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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오대산 월정사 (불광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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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26-08-04 12:16 조회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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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문화이야기] 오대산 월정사
  •  노승대
  •  승인 2026.08.04 09:39

지난 6월, 평창 지역으로 문화기행을 다녀왔다. 기후 변화로 이제는 6월도 한여름이니 작년에 태백을 다녀왔듯이 해발 고도가 높은 곳을 찾아간 것이다.

우선 대관령(832m)의 목장을 찾아갔다. 대관령 일대에는 세 곳의 목장이 있다. 라면을 생산하는 삼양식품이 라면에 들어갈 우수한 소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1972년에 설립한 삼양목장은 규모가 600만 평이다.

양떼 목장은 애초부터 체험 관광형으로 1988년에 개발되었기 때문에 가장 접근성이 좋다. 목장 외곽을 도는 산책로도 있고 먹이주기 체험장도 있다.

해발 1,140m의 동해 전망대로 올라가려면 셔틀버스를 타야 한다. 내려오는 길에는 여러 개의 산책코스가 있어 취향에 따라 산책할 수 있다. 한일시멘트 그룹의 한일산업이 1974년에 개발을 시작한 하늘목장은 300만 평으로 트랙터 마차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간다.

선자령이 가깝게 보이고 풍력발전기가 있어 고원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적당한 곳에 내려 야생화를 감상하며 숲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올 수 있다.

양떼목장은 애초부터 체험관광형으로 1988년에 개발되었기 때문에 가장 접근성이 좋다. (구)강릉고속도로 대관령휴게소에서 뒷길로 들어서면 바로 양떼목장 입구여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우리 바라밀문화기행 팀도 이 양떼목장을 간단히 둘러보았다.

건초를 받아먹는 양떼들. 양은 생풀도 먹어야 하지만 건초를 먹어야 장 건강도 좋고 저절로 자라나는 치아를 적당하게 갈아주게 된다. 오래 씹으세요.

오대산 월정사 성보박물관에도 들렸다. 국보 2건과 보물 5건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으며 월정사의 역사와 고승들에 대해서도 잘 정리되어 있는 박물관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유물이 로비에 전시되어 있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국보) 상륜부와 역시 석탑 앞에 있었던 석조보살좌상(국보), <상원사 중창권선문>(국보)이다.

문화유산의 보존을 위해 박물관 안으로 옮겨놓은 귀중한 유물이다.

로비에 있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상륜부 금속장식물. 고려시대는 금속공예가 뛰어났다. 때려서 무늬를 내는 타출(打出)기법과 조식(調飾)기법을 썼다.
한쪽 무릎을 꿇고 불탑에 무언가를 공양하는 모습의 석조보살상. 강릉 신복사지 보살상과 한산사지 출토품도 같은 양식이라 강원도 양식이라 부른다.

오대산의 사찰들은 한국전쟁 때 모두 소각되었다. 월정사 비롯해 다섯 군데 오대(五臺)에 있었던 절들도 국군에 의해 소각되었는데 유일하게 타지 않은 절이 상원사다.

많이 알려져 있듯이 상원사는 방한암(1876~1951)스님이 법당에 앉아 군인들에게 말했다.

“군인은 군인의 본분으로 명령에 복종해야 하고 나는 승려의 본분으로 절을 지켜야 하니 법당을 나설 수 없소. 그러니 어서 불을 지르시오. 나는 어차피 죽으면 다비(화장)을 할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소.”

군인들은 차마 불을 놓을 수 없어 법당 문짝만 떼어다 마당에서 태우고 물러갔다. 그런 연유로 상원사에 있는 문화유산들은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다.

후일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에서 나온 복장유물 25종 일괄은 보물로 따로 지정됐다. 복장 유물들도 다 성보박물관에 있다.

성보박물관 옆에 있는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도 들렸다.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일반인이 조선왕조실록 실물을 볼 수 있는 곳이 없다.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행사를 정리해 놓은 의궤(儀軌)를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은 교정본이라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교정해 놓은 표시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총 1893권 888책이다.

원래 조선왕조실록은 4부를 만들어 한양의 춘추관과 전주, 성주, 충주의 관청 옆에 사고(史庫)를 짓고 보관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다 타버리고 전주본만 겨우 살아남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주본을 가져와 4부를 더 만들어 산중 깊은 곳에 두기로 했다. 총 5부가 된 것이다. 물론 산중의 사고를 지키는 임무는 스님들에게 떨어졌다.

그래서 한양의 춘추관과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강화도 마니산(후일 정족산 전등사 경내로 옮겼다) 사고가 생겼다. 처음 활자로 찍은 후 교정을 본 교정본은 오대산 사고로 보내졌다.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한양의 조선왕조실록은 타버렸고 그 이전에 여진족의 청나라가 위협요인이 되자 묘향산에 있던 조선왕조실록은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 놓았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자 조선총독부는 산 속 사고에 있던 4부의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로 옮겼다. 그 중에서 오대산본은 임의로 동경제국대학으로 보냈는데 관동대지진으로 타고 일부만 남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부산으로 무사히 실어보냈다. 창경원에 있던 적상산본도 기차에 실어 보냈는데 중간에서 사라졌다 . 전쟁의 와중에 없어진줄 알았는데 실상은 인민군이 기차를 통째로 노획해 북한으로 보냈던 것이다.

