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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일보] 삼국유사 기행<91>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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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0-12-08 16:19 조회3,3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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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거사의 화살을 맞은 학은 오대산 부처였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월정사의 대적광전 앞에 서 있는 국보 제48호 월정사8각9층석탑의 모습. 다각형을 이루고 있는 등의 형식으로 미뤄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지만 석탑지하에서 송대의 동전이 발견되면서 조선시대에 조성됐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월정사는 강원도 오대산 깊은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오대산의 오대, 즉 동서남북대와 중대를 오대라 하여 산 이름을 그렇게 부른다.

각 대마다 오만의 진신이 거처해 친견하고자 하는 이들이 찾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먼저 자장율사가 찾아왔고, 신효거사, 신라 신문왕의 아들, 신의두타, 유연 등의 성인들이 줄을 이어 찾아와 공부했다.

찾아오는 이들은 월정사뿐 아니라 상원사, 적멸보궁, 원통사, 금강사, 수정사, 백련사, 화엄사, 법륜사 등의 절을 지어 향불을 피워 오대산은 신라 불교의 꽃을 피우는 성지로 전한다.

월정사는 자장율사가 진신을 만나기 위해 거처하며 지었던 움막터에 신효거사가 절을 지으면서 지금까지 모습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의 월정사는 6.25전쟁 당시 불타고, 나중에 중건한 건물이다.

월정사 앞에는 팔각구층석탑이 높이 서 있고 그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앉아 있어 이채로운 풍경이다.

팔각구층석탑은 고려 초기에 만든 석탑으로 다양한 불교문화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 문화자산으로 국보 제4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삼국유사: 오대산 월정사의 다섯 성자

절에 전해오는 옛 기록을 살펴보면 자장법사가 처음 오대산에 와서 진신을 친견하고자 이 산기슭에 움집을 짓고 머물렀다.

7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서 묘범산으로 가서 정암사를 세웠다.

그 후에 신효거사란 사람이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의 화신이라고도 한다.

그의 집은 공주에 있었는데 어머니 봉양을 지극히 효성스럽게 했다.

어머니가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으므로 거사가 고기를 구하러 산과 들로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보고 활을 쏘았더니 그중 한 마리가 깃 하나를 떨어뜨리고 날아갔다.

거사가 그 깃을 주워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여서 고기를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렸다.

그 후에 그는 승려가 돼 그의 집을 희사해 절을 만들었으니 지금의 효가원이다.

거사가 경주 땅에서 하솔(지금의 강릉)로 가서 깃으로 사람들을 보니 모두 사람의 형상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곳에 머물러 살 마음이 생겨 길에서 나이 많은 아낙을 보고 어디가 살 만한 곳인가 물었다.

아낙이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그곳이 살 만한 곳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월정사 적멸보궁이 모습.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가 2018년 보물 제1995호로 승격됐다.


거사는 그말이 관음보살의 가르침임을 알고 곧 성오평을 지나 자장이 처음 움집을 지었던 곳에 머물렀더니 문득 다섯 명의 승려가 와서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 한 폭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거사가 어리둥절해 하자 승려가 “그대가 쥐고서 사람을 보는 깃이 바로 가사이다”고 했다.

거사가 즉시 내어 주자 승려는 그 깃을 가사의 폭이 찢어진 곳에 가져다 대었는데 꼭 맞았다.

그것은 깃이 아니라 바로 베였다.

거사는 다섯 명의 승려와 작별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이 성자들의 화신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는 자장법사가 처음으로 움집을 지었으며, 그 다음에 신효거사가 와서 머물렀고, 그다음에는 범일의 제자인 신의두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머물렀다.

후에 수다사의 법력이 높은 승려 유연이 와서 살면서 점차 큰절이 됐다.

절의 다섯 성자와 9층석탑은 모두 성스러운 유적이다.

풍수가 “나라 안의 이름난 산 가운데 이곳이 가장 좋으니 불교가 길이 번창할 곳이다”고 말했다.

적멸보궁 바로 뒤편에 1m 높이의 사리 묻힘 표시비석의 모습. 표면에 탑의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월정사

월정사는 다섯 봉우리가 연꽃무늬를 만든다는 오대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하늘로 곧게 뻗은 전나무 숲이 원시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전나무 숲길은 일주문에서부터 1㎞나 이어져 장관을 이룬다.

함께 자리했던 소나무들이 그 아름다운 기세에 눌려 자리를 피했다는 이야기가 단순한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부처님을 호위하듯 우거진 전나무 숲의 터널을 지나고,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누각을 차례로 통과하면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천년 고찰 월정사가 나타난다.

전쟁으로 불타버린 원래의 사찰터에 새로이 다듬은 절이 험한 산세 아래 엎드려 있다.

