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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다큐멘터리 권혜경 (뉴스메이커)201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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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정사 지킴이 작성일12-07-31 09:21 조회11,5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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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다큐멘터리 권혜경
자신의 노랫말을 따라간 ‘산장의 여인’의 가수 권혜경
2012년 07월 30일 (월) 11:50:35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그 후 4년간의 이야기
사랑은 한갓되이 풀잎만으로 맺었지만
삶은 스스로 두 번 엮다

이름 앞에 늘 ‘산장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가수 권혜경(1931~2008) 여사가 타계한 지 4년.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충북 청주 일원에서는 현재 추모 열기가 한창이다.
두 차례에 걸친 추모콘서트에 이어 문의관광단지 입구에 세워질 ‘권혜경 노래비’와 함께
‘제2의 권혜경’을 발굴하기 위한 ‘권혜경가요제’ 또한 두 차례 열렸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한 여인의 삶과 운명을 함께 한 이 노래처럼
만년에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곳. 그러나 그 ‘산장’엔 현재 다른 이가 살고 있다.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 ‘산장’에는 대체 어떤 일이 그동안 있었던 것일까.
내가 만난 권혜경, 그리고 타계 후 4년간의 이야기

글·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l 사진·최광호, 박성서

1

   
 
이 무렵인 지난 2007년, 원로가수들 사이에서 한동안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월정사로 향하는 1박2일의 원로가수 모임에서도, ‘가요사랑 뿌리회’ 모임에서도 그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데 바로 권혜경 여사가 타계했다는 거였다. 심지어 방송뉴스에서 직접 들었다는 원로도 있었다. 후에 함께 권혜경여사를 함께 찾았던 후배가수 안정애 여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애써 부인했고 나 역시 불과 얼마 전 금사향, 원희옥 두 분께 직접 전화를 연결해준 적도 있다고 해보았지만 소문은 쉬 가라앉지 않는 듯 했다.
이 무렵 서강대 영상대학원 김학순 교수로부터 권혜경씨의 삶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먼저 권혜경 여사의 의중을 물어봐야 할 텐데 며칠 째 집에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혼자 사는 집에 전화를 받지 않으니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싶었다. 집 부근 관할 남이지서에 전화해 먼저 근황이라도 알아봐 달라 부탁하려다가 문득 냉장고에 붙어 있던 메모가 생각났다. 사진으로 찍어둔 ‘비상용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손성미 02)907-xxxx, 019-xxx-0xxx’
전화 주인공인 조카는 처음에는 별일 없으시다고 했다가 며칠 째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하자 알아보겠노라고 한 후 병원에 입원 중이시라는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간병인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현재 곁에서 병간호를 해주는 분이라 했다. 다음 날 청주병원으로 향했다. 청주는 권여사의 어머니, ‘고령 신씨’의 고향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언제나 ‘당당하던’ 권혜경 여사, 예상대로 병원에서 ‘깡패’로 불리고 있었다. 이 병실 저 병실을 쉴 새 없이 다니고 그가 유명가수인 것을 알아챈 이들에게 둘러싸여 수시로 노래도 불러준다.
일이 이렇다보니 병원 측이나 입원환자들로부터 너무 시끄럽다고 주의를 한두 번 받은 게 아니다. 오죽하면 ‘깡패’라고 할까, 싶었다. 그래도 막무가내다. 권혜경 여사가 누구인가, 스스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며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만을 해온 ‘천하의 권혜경’ 아니던가. 아직도 이곳을 위문공연 온 무대 쯤으로 여기고 있는 걸까, 이따금씩 주여사에게 이렇게 다그친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중간 중간 가사를 잊어버려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노래처럼, 기억도 듬성듬성 끊어진 듯했다. 치매, 말하는 그 때밖에 모른다는 게 병원 측의 귀띔이다. 우리가 있는 동안에도 몇 차례나 ‘엄마는 어디 갔느냐?’고 수시로 물었다. ‘이미 돌아가신 게 언젠데 또 물어보느냐’는 주00여사의 핀잔에 되레 ‘왜 그런 걸 이제서 알려주느냐’, 며 또 호통이다. 그때마다 울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덤’이라 여겼기에 남을 위해 살아온 인생, 남에게 다 주고 나니 이제서야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 것인가, 싶어 코끝이 찡했다. 아마도 그 삶은 ‘어머니께 죄짓기’ 이전의 유년시절로 돌아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병실에 너무 오래 있는 것도 다른 환자들에게 좋지 않을 것 같아 일어서려는데 간병인 주00여사가 급히 집에 가서 가지고 올 물건이 있다며 따라 나섰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엔 다소 불편한 곳인지라 비좁은 차였지만 이 참에 함께 다녀오기로 했다.
권혜경 여사가 다들 어디 가느냐, 물었다. ‘손님들이 간다기에 저녁 대접하고 오겠다’고 주여사가 급히 둘러대자 “오케이, 그래야지” 하며 손뼉을 쳤다. 기분 좋을 때마다 늘 하는 버릇이다. 집은 텅 빈 채 서서히 어둠에 싸여가고 있었다. 이미 다른 이의 명의로 주인이 바뀌었다는 집. 그동안의 생활비와 병원비를 감당하기에 겨워서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갔다는 집은 새로 말끔히 수리되어 있었다. 뜰에 있던 구덩이도 어느새 메워져 있었다.후에, 이곳엔 살아있는 동안까지만 거주할 수 있도록 새 집주인이 양해해주었다고 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뜰, 한가운데 서니 틈틈이 팠다던 그 잡초 무성했던 구덩이가 떠올랐다. 이곳에 보란 듯이 ‘산장의 여인’ 노래비를 세우겠다던, 당당했던 모습 또한...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 한 가수의, 한 여인의 운명과 함께 해온 이 노래. 그러나 누군가 와주기를 기다릴 그 ‘산장의 여인’ 조차 이제는, 이 산장에 없을 것이다.

