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인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시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인류의 삶과 정신에 마치 유전자처럼 깃들어 있는 것이 종교다.그런 만큼 종교는 삶과 죽음,존재의 의미를 해석하는 개인적 차원은 물론 공동체의 연대감이나 도덕적·윤리적 가르침을 제공하는 사회적 차원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런데 화성에 우주왕복선을 쏘아 올리고,AI가 상용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종교의 영향력은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그만큼 인류는 극심한 좌절과 불안 속에서 산다는 방증이다.코로나19는 거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다.일찍이 현대사회처럼 종교의 사회 윤리와 역할이 절실한 때도 없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종교를 정치와 연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렵지만,아무래도 정치인들이 종교적 차원에서 개인적 수도에 더 힘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물론,현대사회에서 고전적인 성인 정치(聖人政治)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우주관·인생관의 핵심이 되어야 할,우주 생성 이전의 ‘본래 자리’를 보지 않고 행하는 정치는 ‘껍데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가에서는 도(道)란 배워서 알고 생각해서 얻는 학문의 경지와는 다른,부정(否定)을 거친 긍정(肯定)의 본체로 본다.씨앗을 뿌려 거둔 콩이 씨앗 때의 콩과 본질은 같지만,긍정-부정-긍정이라는 과정을 거친 존재인 것이다.다시 말하면, 씨앗이라는 형질을 부정함으로써 새싹으로 새로 태어나고,그 새싹이 자라 콩을 맺음으로써 다시 콩이라는 본질을 긍정하는 것이다.인간의 득도도 부정이라는 고통스러운 수도과정을 통해 무아(無我),무물(無物)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주관과 객관이 끊어진 자리에서 만나는 ‘공(空)’은 진리이며 순수이성이다.
이 같은 도가 생활화될 때 인간세계는 시공이 끊어진 ‘극락’이 된다.모든 정치나 교육이나 문화는 도에 합치되는,마음을 텅 비운 자리에서 추진해야 올바른 가치를 지닐 수 있다.물에 빠진 사람이 같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는 것처럼 ‘자리(自利)’도 못하는 사람이 ‘이타행(利他行)’에 나서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거의 모두 종교인이다.청와대,국회,사법부,행정부 내에도 각종 종교 모임이 있다.이들이 ‘무늬만 종교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주의 본질을 깨치려는 개인적 수도가 우선해야 한다.
갑자기 종교와 정치의 문제를 꺼내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과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다.4차산업혁명 시대에는 더 커지고 있다.줄기세포와 무인 자동차 개발 등 첨단기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종교와 윤리다.인간이 ‘창조’라는 신의 영역을 침범해도 되는가?무인 자동차가 절체절명의 순간 탑승자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보행자의 안전을 무시해도 되는가?인간의 발전을 위해 어느 선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어떤 선택이든 모두 종교와 정치가 상충하는 영역이다.서구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두 문제를 두고 고민 중이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덮쳤다.지난 10개월 동안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는 5100만여 명에 이른다.우리나라 국민 전체를 합한 어마어마한 숫자다.사망자는 120만 명을 넘어섰다.선진국임을 자임하는 서구 국가들조차 속수무책이다.
코로나19 이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코로나19 이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으리라는 점이다.인류는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이미 우리는 일상 전반에서 대변화를 겪고 있다.거기에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시스템까지 변화할 조짐이다.
그래서 종교와 정치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다.어떤 대안을 마련할 것인가?삶의 방식은 어떻게 재구성해야 하는가?모두 존재의 방식에 관한 질문이고,최후의 결정은 정치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