건물은 모두 6.25 전쟁 이후 재건된 것이지만 오대산의 푸른 기운을 한 곳으로 모으는 듯한 사찰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은 품위와 기개가 느껴진다.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이어간 조선의 임금 세조는 하늘의 벌을 두려워 해 불교에 귀의하고 월정사를 수시로 찾아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했다.

상원사의 동종의 모습. 현존하는 한국의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종으로 통일신라 성덕왕 24년, 724년에 만들어졌으며 국보 제3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팔각의 2층 기단 위로 세운 9층석탑 앞에는 바닥에 꿇어앉아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석조보살좌상이 있다.

보물 139호로 지정됐다가, 2017년 국보 제48-2호로 승격됐다.

익숙하지 않은 이형탑보다 꿇어앉은 석조보살상에 더욱 시선이 끌린다.

상원사로 가는 길고 깊은 길은 더 높은 경지의 깨달음을 향하는 비밀의 통로인 듯 끝없이 가물가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옛 성인들이 걸었던 길이라 하여 ‘선재길’로 이름을 붙여 삼삼오오 찾는 발걸음이 줄을 잇는다.

선재길 물소리를 염불 삼아 걷다보면 저절로 세상사를 잊게 된다.

옛 성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걸었던 오대산자락의 숲과 개울을 따라 이어지는 길인 선재길의 모습. 성인들이 걸었던 길을 걷기 위해 방문하는 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월정사의 성인

신라 선덕여왕 때 서라벌에 효자가 있었다.

어머니를 신처럼 떠받들어 사람들이 신효(神孝)라 불렀다.

신효는 어머니가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어 매일 사냥하는 것이 일이었다.

어느덧 사냥에 솜씨가 늘어 신효의 시위를 떠난 화살은 백발백중이었다.

하루는 노루를 보고 시위를 당겼는데 화살을 맞은 노루가 쓰러지지 않고 계속 달아나 신효는 턱에 숨이 차도록 따라갔다.

나중에는 지쳐 노루가 흘린 핏자국을 따라 쫓아갔다.

몇 구비를 돌아 가시나무 숲속에 엎드린 노루를 발견했다.

그런데 신효는 화살을 맞은 노루가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것을 보고, 노루의 몸에서 화살을 뽑아내고 부드러운 속옷으로 상처를 감싸주고 돌아왔다.

선재길이 개울을 따라 오솔길로 길게 이어진 모습. 개울을 건너는 섶다리가 태풍에 붕괴되어 복구되지 않고 있다.


그날부터 신효는 활과 화살을 모두 불에 태워버리고 사냥을 그만뒀다.

어머니를 위해 자신의 다리살을 베어 드렸다.

그 다음날부터 신효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면 어김없이 매일 고기가 한 접시씩 놓여 있었다.

화살 맞은 노루가 넘던 고개를 노루목이라 부른다.

신기하게 생각한 신효가 하루는 잠을 자지 않고 문틈으로 밖을 지켜보고 있었다.

새벽이 될 무렵 목에 흰 천을 두른 사슴이 새끼들을 데리고 와서 고기를 토해놓고 가는 모습을 보았다.

이때부터 신효는 불법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경전을 펼치면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들었다.

신효는 어머니가 죽자 집을 팔아 절을 지었다.

신효는 7일 밤낮을 먹지 않고 기도했다.

잠깐 조는데 꿈에 흰 천을 목에 두른 노루가 나타나 강릉으로 가면 전나무가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 있으니 거기에 절을 짓고 불법을 공부하면 부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월정사 한켠에 신라시대 절의 행사를 높은 깃발로 알렸던 당간지주의 모습. 탑의 옥개석이 제모습을 찾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다.


잠에서 깨어난 신효는 벌떡 일어나 그길로 강릉쪽으로 걸어 전나무숲을 찾기 시작했다.

오대산 초입에 들어서니 굴뚝새가 인사를 꼬박하더니 날지도 않고 총총 뛰면서 길을 안내했다.

물길을 따라 오대산 깊숙이 들어오니 전나무들이 줄을 지어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전나무로 절을 짓고 땅에서 솟아오르는 샘물로 공양을 했다.

신효는 오대산에 들어온 날부터 매일 아침 동이 트는 방향의 산 정상 부위에 나타나는 부처를 향해 샘물을 길어 공양했다.

7년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샘물 공양을 하던 신효는 공양하는 모습 그대로 굳어 돌이 됐다.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을 세워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두 손으로 샘물을 떠받들어 받치는 모습이다.

천상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후세에 사람들이 부처가 된 신효가 공양하는 앞에 진신사리를 안치한 탑을 세웠다.

이곳이 월정사이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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