2

   
 
그렇듯 우리 일행은 ‘간병인’으로부터 놀라운 사실을 전해 들었다. 이 간병인은 집에서 꽤 떨어진 한 교회의 집사로, 봉사를 자청한 분이라 했다. 그동안 ‘생활비와 병원비 등을 감당치 못해’ 집이 결국 남의 손에 넘어갔고 또한 1년 전 쯤에는 마을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 측으로부터 ‘6개월 밖에 못산다.’는 시한부 통보를 받기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상태가 호전되어 이후 퇴원, 한동안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는 말도 함께... 그날, 간병인과 함께 찾아간 집은 어느새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뜰에 있던 구덩이는 메워져 있었고 한쪽엔 뭔가를 태운 잿더미도 보였다. 냉장고에 붙은 비상메모 또한 간병인 이름과 전화번호로 바뀌어져 있었다. 권혜경 선생이 퇴원한 뒤 어떻게 모시겠다는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간병인인 주OO집사는, “만일 퇴원을 하신다면, 흔히 말하는 속칭, ‘시설’로 모실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던 그녀가 몇 차례 방문 이후 말을 바꿨다. “이 집에는 살아있는 동안까지만 거주할 수 있도록 새 집주인이 양해해주었다.”고 했다. 이러한 배려를 해준 새 집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했다.몇 차례 간병인에게 물었지만 끝내 누구인지 명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권혜경 여사의 집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새 집주인 명의로 도착된 우편물 한 통을 발견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보낸 우편물로 소재지는 대전이었다. 일단 소유주 이름을 알게 된 셈이다. 이 이름과 함께 후에 더 알게 된 것은 이 새 집주인이 봉사활동을 자청한 간병인이 집사로 있는 교회의 목사 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왜 이것을 진작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청주를 오가며 간병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궁금한 것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변한 주위 상황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일차적인 의문조차 풀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간병인이 처음 권혜경 여사를 어떻게 알고 간병을 자청했는지, 그 시기가 언제부터였는지, 생활비와 병원비가 어느 정도였기에 집까지 넘겨야 했는지, 새로운 집주인은 얼마에 어떤 방법으로 이 집을 사들인 것인지, 그렇다면 그동안의 메모라도 적어둔 것이 있는지... 등.혹 관련자료가 있다면 보고 싶다고 했다.
일주일 뒤 쯤 간병인으로부터 노트 한 권 분량의 메모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간병인은 권혜경 여사로부터 직접 받은 거라며 여러 장의 자필 메모도 함께 보여주었다. 내용은 제각각 조금씩 달랐지만 ‘내가 죽으면 내 모든 걸 주OO(간병인)이 알아서 하도록 한다’, -이러한 종류의 메모들이었다. 그럴수록 의문이 수시로 의구심으로 바뀌기도 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권혜경 여사가 이렇게 되기까지 어렵게 살아왔을 그 간의 과정을 지금까지 알고 있는 사실 그대로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그 무렵 대한가수협회(회장 남진) 측이 내게 의뢰하고 있던 회보, ‘The Singers’ 창간호를 통해서였다. 일부 제기될 비난은 감수하기로 했다. ‘치매’임을 밝힐 수밖에 없는 때가 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외부에 드러나지 않게 될 수 있으면 지켜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권혜경 여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절실했다. 먼저 기사를 통해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 우선 불우한 원로들의 생계문제를 포함한 복지문제, 그리고 홀로 사는 독거노인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 등... 실상을 알림으로써 책임 있는 단체가 적극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그리고 권혜경 여사의 집을 둘러싼 복잡한 과정은 차치해 두고라도 가능한 한 가수들의 대표권익단체인 대한가수협회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을 이 ‘산장’을 다시 권혜경 여사에게 돌려주는 방안을 모색해달라는 것. 대한가수협회의 김원찬 사무총장과 이 문제를 협의했다. 사진이 너무 그로테스크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됐지만 권혜경 선생의 현실을 알고 나면 프레임이 이해될 거라고 설득했다.
   