1866년 헌종이 부친인 효명세자에게 익종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거행한 의례절차를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술해 놓은 의궤다. 태백산 사고에 있었다.<br>
1866년 헌종이 부친인 효명세자에게 익종이라는 존호를 올리면서 거행한 의례절차를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술해 놓은 의궤다. 태백산 사고에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번역본은 1980년 대에 북한에서 먼저 발간했고, 이에 자극 받아 남한에서도 부랴부랴 서둘러 1993년에 완역본이 나오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일본에 남아있는 오대산본 환수를 위해 월정사측에서 부단히 노력하였고 결국 오대산본 48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월정사 경내에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을 짓고 오대산본 실물과 다른 사고에 있었던 의궤도 전시하게 되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는 9km의 비포장길이다. 원래 이 길은 월정사, 상원사, 두로령을 거쳐 홍천군 명개리로 넘어가는 ‘지방도 446호’였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이 길을 포장하고 싶어했지만 월정사는 이를 번번히 거절했다.

일주문에서 월정사로 들어가는 전나무 숲길 초입에는 성황각이 있다. 절 구역을 지키는 토지신을 모신 곳으로 민간신앙을 절집에서 포용한 흔적이다.

필자가 이 길을 처음 들어선 해가 1978년이었는데 그 때도 비포장이었다. 월정사는 도로 포장의 유혹을 뿌리치고 이 숲길을 지켜왔다. 빨리 가는 것 보다 천천히 가는 길, 모두가 바쁜 우리들에게 필요한 숲길을 선택한 것이다.

더구나 월정사에서는 일주문에서 월정사로 들어가는 전나무 숲길 포장도로도 걷어내고 흙길로 바꾸었다. 최종적으로 2009년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방도 446호 폐지공고’를 냈다. 큰절 가는 길 대다수에 포장도로가 들어섰으니 천년의 숲길을 지켜온 월정사가 고맙고 감사하다.

월정사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 풍경. 물론 석탑 상륜부의 금속장식물과 석조보살좌상은 근래에 다시 만든 재현품이다. 금속장식물은 벼락이 최고 위험요소다.

이제는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가는 걷기 전용 선재길도 뚫렸지만 그 길을 걷지 못하고 차량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상원사에서 적멸보궁까지는 걸어가야만 한다. 거리는 1.6km, 왕복 3.2km다. 멀지 않은 길이지만 계속 오르막길인데다가 계단도 많아 쉽지만은 않은 길이다.

세조가 옷을 걸었다는 관대거리. 계곡에서 지나가는 동자에게 몸을 밀게 했다. “임금님 몸을 씻었다고 말하지 말라”하자 “문수보살 친견했다고 말하지 마세요”라는 답변이 왔다.
고양이인가, 사자인가? 상원사에는 고양이가 세조를 구한 전설이 있다. 또 신라시대에는 계단 소맷돌 양쪽 아래에 사자를 세우기도 했다. 진실은 어느쪽일까?
고양이 석상 옆에는 돌로 만든 깃대꽂이가 있다. 세조가 상원사에 왔을 때 임금의 상징인 어룡기(御龍旗)를 꽂았던 유물로 보기도 한다.
상원사 문수전. 쌍상투 동자 모습의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은 세조 12년(1466)에 조성한 것이고 목조문수보살좌상(보물)은 1661년 조성이다.
문수전 오른쪽에 있는 목조제석천왕상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복장에서 1645년에 쓴 조성발원문이 있어 이 무렵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신라시대 범종은 3구가 남아 있는데 상원사 동종은 성덕대왕 신종과 함께 신라의 대표적 범종이다. 725년에 주조되어 1469년 안동에서 옮겨왔다.

그렇지만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우리나라 최초의 적멸보궁으로 오랜 명성을 이어왔고 그 명성에 걸맞는 명당에 있으니 안 올라 갈수는 없다. 이제 왔다 가면 언제 다시 오겠는가?

흔히 5대 적멸보궁이라 부르지만 이 명칭은 1960년대 기자들이 다섯 곳의 불교성지를 묶어 부르면서 정착된 것이고, 그 이전의 적멸보궁이라 하면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 한 곳 뿐이었다.

사자암을 거쳐 적멸보궁으로 가는 계단길. 염불소리가 간간히 설치된 돌 장식물에서 흘러나온다. 돌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무슨 의미일까? 바로 유가심인도(瑜伽心印圖)다. 연꽃 좌대 위에서 부처가 선정에 든 모습을 수행의 다섯 단계로 형상화한 문양이다. 비슬산 대견사 바위에 새겨진 문양.

오대산 적멸보궁을 올라가 본 사람이면 이 곳이 왜 명당인지 저절로 알게 된다.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1565m)에서 내려 온 지맥이 산들의 중심부에 둥글게 솟아올랐고 이곳을 중심으로 동대산, 두로봉, 상왕봉, 비로봉, 호령봉이 빙 둘러섰다. 마치 연꽃의 가운데 심방 자리에 든 느낌이다.

또한 중대(中臺) 적멸보궁 아래에는 사자암이 있고 동대(東臺)에는 관음암, 서대 염불암, 남대 지장암, 북대 미륵암이 있어 모두 합해 오대(五臺)가 되니 산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드디어 적멸보궁이다. 현판을 보니 경인년에 9살 홍명기가 썼다고 한다. 정시한 선생이 1687년에 올라와 이 현판을 봤다고 했으니 1650년에 썼다.
적멸보궁 뒷쪽의 풍경. 앞에 조그만 비석이 있고 탑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라는 상징. 탑 뒷면에는 유가심인도가 새겨져 있다.

신라의 자장율사(590~658)가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여 문수보살을 친견했고 귀국하여서는 평창 오대산을 문수보살의 성지로 정착시켰으니 이미 1,400여 년 동안 불교의 기도성지로 내려온 셈이다.


불광미디어/노승대

출처 : https://www.bulkw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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