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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보신문] [전법과 재건의 역사 불사] 1. 한국사찰은 어떻게 창건·중창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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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0-05-31 19:37 조회4,4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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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창건·중창불사 거듭하며 1700년간 불조 혜명 잇다

몽골침략·임진왜란·6·25전쟁 거치며 수많은 사찰과 성보 소실
스님과 불자들의 탄식과 눈물, 신심과 정성 깃든 불사로 회복
오늘날 불사, 부처님 가르침·시대정신 어떻게 담을지 논의 필요
6.25전쟁 때 팔각구층석탑만 남기고 전소된 월정사 모습(출처: ‘한국전쟁과 불교문화재1’)과 오랜 불사를 통해 사격을 회복한 현재 월정사 전경(월정사 제공)
6.25전쟁을 거치며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송광사 과거 모습과 사격을 되찾은 현재 송광사 전경. 송광사 성보박물관 제공

불사(佛事)는 불교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총칭하는 말이다. 법회를 열고 불공이나 각종 재를 드리는 것, 경전을 간행하고 전각을 짓거나 불상을 조성하는 것도 모두 불사에 포함된다. 그러나 근래에 불사는 사찰을 중창하고 전각을 중수한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이는 불교와 관련된 모든 일이 불사지만 사찰을 세우고 전각을 짓는 것이 불사의 근간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사찰은 법문, 수행, 기도, 신행, 전법, 문화 활동과 수많은 행사가 열리는 성스러운 공간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을 이룬 뒤 승가공동체를 만들고 대중교화를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불교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와 기원정사가 있었다. 부처님은 이들 정사에서 19~26년을 머물렀고 대다수 경전도 이곳을 배경으로 설해졌다. 빔비사라 왕과 수닷타 장자가 지어 보시한 것은 단순한 수행공간이 아니었다. 불교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던 장엄한 무대였고,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을 진리와 행복으로 이끈 전법의 거점이었다.

1700년 한국불교도 사찰과 더불어 흥망성쇠를 함께 했다. 사찰을 짓는 창건불사로 부처님 가르침을 펼쳤으며 불타거나 쇠락한 사찰은 중창불사를 통해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불사는 고구려 소수림왕에 의해 이뤄졌다. 그는 불교를 공인한지 3년째 되던 375년 2월, 두 개의 사찰을 지어 초문사에는 진나라에서 온 순도 스님을, 이불란사에는 전진에서 온 아도 스님을 각각 머무르도록 했다. 이어 백제에서는 처음으로 385년 영광에 불갑사가, 신라에서는 544년 경주에 흥륜사가 세워지면서 한반도에서 불교가 서서히 꽃을 피워갔다. 수많은 사찰들이 속속 창건되고 그곳에서 지혜와 자비의 법석이 펼쳐졌다.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는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곳곳에 사찰을 지었다. 왕은 불사를 전담하는 기구인 ‘성전(成典)’을 두어 창건불사를 이끌었고 종을 주조하거나 탑을 세워나갔다. ‘삼국유사’에서 ‘절이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이 기러기 행렬처럼 늘어서 있다(寺寺星張 塔塔雁行)’는 서라벌에 대한 묘사는 신라에 수많은 사찰이 있었음 보여준다. 당시 사찰 불사는 국가와 스님이 주도했으며, 불국사와 석굴암처럼 재가불자의 원력으로도 이뤄졌다.

국교가 불교였던 고려시대에도 불사의 양상은 비슷했다. 관과 민에 의해 불사들이 잇따라 진행되고 장엄한 법의 무대가 마련됐다. 고려는 신라처럼 ‘도감(都監)’이라는 중앙 관서를 설치해 불사를 담당토록 했다. 현화사, 중광사, 봉선홍경사 등은 도감을 통해 국찰로 탄생한 대표적인 사찰들이다. 고종 연간 6차에 걸친 몽골의 침략으로 경주 황룡사구층목탑과 대구 부인사 대장경판을 비롯한 수많은 성보와 사찰이 소실됐다. 이때에도 국가차원에서 교장도감, 대장도감을 두어 대장경을 판각했고, 일반 사찰의 재건과 크고 작은 불사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로 불사가 수월히 이뤄졌지만 조선시대는 전혀 달랐다. 숭유억불을 기치로 내건 조선은 국가차원에서 불교를 탄압했으며 지방 관리와 유생들도 노골적으로 훼불을 자행했다. 태종의 즉위와 함께 억불정책이 본격적으로 시행됐고, 불교의 사회적 입지와 경제적 기반이 크게 약화돼갔다. 쇠락하고 폐사가 되는 사찰들도 있었지만 스님들 원력과 신심 깊은 불자들의 정성으로 사찰이 보수되고 근근이 유지될 수 있었다.