 
몇 차례 조율 끝에 결국 이 기사는 지난 2008영, 대한가수협회보 ‘The Singers’ 창간호에 실렸다. ‘The Singers’ 지면을 통해 권혜경 여사의 이러한 사정이 가요계에 전해지는 것과 때를 같이해 동료, 후배 가수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청주에 있는 대한가수협회 충북지회가 누구보다 관심을 갖고 집을 방문했으며 대한가수협회 이사이자 후배가수 인순이는 자선공연을 펼쳐 수익금 모두를 권혜경 여사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또한 가수 정훈희와 이수미는 원로가수 금사향과, 그리고 최백호는 선배가수 한명숙과 함께 공연을 펼쳐 이 모든 수익금을 함께 무대에 선 원로 선배에게 건네는 훈훈한 미담도 이어졌다.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회장 백순진) 역시 원로가수들을 위한 ‘아름다운 콘서트’를 펼쳤다. 이들 공연 현장에서 내가 피부로 느끼는 감동은 남달랐다.
채록 작업은 계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권혜경 여사는 중환자실로 옮겼다. 연락을 받고 급히 문병 길에 나서기로 했던 사진작가 최광호와 필자는 결국 출발 직전, 별세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2008년 5월 25일이었다.

문병을 가려다 문상을 가게 된 우리는 청주로 향하면서 연합통신을 비롯해 가요계, 유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내가 유족들에게 연락하겠다고 말하자 간병인인 주OO 집사는 전화로 난색을 표했다. ‘그들은 이곳에 올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격한 감정으로 몰아세우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권혜경 별세 뉴스’는 인터넷 검색 1위에 올라있었다. 이로부터 3일 간 나는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을 맞았다.
화환이 속속 도착했다. 가수 조용필의 화환도 보였다. 조용필, 고인도 생전에 조용필이 ‘산장의 여인’을 즐겨 부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다음날 일간스포츠에 이러한 기사도 실렸다. 그 기사 중 일부다.

