에 자신 없으면 버스를 이용하는 게 상책이다. 약 한 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상원사로 가는 도로는 완만한 오르막이다. 월정사보다 약 250m 높은데, 설경은 그 이상으로 차이 난다. 앙상한 가지에 솜뭉치처럼 들러붙은 눈이 갈수록 두꺼워진다. 산자락에 군락을 이룬 침엽수는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한다. 계곡의 자갈과 바위에도 둥그스름하게 눈이 덮여 온천지가 뭉근한 수묵화다. 세상사 모든 근심은 물소리 바람소리에 묻힌다.
상원사는 월정사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더 깊은 산중이라 고즈넉한 정취는 오히려 낫다. 한국전쟁의 전란 속에서도 유일하게 화를 면한 문수전 앞마당에 서면 우람하면서도 부드러운 오대산 능선이 눈높이와 엇비슷하게 펼쳐진다. 여기까지 오는 여행객의 최종 목적지는 상원사가 아니라 사찰 뒤편 산꼭대기의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곳이다. 이곳 외에 양산 통도사, 인제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 정선 태백산 정암사가 5대 적멸보궁으로 꼽힌다.
상원사에서 적멸보궁까지는 본격적인 등산이다. 약 1.5km, 왕복 2시간을 잡는다. 등산로는 상원사 뒤편과 옆, 두 갈래로 나 있다. 눈이 내린 날은 조금 돌아가지만 완만한 옆길을 선택한다. 제설 작업을 하지만 산길이 완벽할 순 없다. 특히 바위 계단에 내린 눈은 얼어붙기 십상이어서 아이젠을 꼭 챙겨야 한다.
한겨울에도 적멸보궁을 찾는 발걸음에는 그만큼 간절함이 배어 있다. 석가모니 신체의 일부를 모신 곳이니 불자에게 기도 도량으로 이만한 곳이 없다. 등산로 초입부터 ‘백일기도’ ‘천일기도’에 ‘입춘기도’까지 곳곳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상원사를 조금 벗어나면 길은 곧장 끝없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한 계단 오를 때마다 순백의 풍경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서니 걸음은 절로 느려지고 거친 숨소리는 탄성으로 바뀐다. 중턱쯤 오르면 가파른 경사를 따라 5층으로 지은 중대(中臺) 사자암에 도달한다. 눈 쌓인 지붕 너머로 오대산 정상 비로봉 능선이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모습을 드러낸다. 눈인지 상고대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그저 눈부시고 황홀하다.
오대산의 오대(五臺)는 동대ㆍ서대ㆍ남대ㆍ북대 그리고 중대 다섯 봉우리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그중에서도 중대는 오대산의 중심이자 월정사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지은 사찰이 바로 중대 사자암이다. 1788년 단원 김홍도가 그린 ‘금강사군첩’ 중 ‘오대산중대’에 이곳을 중심으로 한 일대의 지형이 상세히 묘사돼 있다. 머릿속에 상상하며 그렸을 오대산 능선이 공중에서 본 것처럼 웅장하고 생생하다. 실제 상원사를 중심으로 놓고 찍은 드론 사진과 비교해보니 놀랍도록 흡사하다. 이토록 우람한 오대산 산세를 김홍도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 그림은 월정사 성보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자암에서 적멸보궁까지 등산로는 비교적 완만하다. 좁은 길 양편에 일정한 간격으로 세운 석조 조각이 길을 안내한다. 조각 구멍에서 새어 나오는 불경 소리가 잔잔하게 산자락을 감싼다. 느릿느릿 걸어 정상에 도착하면 ‘적멸보궁’이라 쓴 수수한 법당 하나만 세워져 있다. 법당 뒤편 진신사리를 모신 무덤에도 작은 비석 하나만 있다.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소박하다. 적멸보궁은 바깥 세상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러운 궁전이라는 뜻이다.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으니 괴로울 것도 없는 부처님의 경지다. 간절한 마음으로 힘든 걸음을 한 여행객도 조용히 합장하고 욕심을 내려 놓는다. 반쯤 눈에 파묻힌 비석 뒤로 오대산 능선이 눈부시다.
평창=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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