불교가 새로운 시대 상황에 적응해나갈 무렵 한국 역사상 최대의 전란이라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들은 부산 동래를 기점으로 3곳으로 나눠 서울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찰들이 불타고 폐사가 됐다. 현재 남아있는 대승사, 송광사, 직지사, 화엄사, 불국사, 선암사, 금산사, 통도사, 봉정사, 전등사, 유점사, 만덕사, 정수사, 건봉사, 은적사, 대흥사 등 사찰 사적기에 ‘임진·정유왜란 때 다 타버리고 이후 다시 세운 것’이라 기록돼 있을 정도로 왜군들은 전국 사찰을 초토화시켰다. 게다가 불상, 범종, 불화 등을 비롯한 수많은 성보들을 약탈해갔다. 임진왜란 이전 조성된 전각이나 불화, 불상 대부분이 국보와 보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것도 왜란의 참상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은 억불로 휘청거리던 불교계에 엄청난 시련이었다. 그러나 불교계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새롭게 거듭났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천년 세월동안 누려왔던 안온함에서 벗어나 서민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불교가 존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스님들은 천시 받고 잡역에 동원돼 온갖 수탈을 감당해야 했지만 백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법을 전하고 불사를 일으켜 불교를 재건해 나갔다. 억불시책이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황폐화된 불교계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는 불교의 쇠퇴기가 아니라 서민불교의 전성기였다. 현재 한국의 수많은 사찰들이 임진왜란 이후 새로 지어졌다.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중창불사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왕실과 사대부가 여인들의 돈독한 신심에 힘입은 것도 있지만 불교를 살리기 위한 수많은 계(契)가 만들어지면서 중창불사가 곳곳에서 이뤄질 수 있었다. 계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일정기간에 일정한 액수의 돈을 출자해 상호부조하거나 공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모임이다. 여기에는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이 모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인원도 열댓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현재 사찰에 남아있는 사적기, 중수기, 현판, 비문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조선후기 사찰계 자료가 264건이나 된다. 임진왜란 이후 본격화된 사찰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사찰 재정을 지원하고 중창불사를 이어갔다. 불교는 모진 탄압의 시대를 강인한 생명력과 지극한 신심으로 견뎌내며 불조의 혜명을 이어갔던 것이다.

조선시대 힘겹게 일구었던 가람들이 또다시 위기에 직면한 것은 1950년 6·25전쟁 때였다. 건봉사, 낙산사, 월정사, 신흥사, 명주사, 백담사, 송광사 등 수많은 사찰들이 불타고 폐허가 됐다. 스님과 불자들은 6·25전쟁으로 수행공간을 잃었으며, 몽골침략, 임진왜란에서도 보존되던 숱한 성보들이 멸실됐다.

전쟁이 끝나자 불교계는 중창과 재건불사에 들어갔다. 개신교와 가톨릭처럼 미국이나 로마 교황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도 못했고, 개신교 장로였던 대통령에게서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오직 불자들의 신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들이 화주에 나섰고 수많은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동참했다. 김부전(법련화), 김미희(불국생), 장봉옥(대보화), 하말분(도명화), 이순례(실상화), 최송설당과 같은 공덕주들이 등장해 불사를 위해 적극 뛰어들었다. 그렇게 한국불교는 스님과 불자들의 탄식과 눈물, 신심과 정성을 기반으로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불사는 끝날 수도 끝나서도 안 된다. 도량을 짓는 불사가 전법이며 불교의 재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교계에도 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사찰 내에 새로 전각을 짓는 일부터 도심포교당, 해외 한국사찰 건립불사까지 형태도 다양하다.

절을 짓고 도량을 정비하는 불사는 항상 찬탄 받아야 마땅하다. 다만 불사에 어떻게 부처님 가르침과 시대정신을 담아낼 것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불사를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필요할 뿐이다. 서울 구룡사 회주 정우 스님의 말처럼 “불사란 부처님 일이고, 부처님 일이란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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