‘노랫말 따라 ‘산장의 여인’ 되어 떠난 권혜경’
슬픈 노래를 부르는 가수는 자신의 삶을 노랫말에 내어 주는 것일까. 자신의 노래대로 ‘산장의 여인’이 되어 살던 가수 권혜경이 지병 악화로 숨을 거뒀다.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 있었다. 권혜경이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을 24일 밤, 국민가수 조용필은 서울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데뷔 40주년 기념 공연을 치르고 있었다. 이날 5만 관객과 ‘노래방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던 조용필은 “내 애창곡”이라며 ‘산장의 여인’을 부르기 시작했다. 중, 장년 관객들도 나지막히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다음날, 권혜경이 숨을 거뒀다.
조용필로서는 아무런 교감 없이 대선배의 가는 길에 조가(弔歌)를 부른 셈이 됐다. 조용필 측근은 “안 그래도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평소 친분은 전혀 없었지만 듣자마자 조화를 보내 예의를 표했다”고 말했다. 이 측근은 “평소 조용필이 사석에서 마이크를 잡으면 십중팔구는 이 노래를 불렀지만 무대에서 쉽게 부를 노래는 아니었다. 본인도 부음을 듣고 ‘참 묘한 일’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하 생략, 송은섭 기자 
 
권혜경 타계, ‘산장’도 ‘산장의 여인’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다

   
 
장례 기간 동안 유족들을 비롯한 지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특히 권혜경의 유일한 생존혈육인 둘째언니 권오택씨(당시 88세)와 그의 아들 건축가 원유택씨(당시 63세)도 만날 수 있었다. 둘째언니 권오택씨는 가수활동을 반대하는 부모 대신 보호자처럼 데뷔 때부터 한 집에 살며 돌봐주었던 인물이다. 또한 그의 둘째아들 원유택씨는 가까운 대전에 살고 있는 건축가로 이 집을 직접 지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 자리에서 권혜경 여사가 6.25 당시 피난시절을 이곳, 청원에서 보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특히 조카 원유택씨는 이 집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은 만큼 애정이 남달랐다.
그 역시 명의가 갑자기 제3자로 바뀐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의문점을 지적했다. 이 과정에서 집 앞쪽의 임야 중 3분의 2마저도 그들의 명의로 이미 바뀌어져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조카 원유택씨는 무엇보다 인감을 자신이 대신 보관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며 분개했다. 그리고 강력하게 집만큼은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기념관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집 뒤뜰에 수목장을 강행했다. 처음에는 집 앞에 있는 권혜경 소유의 야산, 비록 3분의 1만 남았다지만 그곳에서 수목장을 치르고자 했었다. 그런데 쉽게 믿지기 않은 상황이 발인 바로 전날 밤 우리에게 일어났다. ‘수목장 자연장지 조성에 대한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는 뉴스가 노트북 화면에 뜬 것이다. 국회에서 통과된 ‘수목장 자연장지 조성에 대한 법률’은 쉽게 말하면 이전까지는 관계부처에서 정해진 장소에만 수목장을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신고만 하면 어느 장소에라도 수목장이 기능하도록 법이 바뀐 것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날이 공교롭게도 권혜경 여사가 타계한 날이었다. 때문에 유족들은 서둘러 수목장 장소를 집의 ‘뒤뜰‘로 바꿨다. 집 조경에 어울릴만한 나무를 다시 구하느라 발인시각을 두 시간 늦추면서까지. 집 뒤뜰에서 거행된 수목장 장례식에서 유족인 친지와 지인들이 차례차례 인사를 건네며, 고인을 보냈다.
마지막은 내 차례였다. 나는 이 모든 과정에서 실질적으로는 아무 관계가 없었음에도 누구보다 간절히 명복을 빌었다. ‘사랑마저 물리쳐’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이 산장에서 살다간, 가련한 여인... 평생 ‘산장의 여인’이 되어 그 운명을 껴안고 살았던 삶이 그러했듯 죽어서도 영원히 ‘산장의 여인’이 되어달라고... 그리고 당신의 영혼이 계속 여기에 남아 당신이 목숨만큼 소중히 여겼던 이 ‘산장’을 꼭 지켜달라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났다. 그동안 촬영한 ‘권혜경 다큐멘터리’ 작업도 이제 마무리 편집에 한창이다. 우리는 마지막 ‘신(Scene)’으로 ‘제2의 권혜경’을 발굴하기 위한 권혜경 가요제 개막식에서 풍선이 하늘을 향해 오르는 장면과 함께 수목장 나무에서 새 순이 돋는 장면을 렌즈에 담아내고 싶어 했다.
‘산장의 여인’ 끝부분,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의 가사처럼 그 ‘재생(再生)’을 형상화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낭패였다. 우리가 몇 년 만에 다시 찾은 집은 또 다른 이가 이미 이사와 살고 있었다. 집은 외형부터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대문의 위치도 바뀌었다. 이미 흙으로 덮어버렸던, 구덩이가 있던 뜰은 모두 깎여져 주차장으로 변했다. 이곳부터 현관까지 돌 계단이 만들어져 집으로 들어가려면 이 돌계단을 거쳐 올라가야 했다. 이 돌계단을 오르면서 순간, 난 우습게도 ‘정말 산장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수목장 또한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집을 사서 새로 이사 온 주인은 수목장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했다. 누구로부터도 이곳에 수목장이 되어있다는 사실을 듣지 못했고 더구나 이 집이 그 유명한 권혜경 여사 집이었다는 사실은 집수리하다가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1층 거실을 장식했던 가구와 기타 등 단 몇 개만이 지하실에 옮겨져 쌓여 있었다. 집을 함께 찾은 권혜경 여사의 조카, 원유택 씨 또한 이 집이 이미 다른 이에게 팔렸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고 했다.
다만 조카 원씨로부터 그동안 새 명의의 집주인인 목사아들 측과 내용증명이 오갔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사아들 측이 ‘2008년 12월까지 권혜경 여사의 물건들을 모두 치워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집에 남아있는 물건들을 가져가지 않으면 임의로 폐기하겠다는 것’을 통보해온 것에 대해 유족 측은 ‘부동산 매매 행위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점’과 함께 몇 가지 의문점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는 내용을 다시 내용증명으로 보냈다. 그 내용증명의 내용과 그에 대한 답변을 확인해보았다. 당시 유족 측인 원유택씨가 보낸 회신 내용 중 답변을 요하는 질문은 이러했다.

1. 이모(권오명, 가수 권혜경의 본명)를 간병하던 주OO씨와 새 주인과의 관계. 2. 간병을 자청하게 된 동기와 시기. 3. 목사님이라는 분의 함자(이름)와 새 주인과의 관계. 그러나 이 집이 또 다른 이에게 팔려 새로운 소유주가 이미 이사와 살고 있는 이 때 까지도 이 내용증명에 대한 회신은 받지 못했다고 했다.
‘사랑마저 물리쳐’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산장에서 살다간 권혜경. 죽어서라도 영원히 ‘산장의 여인’이 되고자 했던 주인공, 그러나 권혜경 여사의 강한 꿈과 의지는 이제 이곳에서 사라졌다.‘해피 앤딩’으로 다큐멘터리를 마무리하고 싶어 했던 우리들의 카메라에 담긴 것은 결국 권혜경의 손때 묻은 기타가 줄이 끊어진 채 지하실에 남겨져 있는 영상이었다. NM 

가수 권혜경(1931~2008)은...

   
 
본명 : 권오명. 1931년 강원 삼척 출생. 1956년 KBS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 이듬해 ‘산장의 여인’을 발표하며 데뷔, 이후 ‘호반의 벤치’, ‘동심초‘, ‘물새 우는 해변’ 등을 발표. 1960년대 전성기 시절 심장판막증, 결핵 등 병마와 싸우며 활동, 이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재소자를 위한 4백여 차례 봉사활동을 펼쳐 수인들 사이에서 ‘어머니’라 불리기도 했다. 생의 절반 이상을 봉사활동에 바쳤던 그는 제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표창을 비롯해 5백여 회 표창을 수상했다. 2008년 5월25일 타계. 현재 청주 일원을 중심으로 ‘권혜경가요제’, ‘노래비 건립’ 등 각종 추모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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